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 두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
아디야샨티 지음, 이창엽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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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생각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생각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평생 끌려온 생각으로부터 탈각하는 순간, 내면의 동공은 '있음'이라는 미지를 향해 돌아선다. 생각으로부터 짊어져온 삶의 무게가 어느샌가 툭 떨어져나가고 살아있는 매 순간의 연속이 기이하리만큼 경이로운 사건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 속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불안이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선불교에선 이렇게 생각으로부터 탈각하기 위해 참선이란 것을 한다. 때론 공안을 참구하고, 때론 침묵 속에 앉아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14년간 스승으로부터 참선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2세대 미국인 선사였다. 그의 스승의 스승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선사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전통적인 선을 해온 조동종 계열 선사들이다. 저자는 선불교 스승에게서 선을 배웠음에도, 전통적인 불교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으며 체계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책 앞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은총, 봉사 등에 관한 이야기는 기독교적이기까지 하다. 람 다스, 토마스 머튼, 마하라지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바운더리는 상당히 광범위한 것 같다.

현대의 영적 스승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특별한 수행 지식 없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일전에 저자의 전작인 '참된 명상'을 읽으면서, 일본 조동종의 수행법인 지관타좌를 아주 현대적으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명상에 관해 아주 현대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다만 전작들인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와 '참된 명상', '완전한 깨달음', '춤추는 공' 등이 깨달음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이었다면 이번 저작은 독자의 폭을 조금 더 넓게 잡고서 다양한 이야기들로 부드럽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느낌이다. 그래선지 이미 어느정도 안목있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조금 불필요하게 에둘러 이야기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상은 집중적으로 고요함 속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때 어려운 점은 내면의 고요함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내면의 소음이 들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념적인 마음의 혼돈 및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생기는 미묘하거나 공공연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마음을 통제하는 것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스승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마음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 전쟁을 영원히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마음과, 자기 감정과, 자기 자신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p.142

의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영적 수행은 더 의식하고 더 알아차리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인정하고 의식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수행하며 애쓰는 사람들은 의식으로 들어가려 하거나 의식을 찾으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는 의식을 잃을 수 없다. 물론 의식에 '대한' 의식은 잃을 수 있다. 즉 자신이 의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그걸 숙고하지 못한 채, 혹은 의식이 얼마나 비범하고 신비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의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을 놓칠 수 있는 까닭은, 의식이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p.184~188

그는 수행자들이 혼란스러워할 부분들을 정확히 짚고 넘어간다. 하지만 때론 '의식'에 대한 강조가, 의식에 대한 대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그는 우리 인식의 초점이 대상이 아닌 대상들의 바탕, '의식'으로 이동할 때 대상들과의 동일시로부터 깨어나 '의식' 속에서 안식을 갖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대상에 동일시되는 것으로 귀속될 위험성이 있다. 번역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의식' 또한 결국 조건화 되어진 대상들이다. 생각이나 감정들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긴 하지만 결국 그또한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대상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으로 이루어졌다 이야기하고, 오온은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오온에는 '식(의식)'이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차릴 때, 깨어있을 때, 주시자로 남아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을 때, 마치 진정한 자신처럼 느껴지는 그 의식조차 결국은 무상한 오온인 것이다. 오온이 오온을 알아차리고 있다. 때문에 선가에서는 알아차림을 불성으로 여기는 것은 도적을 주인으로 삼는 격이라 비판한다.

믿고 읽는 아디야샨티지만, '의식'에 관해서 조금 확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아쉽다. '의식'보다는 '미지'라는 접근 방식이 더 좋았다. 아마도 예상 독자의 범위가 넓은 탓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불가피한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적인 영성가들의 책이 그러하듯,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합리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논리'를 뒤집는다. 상당히 노련한 영성가다. 다만 선불교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저자가 여러 영성 가르침을 복합적으로 다루기보단, 스승으로부터 배운 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선사'로서 가르침을 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가르키는 '진리'가 어떤 종교적 관점, 신앙 체계, 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에크하르트 톨레라던지 제프 포스터라던지.... 이미 현대적인 영성가는 너무도 많다. 이제는 오히려 깨달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관점, 어떤 신앙체계, 어떤 교리에 한정되서 가르침을 펴줬으면 좋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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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spigel(케이) 2020-02-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아드야샨티 법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차분하고도 쉬운 말로 풀어나가더군요. 다만 뭔가 대중들에게서의 요구들이 항상 있고 이를 거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인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선의 가르침을 상당 부분 대중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20-02-16 07: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번 리뷰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아디야샨티의 법문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한번 실제로 현장에 가서 법문을 듣고 싶네요.. 대중화를 통해 아디야 샨티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정말 긍정적이지만.. 몇몇 부분이 조금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같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야샨티가 인상적이었던 것이 대중들과 만나는 자리에 여자친구와 함께와서는 친숙하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풀어나가더군요. 그래도 조용조용한 가운데 상당한 흡인력이 있었구요...7~8년 전이었는데 제일 기억나는 것은, ‘깨달음을 변명으로 일상에서 도피하지 말라, 영성추구를 네가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도구로 삶지말라‘는 메세지였던것 같습니다. 아마도 청중들의 질문 중에 많은 부분이 이러한 부분과 연관되어있어서 그랬던 듯 합니다.

