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질문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개정판
바이런 케이티·스티븐 미첼 지음, 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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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언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우리를 지배한다. 언어가 등장하여 지각을 물들일 때, 우리의 지각은 사실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언어가 만들어낸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의 영역에 머무를 땐 ‘나’도 하나의 사실이 된다. 생각도, 모든 것도, 심지어 탐진치조차 해석되지 않고 사실의 영역으로 보아질 때는 번뇌가 아닌 것이다.


생각에 함몰된 지각이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그 바탕에서 생각을, 언어적 사유를 응시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사유와 생각이 우리가 눈을 깜빡이거나 코로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생리적 부수작용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난 삶은 놀랍도록 가뿐해진다. (요점은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 '나'라고 얘기하는 것을 진짜 '나'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 숨 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숨쉬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놀랍게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생각되어지고 있었고, 생각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오늘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이미 늦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구름이 텅 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듯, 생각은 허공에서 나와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생각들은 와서 머무르지 않고 지나갑니다. 진실이라 믿고 집착하지만 않으면, 생각은 조금도 해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생각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생각을 이해로 만납니다. 그러면 생각이 나를 놓아줍니다.


생각은 산들바람이나 나뭇잎,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과 다툴 수 있나요? 빗방울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괴로운 생각을 이해로 만나면, 다음에 그 생각이 나타날 때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악몽이었던 생각이 이제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다음에 그 생각이 또 나타날 때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예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p.38~39, 바이런 케이티 저, <네 가지 질문>


바이런 케이티는 미국의 떠오르는 영성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삶의 부조리한 고통이 '생각'을 직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대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잘 정제된 네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아주 정교한 외과의처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예리한 질문 몇가지로 해체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현재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명제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그(그녀)는 나를 괴롭게한다'라는 식의. 바이런 케이티는 이 명제에 스스로 네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첫번째 질문, 그것이 진실인가? 두번째 질문, 그것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세번째 질문, 그 생각을 믿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네번째 질문,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문제라고 믿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아닌, 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생각)임을 확인케하고, 그 해석(생각)의 대상성을 부각하여 생각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특별한 지도자 없이도 스스로 종이에 네 가지 질문을 적어가며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해체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아주 예리하고 심플한 기법을 통해 '생각'을 조사케하고, 그 조사의 결과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한다.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이 기법은 마치 달마와 혜가가 나눈 안심법문을 연상케한다.


그녀는 현상을 다루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상이 아닌, 현상에 대한 해석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상황들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단지 그 현실적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관점의 전환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이것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마음은 생각을 통해서만 자기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각 말고 또 무엇이 있나요? 마음이 달리 어떻게 자기를 발견할까요? 마음은 자기를 위해 실마리들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스스로 자기의 빵 부스러기들을 떨어뜨렸음을 깨닫게 됩니다(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서 인용함-옮긴이). 마음은 그것 자체로부터 나오지만,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탐구는 빵 부스러기들이 그것 자체로 돌아가게 하는 빵 부스러기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 돌아갑니다. 없음은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p.364, 바이런 케이티 저, <네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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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이 기회입니다 - 영혼의 자유를 묻는 그대에게, 개정판
김기태 지음 / 침묵의향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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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 우울, 잡생각, 망상, 무기력, 분노, 미움, 말더듬, 경직, 긴장, 우유부단, 강박, 비열함, 야비함, 이기심, 교만, 기쁨, 환희, 즐거움, 상쾌함, 성실, 겸손, 자비심 등등 모든 번뇌와 오욕칠정이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울이 오면 그냥 좀 우울해하고, 문득 불안이 찾아오면 그냥 좀 불안해하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느 순간 경직과 긴장이 찾아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냥 좀 경직되고 긴장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 살다가 무기력해지면 그냥 좀 무기력해하고, 우유부단하면 그냥 좀 우유부단하며, 속에서 어떤 비열함이 올라오면 그 비열함 또한 자신임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기분이 좋아지면 그냥 기분 좋아하고,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오면 그 순간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삶이 모두 다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중생의 삶 그대로가 곧 부처이며, 번뇌가 바로 보리이다."라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p.201~202, 김기태 저, <지금 이 순간이 기회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산철 결제가 취소되었다. 대중이 흩어지고 몇몇 스님네들만 남아 선원을 지키고 있다. 권태롭게 시간을 죽이던 차에 손에 책이 잡혀 읽어보니 김기태 선생의 책이었다. 김기태 선생의 책은 시종일관 같은 자세를 유지한다. 모든 것에는 문제가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너무나 깔끔하고 담백해서 건드릴 여지가 없다. 특정한 수행 지도법이 없다. 특별한 신비 체험의 일화 같은 것도 없다. 그는 그저 모든 풍경의 문제 없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 이야기는 너무도 담백해서, 어쩔땐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의 관용구처럼 들리기도 한다. 수행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김기태 선생의 가르침은 그 갈증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갈증의 해소가 아닌, 갈증의 직면에서 갈증의 밑바닥까지 침잠할 것을 이야기한다.


