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 스님의 조금 특별한 불교 이야기 - 자본과 권력의 관점에서 본 새로운 불교의 역사
자현 스님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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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스님의 선불교 강의를 유튜브로 듣다가, 강의 내용이 흥미로워 책까지 샀다. 일반적으로 불교 안에서 불교를 서술하는 개론서들은 천편일률적인데 반해, 본서는 불교 밖에서 자본과 권력, 기후와 풍토, 인도인과 중국인의 고유한 사상적 배경 등 외부 소재를 가지고 불교를 들여다 본다. 참으로 흥미롭고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면 남방의 초기불교와 북방 선불교간의 차이를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고통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고락의 상대적인 고를 생각한다. 이것은 중국철학적인 고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살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고는 생멸의 군상 속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서의 '일체가 고'이다. 즉 미망의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불교는 꿈과 같은 세계에서 깨어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즉 매트릭스 안에서의 일은 모두 다 무가치하며 헛된 고일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인공 네오는 매트릭스 안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매트릭스를 무너트리려고 한다.

매트릭스 안에도 나름의 즐거움은 있을 수 있다. 마치 꿈속에서도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므로 모두 다 헛된 고일뿐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본질적인 고'라고 한다. 즉 불교는 깸과 꿈의 두 가지를 말하며, 꿈은 어떠한 경우에도 고이며 낙일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p.091 중에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불교'는 중국 선불교를 제외한 전통불교를 지칭한다. 인도에서 시작된 전통불교는 삶이 '본질적으로' 고라고 이야기하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중국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불교는 삶이 '본질적으로' 괴롭다는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으로 인한 삶의 부조리'라는 부분만 해결되면 삶은 누리고 경험해야 할 대상이 된다.


현실은 꿈과 같이 헛된 것이지만 깸의 세계가 별도로 있는 인도불교와는 달리, 선종에서 현실은 부정의 대상이 아닌 대긍정의 유희 대상으로 전환된다. .....(중략) 현실긍정론은 중국철학의 기본 배경으로, 상고주의나 역사주의와 같은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정신과 권력의 성취 의지와도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선)불교는 자각을 통해서 깨어난다는 인도 불교의 비역사주의적인 관점과는 큰 차이를 지닌다.


------p.277 중에서



본서의 후반부에서는 선불교의 돈오사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돈오는 인식론적 전환의 문제이며, 돈오라는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면 돈오 '이후'의 부분은 수행적 측면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저자의 말은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선불교의 돈오와 현실긍정은 이후 윤리성의 결여, 출가의 불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선불교의 가장 취약점인 윤리 문제는 미국에서 선불교가 쇠퇴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또, 선의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은 종국에 출가 필요성의 문제제기가 발생하는데, 선사들의 무애행 및 환속은 이 지점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현재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은 소의경전을 금강경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실제 선경에 가장 가까운 것이 유마경이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유마경의 주인공은 유마거사라는 재가자이다. 이는 선의 궁극적 귀결에는 출가와 재가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상징하지만, 이는 승가라는 출가 수행 공동체에서 보자면 상당히 치명적이고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선은 모든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지만, 그것은 동시에 윤리와 승가 존립의 문제를 내포한다.


본서는 인도불교와 중국 선불교의 차이뿐 아니라 불교 전체를 폭넓게 아우르며 여러 논제들을 참신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불교적 지식이 전무한 독자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기초 불교교리와 불교사적 지식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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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 개설
정성본 지음 / 민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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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나 선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여건이나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p.27, 정성본, 「선불교 개설」 중에서


지리적, 기후학적 환경에 따라 종교, 철학적 사상이 각기 다르게 전개된다는 이야기로 선불교 개설이 시작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계 종교와 인도의 초기불교, 중국의 선불교가 각기의 기후와 풍토 특성에 따라 독창적으로 전개된다는 내용.


중국의 문화는 상당히 정치적이며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충효의 정신과 인간 도덕의 윤리 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의 교육은 현실 생활을 절대 긍정하는 인간의 윤리적인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p.25


사람들은 남방불교, 티벳불교, 선불교 등 여러 불교를 '불교'라는 하나의 큰 틀로 보지만,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보면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간극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마다 각 지역에서 독창적으로 발전한 불교들을 무리하게 하나로 회통하려는 시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각기의 불교에는 저마다의 입장이 있다. 독창적 입장들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고유하게 전개되는 것이 오히려 불교가 풍요로워지는 길이다.