2020-02-16 14:50   좋아요 0 | URL
메세지에 상당한 임팩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성을 쫓게 되는 동인의 대부분이 결국 삶의 그늘진 면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인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깨어남은 삶의 그늘마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의 모든 모습과 심지어는 삶의 종말까지도요,,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7-8년 전쯤 아디야샨티 법문을 현지에서 실제로 들으실 정도면 이 공부를 상당히 깊고 오래 하신 분 같습니다. 교포이신가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포 아닙니다. 아드야샨티를 본건 미국 유학당시였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영성분야와 전혀 무관하게 사회생활하고 있습니다. 선불교나 영성에 관심을 둔 지는 꽤 됐습니다만, 그냥 관심의 단계에서 제대로 공부는 못했습니다...ㅠㅠ.. 아직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 같구요. 닭님의 책은 최근 우연히 제가 인터넷상에서 책 리뷰를 보고 알게 됐네요. ‘무력한 깨달음‘-깨달음으로는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한다..였던가.. 어쨌든 그런 문구가 와닿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프 포스터도 님의 리뷰를 보고 읽어보려구요. 사회생활하면서 수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 들여다보기가 쉽지가 않네요. 저야말로 비효율적(?)이게 선불교, 그 외 대안영성 등등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ㅎㅎ 어떻게 가면 될지 부디 조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0-02-17 08:20   좋아요 0 | URL
사회생활하면서 선이나 영성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는 여간 힘들 것 같습니다. 시시때때로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목전에 놓여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결핍감이나 불안감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관심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이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감히 조언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프 포스터 책이 상당 부분 도움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그늘까지도 수용하게 되는 것, 그래서 선은 님의 말처럼 죽거나 살거나 ‘그러할 뿐‘이라는 것은 이해됩니다. 님의 책에서 선의 스승들이 전쟁을 옹호했다거나 쾌락에 빠져 살았거나 하는 부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님의 책을 읽고난 후 ‘이뭣고‘가 상당히 힘을 받더군요. 굳이 좌선을 하지않아도 문득문득 생활 중에 이뭣고가 들려졌습니다...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최근 버나뎃 로버츠의 ‘어느 관상수도자의 무아체험‘이란 책을 봤는데 기독교적 관상수도의 단계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지복을 느끼는 단계--->어둠의 단계--->이후 마지막 단계에서 저자가 묘사한 단계가 님이 말씀하신 그저 이러할 뿐의 단계와 꽤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신의 가장 중심부로 들어갔더니 지복이나 황홀경이 아니고, 그냥 평소의 내가 밝혀졌을 뿐이더라..라고. 그냥 이대로 이 감각 이대로 보이는 그대로 더라라고.공감하구요..흥미가 생겨서 이 저자의 몇 년 전 책을 아마존에서 구매해놓고 있습니다..ㅎㅎ 이게 제 병이기도 합니다. 읽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ㅠㅠ

2020-02-17 08:32   좋아요 0 | URL
제 이야기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쪽에는 제가 아는 바가 없어 입을 여는 것이 어렵지만,, 기독교 영지주의쪽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선의 가르침과 많은 부분 상통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류 기독교 쪽에서는 이단으로 치부한다는 것 같군요..

저희 선종에서는 수행 중에 책 읽는 것을 거의 금기시하는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이해에만 머물러선 안되겠지만,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직관적 통찰과는 별개로, 이해도 상당 부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제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버나뎃 로버츠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네요... 한 번 구해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