김기태 선생의 가르침은 정말 '본질적'이다. 그것은 때로 선불교 조동종의 가르침을 연상케한다. 조동종에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공안은 화두라기보다는 진리, 깨달음의 세계 그 자체를 뜻한다. 진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이뤄져있다는 뜻이다. 조동종은 이 현성공안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일반적으로 밭을 가는 마음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네는 그와 다르다. 벼가 익어도 나가서 거두어들일 생각을 않고, 그대로 비바람에 맞게 내버려 둘 뿐이다. 그대들이여, 이 몸뚱아리는 몸뚱아리 그대로 완성되어 있고, 두 눈은 두 눈대로 그대로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소식은 처음부터 털끝만치도 어긋남 없이 완전한 그대로이다. 그러니 늙은 여우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조동종의 조사인 굉지 선사의 법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견디지 못하여, 때로는 어떤 지지부진한 현실을 초극하기 위하여 깨달음을 갈구한다. 이에 조동종의 선승들은 그 견디지 못하는 마음, 그 깨달음 갈구하는 마음을 묵묵히 비추어보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김기태 선생의 가르침도 그와 같다. 그렇게 갈구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 밖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 마음이 세운 대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자체를 직면한다. 그리하여 현재 딛고 선 지금 여기에 대한 완전함을 발견토록 한다. 그는 어떤 돌파구로서의 해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히 그런 '해법'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의문과 질문을 끝가지 몰아 붙이기보다는 그 의문과 질문이 가리고 있는 '현재'를 목도하도록 한다.


그는 또한 삶의 그늘진 풍경 역시 '진실'이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밖의 풍경을 보며 '그것들은 인과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고 짐짓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도 안의 풍경들에 대하여는 어떻게든 극복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외면의 풍경들이 그러하듯 내면의 풍경들도 인과에 따라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저자는 시기, 질투, 열등,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마저 삶의 진실한 모습임을 이야기한다. 그 진실한 모습들을 애써 극복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는 시기에 흔들리고 질투에 흔들리고 분노에 흔들리더라도, 그 흔들리는 모습 그대로가 삶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긍정, 그리고 또 긍정. 이 긍정의 바탕 위에서 그것들을 극복해나갈 수도 있고, 또는 그 어두운 감정들을 움켜쥐고 삶의 여러가지 그림들을 그려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대한 모든 저항을 그친다면, 그 순간 우리 마음 안에는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더 이상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되는 묘한 힘 같은 것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마음이 만들어 내는 모든 허구적인 고통이 사라지게 되어, 다만 문제 자체가 갖는 약간의 힘겨움과 고통만을 치러 내기만 하면 되기에, 우리의 삶은 한결 가볍고 자유로우며 설명할 수 없는 평화 같은 것을 깊이 맛볼 수 있게 됩니다.


