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텐진 갸초 지음, 주민황 옮김, 툽텐 진파 편집 / 하루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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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티벳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티벳불교에도 다른 대승불교권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종파가 존재하고,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알려진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어릴적부터 불교학에 관한 엘리트로 교육시킨다는 것 정도만 언뜻 들었다.


본 책은 티벳불교의 14대 달라이 라마가 반야심경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엮은 책이다. 현대적이고, 이지적이며, 세련됬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깊이있는 교학적 지식들이 깔끔하게 전개된다. 티벳불교의 교학적 전문성을 엿볼 수가 있었다. 티벳불교에는 여러가지 수행 전통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일반적으로는 불교의 가장 전통적인 수행인 사마타-위빠사나(지관수행)를 계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이 남방 상좌부불교의 수행인줄로만 알고있는데, 사실 중국불교에서도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진 모두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에 대한 각찰을 통해 몸과 마음의 공성을 깨닫는 위빠사나 수행이 불교의 전통적 수행이다. 그래서 25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불교 수도승들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쉼없이 관찰했다. 하지만 이런 관찰 수행은 관찰의 뒷편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전제하게 될 위험성이 도사린다. 그래서 남방의 선지식들은 '관찰하는 자'는 없고 '관찰'만 있을 뿐이라 이야기하지만 그 차이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북방 선불교의 조사들은 관찰 수행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여지껏 관찰 수행을 해온 관찰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전통적인 불교권과 선불교간에 엄청난 간극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불교권에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선불교에선 그렇게 수행을 하는 자신을 의심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신을 의심한다. 선불교에서는 점진적 수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 의문, 의구심을 통한 즉각적 통찰(돈오)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중-후기 선불교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금 '수행'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마음을 잘 길들이고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신과 마음을 계발하려면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에서는 점진적 발전 과정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사실 점진적 발전은 자연의 법칙이다. 점진적 발전은 필연적인 인과 법칙이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방편의 결합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p.201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중에서


이것이 티벳불교를 비롯한 일반적 대승불교권, 그리고 남방 상좌부불교의 수행관이다. 그러나 선불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진실한 자기는 근본적 차원이 다른 입장이므로,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자기의 관계는 비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연속적으로 진실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해서 진실한 자기로 전환하므로 임제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나의 견처를 가져 말하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도 없고 이제도 없다. 얻는 자는 바로 얻어서 오랫동안 수행하였다는 세월이 필요없다."라고 말했다.


생사의 자기는 닦을 것이 있지만 생사가 없는 진실한 자기는 닦을 것이 없다. 만일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진실한 자기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임제스님은 닦음이란 장엄문, 불사문이지 불법은 아니라 하고 이것은 업을 조작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생사를 탈각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만일 도를 닦는다면 이것은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통적 조사선을 체험함에는 돈오돈수의 입장이라야 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옹스님 법문 중에서


선불교는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그 깨달음 이후에도 어떠한 작위적 수행을 부정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의가 있을 수 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논쟁이 그 이의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물론 이 또한 '돈오' 이후에 닦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불교의 기본 정신은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에 있다.


우선 '돈오점수설'은 '깨달음'과 '역사'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논리적 차이를 혼동한 수행법이라는 점을 거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이 둘의 논리적 차이를 한마디로 비유해 말하면, '역사의 영역'이란 어떤 것을 붉은 것이다, 푸른 것이다, 또는 붉게 만들어 가야 한다, 푸르게 만들어 가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리저리하게 꾸려나가는 일의 차원이라 한다면, '깨달음의 영역'이란 어떤 '것'이라고 명사화된 그 '것'이 실재가 아님을, 변화와 관계성 속에 노정되어 있는 가설적이며 환상적인 것임을 통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는 '깨달음'의 문제와 그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내용을 담아가는가 하는 '역사적' 문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돈오점수에서는 본성을 깨닫고 난 뒤에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외적인 능력과 완벽한 인격을 갖추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 하는데, 이러한 견해의 이면에는, '깨달음이란 어떤 내용이나 실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어떤 형태의 실재로서 이해하여 수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깨달음을 그 어떤 '것'-본성이라 표현하는-의 실재성을 타파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본성)을 '푸른 것'이나 '붉은 것' 따위로 이해하는 차원으로 전락시킨 것이 되며, 또 이러한 이해의 바탕이라면 이어지는 점진적인 수행이라는 것도 붉은 삼층집이나 붉은 이층집을 짓는 식이며 푸른 삼층집이나 푸른 이층누각을 짓는 것과 같은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응스님, <깨달음과 역사> 중에서


점진적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는 즉각적 깨달음의 합리성에 관한 가장 현대적 해석이다. 개인적으로 현응스님의 견해와 서옹스님의 '돈오돈수'관은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선승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장이 폄하되고 있는 현응스님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점진적 수행 과정 없이 깨닫는다는 것은 파격적이고 때론 파괴적으로 비춰지는 주장이지만, 조금만 깊이 고려해보아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연기설 만큼이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이다.


달라이 라마의 반야심경에 관한 후기를 남긴다는 것이, 일반불교와 선불교간의 수행관 차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졌다.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불교를 처음 접하려는 사람들 중 조금 지식인 층이 읽으면 아주 좋아할 법한 책이다. 서양인들이 왜 티벳불교를 좋아하는 지도 알 것 같다. 티벳불교의 교학적 견고함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책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대중적이고 노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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