대체적으로 평이하면서도 기존의 개론서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갖기도 한다. 불교를 공부하는 불학도라면 한번 쯤 읽어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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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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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준비를 하며 이곳 저곳 청소를 하다가 문득 도올 선생의 책 두 권을 발견했다. 하나는 반야심경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한 권은 금강경 역해... 문득 호기심에 책장 넘기며 읽어보니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다. 반야심경에 관해 썼다는 책은 좋게 말하자면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에 관한 총체적 개론 안내서였다. 안좋게 말하자면 기존 시중에 나와있는 불교 개론서에 대한 전형적 답습이었다. 책 앞 부분에 수록된 개인적 수행에서의 신비체험이 그에게 불교적 깨달음을 주지는 못했나보다.


첫 번째 책이 이러하니 두 번째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안목이 없다. 법에 대한 안목이 없다. 법에 대한 안목없이 그럴듯한 인문학적 사변을 늘어놓는다. 전형적인 교양으로서의 불교를 다룬다. 학자적 접근. 참신한 맛이 없다.


불교는 운명이다. 불교에 대한 서술은 체험 이후의 것이다. 학자들은 불교의 교리를 개괄하고 불교사적 흐름을 기계적 도식처럼 따라가면서 불교를 논한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는 이상한 신비체험도 아니고, 선의 문법을 익히는 일도 아니고,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는 실증이다. 이것은 맥박 위에서 증명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도올 선생의 책을 보면서 점점 화가 나 책을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안목이 없다면 창의적이기라도 해야 한다. 그의 말에는 창의적인 것이 전혀 없다. 어디선가 들어온 말들이 반복된다. 지식에 대한 확장적 공부를 해온 사람들은 그 지식에 매몰당한다. 지식의 파편들을 되뇌는 앵무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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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폴 존슨 지음, 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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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마르크스, 톨스토이, 헤밍웨이, 브레히드, 러셀, 사르트르, 오웰, 촘스키 등.... 거물 지식인들의 이면성을 파헤친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이면적이다. 위선, 허영, 남성우월주의, 이기심, 과시욕 등등... 저자는 지식인들의 지저분한 사생활과 그 이중성을 신랄하게 파헤치지만,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위선이 있고 허영이 있고, 또 이기주의도 좀 있는 것이고....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다. 인간적 위대함을 성취하겠다고 수행하는 종교 수행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간성인데, 하물며 지식인들이라고 예외일까.


그런데 저자가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라인업이 대체로 좌파적 경향이다. 저자는 좌파적 이데올로기에 많은 반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문학이라던가 예술이라던가 인문학계가 원래부터 좌파 경향이라고는 하지만, 저자가 줄 세운 라인업은 노골적으로 좌파적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좌파적 사상가들의 이중성을 까발린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부르주아의 삶을 산 지식인들의 이중성 같은 것들.. 그런데 어쩌겠는가. 원래 글을 쓰고 사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인텔리며 중산층이고 부르주아들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불행한 인텔리와 불행한 부르주아들이.


조금 여유가 있으면서 불행한 이들이 글을 쓰고 사상을 만든다. 지식인들의 삶은 대체로 고통과 좌절에 얼룩져있다. 불행한 인간만이 글을 쓴다.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다. 사상같은 것을 만들 필요도 없다. 행복한 이들은 삶 속에서 늘 충만함을 건져 올리니까. 그런데 조금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들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불행과 고통은 이상을 쫓게 만든다. 지식인들의 내면에서 모순과 부조리, 이기주의, 우월심, 사치욕, 불안정하고 방탕한 정신성이 나타나는건 당연한 것이다. 사상은 평화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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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선사의 삶과 사상 - 제10대 조계종정 혜암대종사 탄신 백주년 기념논집 혜암선사연구 1
(사)혜암선사문화진흥회 지음 / 시화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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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바깥을 눈치챘을 때, 생각이 내가 아니고, 몸이 내가 아니고, 느낌이 내가 아니고, 감정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 모든 것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주시하는 듯한 전환이 일어난다. 혹자는 이를 깨어서 살핀다는 각찰이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이를 견문각지의 소소영영함이라 이야기한다. 생각에 물들지 않고, 느낌에 물들지 않고, 감정에 물들지 않고 홀로 또렷히 맑아 더없이 분명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주시하는 각찰이며 소소영영조차, 이렇게 또렷히 맑아 더없이 분명한 이것조차 결국 의식에 불과하다.... 의식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모든 수행의 여정은 끝이 난다. 많은 수행자들이 의식의 각찰을 끌고간다. 각찰을 촘촘히 하여 꿈 없는 깊은 잠에까지 끌고 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오매일여를 이루고 싶어 한다.