------p.205 김기태 저, <지금 이 순간이 기회입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정말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배우는 사람에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있는 그대로가 문제없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너무도 적확한 이야기이지만, 있는 그대로에 문제없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저 막연한 미사여구로 다가온다. 이런 식의 공부는 스승을 곁에두고 꾸준히 지도받아야만 전환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는 힘을 얻기가 힘들다. 있는 그대로에 문제를 제기하는 '생각'의 힘이 그토록 강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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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 백봉 김기추 거사의 삶과 가르침
최운초 지음 / 가을여행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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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 거사는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유명한데, 승속을 불문하고 재가자로서 그 깨달음을 공공연하게 인정받은 것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2년 전에 태어나 일제치하와 2차 세계대전, 남북전쟁이라는 굵직한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겪어내야했다. 민족운동, 청년운동, 국회의원 등 파란만장한 세상사를 살다가 나이 50이 넘어 불교를 접했고,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그 다음해 견처를 얻는다.


지견이 난 뒤 부터는 금강경을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금방 회상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로 영향력이 조금씩 커지면서부터는 백봉 거사의 유명세가 절집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경봉스님, 전강스님, 구산스님, 혜암스님(수덕사)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과의 교제가 있었다. 종단의 총무원장을 지내고 정화 운동에 앞장 섰던 청담스님은 대의스님과 함께 백봉 거사에게 출가를 권유했다. 지금이야 나이 40, 50이 주된 출가 연령층이지만 그때 당시만해도 삼십이 넘어 출가하면 늦깍이 출가라 하여 절집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풍토에서 종단의 원로스님들이 찾아와 상당한 특혜가 보장된 출가를 권유하니 당시 백봉 거사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대의스님이 하도 그러기에 내 말 들어주면 머리 깎겠다 이랬습니다. 지금 중 반 내보내라, 옷 벗겨라 이랬습니다. 못 벗기겠죠? 내가 그랬어요. 내가 만약 머리를 깎아. 그래서 어떤 조실에 앉는다든지 만약 그래 된다면 난 중 옷 벗기겠단 말이여. 내가 베끼려면 그 중 옷 벗겨지겠습니까? 까딱하면 두들겨 맞아. 하하하. 못합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올바른 행동이 나오죠. 이 제도 가지고는 안 된다. 공부하는 방편 고쳐야 된다. 그러면 그러겠다고. 늦깎이니 뭣이니 그건 상관없다고. 내가 답답해 죽겠어요. 사람 일 년에 몇이나 났느냐 이겁니다. 일 년에 단 열만 나도 좋겠습니다. 열 못나면 하나만 나도 좋겠습니다. 지금 지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도록 지도하지 않는 것이거든.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멍텅구리라도 어째 조금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 백봉 거사, 1983년 남천동 여름 정진 법회 중에서


백봉 거사는 조계종 원로 승려들의 출가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승가의 수행 풍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출가 제의를 거절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풍토는 철저한 방임주의에 있다. 선지식이 화두를 하나 던져주면, 납자는 그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몇몇 수좌들은 혼자 물고 늘어진 끝에 마침내 공의 도리를 맛보긴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더러 많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성철스님이 입적하고서 20여년이 흘렀지만 제방에 이렇다 할 간화선 선지식은 배출되지 않고 있다. 제방에 어른스님들은 납자 제접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당신들이 수행지도 일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원대 간화선을 그대로 계승한 특성이라곤 하지만 이러한 방임주의가 간화선풍의 침체를 불러오고 있다.


몇년전 산철 결제 때 초빙된 교선사스님이 학인들을 앞에두고 선문염송을 읽어보았느냐 물은 적이 있었다. 제목은 들어보았으나 읽지는 못했다는 학인들이 태반이었다. "간화선을 한다는 사람들이, 여태까지 선문염송도 읽지 않고 무엇을 했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은 교선사스님의 말씀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조사선이 부흥한 이래로 당송시대 선불교에서는 수많은 공안들이 발생했는데, 역대 선사들은 이 공안들을 정리하고 수습하여 학인들에게 숱하게 강의하였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제방선원에선 공안을 다루길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공안이란 화두를 타파하고 난 뒤의 일인 것이며, 깨닫기 전에는 읽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 가르쳐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공안이란 부처를 위한 언어 유희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언어를 여읜 언어이다. 공안이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읽어야 할 문답이 아니라 깨닫기 위해 읽어야 할 문답들인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 시대 조사들은 제자들에게 공안을 강의하고 또 강의했다.


