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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선사의 삶과 사상 - 제10대 조계종정 혜암대종사 탄신 백주년 기념논집 ㅣ 혜암선사연구 1
(사)혜암선사문화진흥회 지음 / 시화음 / 2020년 4월
평점 :
생각의 바깥을 눈치챘을 때, 생각이 내가 아니고, 몸이 내가 아니고, 느낌이 내가 아니고, 감정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 모든 것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주시하는 듯한 전환이 일어난다. 혹자는 이를 깨어서 살핀다는 각찰이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이를 견문각지의 소소영영함이라 이야기한다. 생각에 물들지 않고, 느낌에 물들지 않고, 감정에 물들지 않고 홀로 또렷히 맑아 더없이 분명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주시하는 각찰이며 소소영영조차, 이렇게 또렷히 맑아 더없이 분명한 이것조차 결국 의식에 불과하다.... 의식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모든 수행의 여정은 끝이 난다. 많은 수행자들이 의식의 각찰을 끌고간다. 각찰을 촘촘히 하여 꿈 없는 깊은 잠에까지 끌고 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오매일여를 이루고 싶어 한다.
앉으나 서나 항상 그러하고, 꿈을 꾸어도 항상 그러하고, 꿈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항상 그러한 것은 만들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고난의 수행 끝에 항상 소소영영한 오매일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오매일여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이미 이뤄져있다. 이미 이뤄져있는 오매일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참선의 역할이다.
지난날 한국불교의 간화선 종장들은 깨달음보다도 수행에 치중했다. 그들은 '본래 그러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본래 그러함'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은 맞는 말이다. 선이란 본래 그러한 것을 깨닫는 일이다.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때문에 본래 그러한 것을 깨닫는데는 큰 힘이 들지 않는다. 선의 황금기라 불리우는 당송시대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을 던져서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장좌불와나 일종식같은 엄격한 수행 방식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현대 한국 간화선 종장들은 장좌불와, 선정삼매, 일종식, 만들어가는 오매일여 수행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진지한 구도과정, 절박한 수행기는 사람들을 감동케하지만, 깨달음에 관한 왜곡된 견해를 형성한다.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자지 않아야만, 깊은 삼매를 경험하고 꿈을 꾸지 않아야만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
나는 그들이 선천적인 수행자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수행의 유전자를 타고 났다.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잠을 적게 자고, 밥을 적게 먹는다. 좌복 위에 앉아 오랜 시간 좌선을 해도 남들만큼 피로하지 않다. 선천적인 수행의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그런 이들이 제방의 지도자로 등극하였을 때, 자신의 수행 방식을 모든 대중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해인사 성철스님이나 원당암 혜암스님은 곧잘 오매일여를 이야기하고, 아뢰야식에 가장 깊숙히 자리 잡은 미세망념까지 끊어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미세망념이 완전히 제거되어서 어떤 망념도 일어나지 않아야만 구경각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깨달음의 요지는 망념의 제거가 아닌 망념의 바탕에 있다.) 그들은 화엄경의 52위를 곁들어 이야기하며, 십지등각을 넘어서야 구경각이라 이야기한다.
그것이 그 분들의 견해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육조서부터 이어진 조사선의 전통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선은 깨달음의 과위를 나누지 않는다. 선의 요지는 깨달음 그 자체에 있지, 깨닫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화엄경에서 깨달음의 과위를 나누는 것은 그 초점이 '깨닫는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본질적으로 접근하게되면 '깨닫는 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환상임을 알게 된다. 깨달음, 바탕에는 주체와 객체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상대성이 없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바탕이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다. 상대성의 세계에서 절대성을 언급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이다. 선불교는 이 모순된 문제점을 정확히 캐치했다. 그리하여 선불교는 깨닫는 주체가 아닌 깨달음 그 자체에 초점을 둔다. 때문에 성품을 보았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성품을 얕게 보았는가 깊게 보았는가는 후일의 문제다.
제방의 간화선 종장들은 조사선을 운운하지만, 실제 조사선의 복고는 재가자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간화선은 조사선을 계승하였지만 조사선은 아니다. 근래에 재가자 위주로 조사선 전통이 무섭게 퍼져나가고 있다. 수행주의로 점철된 제방의 간화선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답보한다. 물론 제방 선원에는 수행이 필요하다. 때가 되면 좌복에 앉아 가부좌를 트는 것은 승가라는 특수한 수행자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에 더하여 장좌불와와 일종식 같은 두타행까지 행해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러한 수행풍토가 깨달음에 관한 본질적 접근을 막고 있다는 데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수행은 어렵다. 깨닫는 것은 쉽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진실이다. 깨달음에는 문이 없다. 그 없는 문을 억지로 만든 것이 간화선이다. 때문에 간화선은 아주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저 공식처럼 열심히 참구해서 삼매를 경험하고 화두를 타파한다는 식으로라면 십만팔천리다. 그런 식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간화행자의 팔할은 이런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무지막지한 깨달음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