앉으나 서나 항상 그러하고, 꿈을 꾸어도 항상 그러하고, 꿈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항상 그러한 것은 만들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고난의 수행 끝에 항상 소소영영한 오매일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오매일여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이미 이뤄져있다. 이미 이뤄져있는 오매일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참선의 역할이다.


지난날 한국불교의 간화선 종장들은 깨달음보다도 수행에 치중했다. 그들은 '본래 그러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본래 그러함'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은 맞는 말이다. 선이란 본래 그러한 것을 깨닫는 일이다.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때문에 본래 그러한 것을 깨닫는데는 큰 힘이 들지 않는다. 선의 황금기라 불리우는 당송시대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을 던져서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장좌불와나 일종식같은 엄격한 수행 방식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현대 한국 간화선 종장들은 장좌불와, 선정삼매, 일종식, 만들어가는 오매일여 수행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진지한 구도과정, 절박한 수행기는 사람들을 감동케하지만, 깨달음에 관한 왜곡된 견해를 형성한다.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자지 않아야만, 깊은 삼매를 경험하고 꿈을 꾸지 않아야만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


나는 그들이 선천적인 수행자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수행의 유전자를 타고 났다.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잠을 적게 자고, 밥을 적게 먹는다. 좌복 위에 앉아 오랜 시간 좌선을 해도 남들만큼 피로하지 않다. 선천적인 수행의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그런 이들이 제방의 지도자로 등극하였을 때, 자신의 수행 방식을 모든 대중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해인사 성철스님이나 원당암 혜암스님은 곧잘 오매일여를 이야기하고, 아뢰야식에 가장 깊숙히 자리 잡은 미세망념까지 끊어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미세망념이 완전히 제거되어서 어떤 망념도 일어나지 않아야만 구경각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깨달음의 요지는 망념의 제거가 아닌 망념의 바탕에 있다.) 그들은 화엄경의 52위를 곁들어 이야기하며, 십지등각을 넘어서야 구경각이라 이야기한다.


그것이 그 분들의 견해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육조서부터 이어진 조사선의 전통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선은 깨달음의 과위를 나누지 않는다. 선의 요지는 깨달음 그 자체에 있지, 깨닫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화엄경에서 깨달음의 과위를 나누는 것은 그 초점이 '깨닫는 사람'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본질적으로 접근하게되면 '깨닫는 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환상임을 알게 된다. 깨달음, 바탕에는 주체와 객체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상대성이 없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바탕이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다. 상대성의 세계에서 절대성을 언급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이다. 선불교는 이 모순된 문제점을 정확히 캐치했다. 그리하여 선불교는 깨닫는 주체가 아닌 깨달음 그 자체에 초점을 둔다. 때문에 성품을 보았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성품을 얕게 보았는가 깊게 보았는가는 후일의 문제다.


제방의 간화선 종장들은 조사선을 운운하지만, 실제 조사선의 복고는 재가자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간화선은 조사선을 계승하였지만 조사선은 아니다. 근래에 재가자 위주로 조사선 전통이 무섭게 퍼져나가고 있다. 수행주의로 점철된 제방의 간화선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답보한다. 물론 제방 선원에는 수행이 필요하다. 때가 되면 좌복에 앉아 가부좌를 트는 것은 승가라는 특수한 수행자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에 더하여 장좌불와와 일종식 같은 두타행까지 행해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러한 수행풍토가 깨달음에 관한 본질적 접근을 막고 있다는 데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수행은 어렵다. 깨닫는 것은 쉽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진실이다. 깨달음에는 문이 없다. 그 없는 문을 억지로 만든 것이 간화선이다. 때문에 간화선은 아주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저 공식처럼 열심히 참구해서 삼매를 경험하고 화두를 타파한다는 식으로라면 십만팔천리다. 그런 식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간화행자의 팔할은 이런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무지막지한 깨달음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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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ovian 2020-06-0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항상 그리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0-08-29 19: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keispigel(케이) 2020-08-19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또 한 번 깊이 보게 됩니다.

2020-08-29 19:4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