대혜종고의 스승이었던 원오극근 선사는 설두선사가 가려 뽑은 공안 100칙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였고, 그 해석들을 학인들에게 강의하기 시작했다. 훗날 학인들이 원오 선사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어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선불교의 백미라 꼽히는 벽암록이다. 물론 벽암록의 간행으로 생긴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공안에 대한 강의와 공안집에 대한 숙독으로 선의 문법을 익힌 자들이 선에 관한 진정한 체득 없이 깨달음을 흉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혜종고는 직접적인 화두선을 창시했고, 그것이 곧 반-공안 수행풍토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벽암록을 불태운 대혜종고 조차도 661개의 공안들에 착어한 정법안장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벽암록의 6배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일본에서는 송나라 공안선의 수행풍토가 잘 보존되어있다. 이것은 일본 임제종의 특색이기도 한데, 그들은 한국과는 달리 공안의 낙처를 통찰하여 '적절한' 답을 내놓는 것이 점진적 수행의 과정으로 인정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납자는 역대 조사들이 이야기한 '언어의 바탕'을 조금씩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조사선 시대의 '직지'가 공안선과 결합한 일본 임제종 특유의 수행가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가풍에서는 선지식의 역할이 직접적이다. 안목없는 선지식은 납자들을 제접할 수 없다. 오직 견처가 있고 안목이 있는 선지식이라야만 지속적으로 납자들을 지도하고 점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 임제종에서는 평상시에도 매일 1~2회 씩, 셋신이라 불리우는 집중 수행기간에는 하루에 너다섯번 씩이나 독참을 한다. 1:1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선문답이 이뤄지는 것이다. "독참을 하지 않으면 좌선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일본 임제종의 격언구다. 이런 점검 시스템은 납자들의 수행의지를 북돋우면서도 능력없는 선지식을 걸러내는 작용이 있다. 한편으론 이러한 수행풍토가 선어록, 공안집에 대한 방대한 해석으로도 이어지는데 이를 두고 한국불교에서는 의리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풍토는 정작 너무도 빈약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공안집 주석서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몇 안되는 주석서들 또한 대부분 재가수행자가 간행한 것들이다. 제방선원의 선사들은 공안에 대해 착어를 하고 해설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수행 풍토가 한국 간화선의 답보를 불러 들이고 있다. 선풍이 부흥하기 위해선 선사들의 직접적인 수행 지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홀로 화두만 참구해야 하는 방임주의 간화선에는 선지식의 수행 지도가 끼어들지 못한다. 제방에서는 항상 '선지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솔직한 말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간화선풍은 선지식의 역할이 거의 전무하다. 어쩌면 40여년전 한국불교의 간화선 종장들도 이러한 문제를 두고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혜성처럼 등장한 백봉 거사를 무리해서라도 승가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것인지 모른다. "이 제도 가지고는 안 된다. 공부하는 방편 고쳐야 된다." 한국 선불교의 르네상스로 불리우던 7~80년대에도 이런 말들이 오갔다.


이 책은 백봉 거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이야기다. 그의 출생과정과 파란만장한 삶, 무자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하여 불교계의 거목으로 활약한 백봉거사의 일대기가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있다. 편집자적 견해가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서 기록하려던 노력이 엿보인다. 백봉 거사는 말년에 이르러 재가수행자들을 위한 새로운 화두 수행법을 제시했는데, 이른바 '새말귀' 수행이다. 현재 서울 보림선원에서 백봉 거사의 후학들이 지도를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새말귀 안내서'라고 하는 수행지도서도 나왔으니 백봉 거사의 수행 지도법을 알고 싶다면 같이 한 번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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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법어 - 道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현대인을 위한 선어록 읽기 9
김태완 지음 / 침묵의향기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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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낯선 곳은 저절로 익숙해지고 익숙한 곳은 저절로 낯설어질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익숙한 곳일까요? 총명하고 영리하게 생각으로 헤아리고 견주어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낯선 곳일까요? 보리, 열반, 진여, 불성이니 사유와 분별이 끊어져 어떻게 헤아릴 수 없고, 그대가 마음을 써서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갑자기 때가 되면, 혹은 옛사람이 도에 들어간 인연 위에서, 혹은 경전을 보다가, 혹은 생활 속 인연에 응하는 곳에서, 좋을 때든 좋지 않을 때든, 몸과 마음이 산란할 때든, 순조롭거나 거슬리는 경계가 나타날 때든, 잠시 심의식이 편안하고 고요할 때든, 어느 때든 상관없이 문득 마음의 회전축을 뒤집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대혜종고 저, 김태완 역, <대혜법어> p.331 중에서


고대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는 서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 중국식 변용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탄생한 새로운 양식의 불교를 북방불교, 중국불교라고 하는데 그 중국불교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선불교이다. 선불교는 6세기 달마에 의해 시작되어 5가지 종파로 발전하는데, 그중 오늘날까지 존속한 종파는 임제종과 조동종 둘 뿐이다. 일본 선불교에서는 조동종이 두각을 드러내지만, 선종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두고 볼 때 선불교의 주류는 언제나 임제종이었다. 임제종은 주로 선종의 공안(화두)을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이 간화선 수행을 체계화하여 보급한 사람이 바로 대혜종고 선사이다.


대혜종고는 어릴적 향교에서 벼루를 던지며 장난치다가 선생의 모자를 맞힌 적이 있는데, 이 일로 그의 부모가 삼백 냥의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대혜종고는 이에 향교 공부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불법을 공부하였다는데, 대선사의 출가 기연치고는 조금 시시하고 독특한 맛이 있다. 그는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0세에 조동종 선승들에게서 선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임제종 선승들을 참문 하였고,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원오극근 화상 밑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선불교를 거론할 때 대혜종고는 결코 빠져선 안 될 선지식으로, 오늘날 까지 현대 선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창시한 간화선은 임제종의 독자적 수행법으로 발전한다. 그렇다해서 간화선 수행에 어떤 차제나 단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각의 작용을 멈추는 것, 그리하여 생각의 테두리 밖을 눈치채게하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시작과 끝이다.


간화선에서는 여러가지 공안들을 제시하는데, 그러한 공안들은 모두 생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간화선 수행자는 '나는 무엇인가?', '어째서 부처가 마삼근인가?', 또는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는가?', '개에게는 어째서 불성이 없는가?'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이에 대한 질문들의 의도는 생각의 작용을 멈추게 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서, 생각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하는 것은 수행이 의도하는 바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질문들을 참구할 때 생각의 작용은 문득 문득 끊어지며, 이윽고 생각의 공백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혜종고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간화선 수행법을 지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수많은 서신을 통해 상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을 독려하였는데, 아마도 이런 방편들이 수많은 제자들의 안목을 여는데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대혜종고 이후 간화선은 시대와 지역을 거치며 약간씩 변형을 이루었다. 원대에는 좌선과 선정의 힘을 빌린 간화선 수행이 발전하며 이러한 선풍은 한국의 조계종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임제종은 공안의 즉각적 타파를 중요시하는데, 공안의 낙처를 통찰함으로써 공空에 대한 직관을 얻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일본 임제종의 이러한 참구 방식은 공안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는 경향성과 여러 공안에 대한 단계적 타파의 수행방식으로 발전하여 일각에서는 의리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공안의 타파가 보통 화두 참구 이후 최종적 깨달음을 공인하는 것이라면 일본에서는 공안 타파가 단계적 수행으로서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의 화두참구가 임제종의 전통적 간화선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다면, 일본의 화두참구는 일본 특유의 방식으로 변용을 이뤘다. 흥미롭게도 현재 서구권 선센터에서 행해지는 간화선은 대부분 일본 임제종의 방식을 따르는데, 아마 공안의 단계적 타파라는 자기 점검의 기준이 수행자들의 구미에 더 당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북미나 유럽에 진출한 선센터에서는 조동종 계열이든 임제종 계열이든 보통 하나의 수행법 보다는 여러가지의 수행법을 병용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일본 조동종의 야스타니 하쿤 선사는 애초부터 임제종과 조동종의 수행법을 결합하여 삼보교단이란 새로운 수행단체를 설립하였고, 이는 서구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만 법고산의 성엄 선사 또한 미국에 진출한 선사들 중 한 명이었는데, 그도 임제종의 간화선과 조동종의 묵조선 수행을 같이 가르쳤고 북방불교식의 속보 경행이 아닌 남방불교식의 위빠사나식 경행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수행법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미국에서 관음선종을 세운 숭산스님 또한 간화선 이외에도 다라니, 주력과 같은 염불수행을 제시하였고 '오직 모를 뿐'이라는 독특한 간화선풍을 창조하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전통적 간화선 수행을 거친 숭산스님이 미국 현지에서 미국인들에게 간화선 수행을 가르칠 땐 일본 임제종 식의 공안의 단계적 타파 방식을 차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유럽과 같은 서구권 또는 다른 이방 국가에서 선을 전파할 때, 수요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선사들이 다양한 방식의 수행을 도입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선사들이 모국의 전통적인 불교 문화권을 떠나 타국에서 선을 이야기할 땐 철저히 수요자의 입장에서 전법을 고민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머리를 밀고 가사를 입은 '전업수행자'들은 수행지원비를 받으며 평생의 시간을 수행에 바칠 수 있기 때문에 수행의 성과에 관해서 조금 느긋한 자세를 취하지만, 별도의 생업이 있고 자비를 내야 수행할 수 있는 재가수행자들은 선센터에서 하루빨리 수행의 가시적 성과를 얻길 바라는 경향성이 강하다. 때문에 해외에서 선센터를 운영하는 선사들은 현지 재가수행자들에게 빠른 시일내에 성과를 얻게 할 수 있는(또는 성과를 얻은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수행법을 제시하는 데에 몰두했다.


이러한 점들은 오늘날 간화선의 현대화를 어떻게 이뤄야하는 가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한국의 간화선은 원대 간화선의 원형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존하였다는데 자부심을 갖지만, 수행자로 하여금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얻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 간화선의 세계화, 간화선의 현대화는 곧 간화선의 시장성, 상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본 임제종의 간화선은 공안의 단계적 타파와 스승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점검 수행 방식으로 세계화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국의 간화선은 세계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간화선은 어떻게 해야 현대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제와서 일본 임제종의 간화선을 모사하는 방식은 무의미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답은 시작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대혜어록을 읽으면서 간화선의 현대화를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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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좌뇌한테 속았네! - 동양철학과 선불교를 위한 뇌과학 교과서
크리스 나이바우어 지음, 김윤종 옮김 / 불광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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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게임을 진행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것을 잊고 좌뇌가 진짜 자신이라고 계속 믿는 것이다. 당신은 동일시를 유지하며 현대사회라고 부르는 이 극장 같은 세상에서 역할을 계속한다. 이 범주와 해석의 세계에서는, 좋은 날도 있지만 나쁜 날도 있다. 친구도 있지만 적도 있다. 승리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패배도 경험한다. 승리에 열광하다가도 패배에 몸을 떤다. 무시무시한 심각함과 긴급함으로 게임에 임하며, 이는 마치 전혀 장난이 아닌 듯하다.


물론 이 접근법에는 어느 정도 불리함이 존재한다. 삶은 정말 짧다. 죽음과 질병은 강력한 적이다. 그리고 가능한 오래, 최대한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가능한 많은 것을 얻을 테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당신도,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배경을 장식하는 엑스트라 역할만 맡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스타덤에 오를 가능성은 언제나 있으며, 그것을 위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감내할 것이다. 이 선택에 잘못된 건 없다. 그리고 이 행성에서 현재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가장 인기 있는 선택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제껏 소개한 개념들에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게임에서 가장 역할 연기를 잘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좌뇌는 축하받아야 마땅하다.


반대편 극단으로 가면, 우뇌와 관련된 것들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선택지가 있다. 이른바 깨달음의 길이다. 이는 붓다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영적 전통을 잇는 성자, 스승, 수도승이 지나갔던 길이다. 명상, 마음챙김, 기도, 요가, 연민, 감사, 그리고 만유가 서로 나누어질 수 없음에 대한 깊은 이해. 이 모든 것이 아주 좋은 출발점이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거기에 도달 하는가"는 신비에 가깝고,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겠지만, 앞서 도달했던 자들이 남겨 놓은 많은 힌트와 표지판이 존재한다. 만일 이 길이 당신의 소명이라 느낀다면, 정중히 예를 갖춰 당신에게 절하는 바이다. 그리고 여정에 축복이 함께하길 빈다.


제 3의 선택지는 이른바 중도(middle path)라고 불린다. 앞의 두 가지 길에 한 발씩 걸친다. 이 길을 선택하면 게임이 딱 재미있을 만큼만 심각함을 유지한다. 아이가 축구게임에서 이겼을 때만큼만 신나하고,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만큼만 슬퍼하는, 딱 그정도의 심각성이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어느 쪽에서도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 이면에서 당신은 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패배 없이 승리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승리는 궁극적으로 패배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당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가운데로 난 길에서 당신은 가판대에 놓인 삼류 잡지를 바라보며, 그것이 가십거리 난센스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창조성과 영성의 표현임을 안다. 운전할 때 누군가 당신 앞으로 갑자기 끼어들면 화가 불같이 올라옴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속으로는 이 바보 같은 드라마에 웃음 짓는다. 에고없는 의식을 경험하며 "내가 없으니 어떤 문제도 없음"을 온전히 수용하다가도, 불과 몇 분 뒤 직장 동료가 당신을 못 본척 지나가면 쓰윽 하고 에고가 올라옴을 느낀다.


사실, 이미 당신은 딱 이런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명상하며, 마음챙김 수행을 하며, 자신이 영적으로 단단히 뿌리박고 있음을 느끼다가도, 다음 순간 에고가 접속하면 커피가 떨어진 걸 알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요가를 하며 대단한 기분을 느끼다가도, 집에 갈 때 누군가 당신 차에 긁힌 자국을 낸 걸 보고 불같이 화낸다. 이렇듯 마음의 교묘한 작용을 딱히 집착 없이 바라봄은 일종의 현대판 중도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 나이바우어 지음, 김윤종 옮김, 「자네, 자뇌한테 속았네!」 p.191~193 중에서


이따금 탁월한 책을 읽게 되면 가슴이 뛸 때가 있다. 가슴 뛰게 하는 책은 많지 않은데, 크리스 나이바우어의 책이 바로 그런 몇 안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뇌과학과 선수행을 어설프게 교차시킨 그저 그런 책인줄 알았건만 책 중후반 부에 가서는 그 탁월함에 손이 달달 떨릴 지경이었다. 그가 미국이 아닌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그는 틀림없이 뛰어난 선사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그가 당장 선원에 가서 머리를 밀고 가사를 입고 법상에 올라 선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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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ocean 2020-03-15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마터면 깨달을 뻔˝ 이란 책은 혹시 안 읽어보셨나요?

2020-03-15 20:05   좋아요 0 | URL
네... 아직 안 읽어보았습니다. 현재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는데.. 조만간에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우야 2020-04-06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서평을 읽고 책을 구해 보았는데, 과연 좋은 책이더군요. 숭산 스님과 외국인 제자들 사이에서 오갔던 서한과 법문 생각도 나고, 미국인 선사들이 현대적으로 요약 및 각색하여 설한 가르침 생각도 나더군요. 좋은 서평과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2020-04-09 07: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