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빈 거울에 담긴 노래 : 마조 21세기를 사는 지혜의 서 13
오쇼 라즈니쉬 강의,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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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는 인도의 영성가다. 깨달음을 얻은 구루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보는 조금 독특하다. 조르바 붓다를 자처하며 세속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지혜를 둘 다 자유자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법문은 아주 다양하다. 자신의 독자적 가르침 외에도 다른 제도권의 여러 종교와 철학들마저 건드리지 않은 것이 없다. 오쇼가 선에 관해 이야기했다길래 책을 한 번 사다 읽었다. 인도의 구루가 중국 선불교 선사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다. 한 권 다 읽어보고나니, 결과적으로 특별할 것은 없다. 평이하다. 안목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겠지만서도, 법문의 내용이 아주 깊고 치밀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초심자들에 대한 법문이어서 그러하리라. 오쇼의 법문에는 조금 시적인 냄새가 난다. 그의 법문은 아름답다. 그는 미사여구를 잘 쓴다. 그런 미사여구에 사람들은 현혹되기 쉽다. 그의 아름다운 말들과는 반대로, 깨달음의 현실은 의외로 건조하고 담담하며 맛이 없다. 오쇼는 타고난 비즈니스꾼이다. 그가 깨달은 구루였다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는 깨달음을 '상품화'하는데 재주가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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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야 2020-02-2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년 오레곤 주의 공동체 건설 과정에서, 폭주하던 추종자 집단의 탈법과 불법을 통제하지 못(안)한 오쇼의 모습에서 깨달음의 건조/무력함이 엿보이는 듯 싶습니다. 오쇼의 저작에 잠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러한 말년의 흑역사를 알게 되고 흥미를 잃어버렸었지요. 아마 당시에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전능에 가까운 깨달음이라는 환상에 의거하여, 실망 및 평가절하를 하게 되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다가 최근에 우연히 오쇼의 저작 일부를 읽게 되었는데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기는 했다 것이 와닿았습니다. 이는 그간의 경험으로 말년 공동체의 추태와 오쇼 개인의 깨달음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 보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지난 세기를 풍미하였던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 중에 오쇼만큼 장사를 잘했던 사람은 없었으며, 또한 수없이 많던 영적 장사꾼들 중에서 오쇼만큼 깨달았던 사람은 없지 않았나하는 감상입니다.

2020-02-22 19:11   좋아요 0 | URL
우야님의 감상에 적극 공감합니다.... 그는 정말 뛰어나고 감각있는 구루였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에 지혜로운 처신과 윤리적 도덕이 같이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았다고 알려진 일부 선사와 구루들의 행보를 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깨달음은 깨달음의 영역이 있고, 삶은 또 삶의 영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달은 이의 행보는 도덕 윤리와는 별개다 도덕적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닭님의 글에서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그건 깨달음이 선을 지향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 윤리 자체가 우리 관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일겁니다. 오쇼가 스리 바가반으로 알려졌던 때 홍신자선생님같은 순수한 구도자들이 제자를 자처했던것은 그의 영성이 가공이나 과장이 아니고 당대의 크리슈나무르티에 필적하는 거대한 울림을 가졌기때문이라 생각합니다

2020-02-23 16:37   좋아요 0 | URL
‘기존의 도덕 윤리 자체가 우리 관념에서 만들어졌다‘는 케이님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만..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윤리학자들에게는 민감할 내용일테니까요...

오쇼의 영성이 당대에 거대한 울림을 가졌다는 것에는 정말 이견이 없습니다.. 지금도 오쇼는 구도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2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도덕윤리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지요..도덕윤리는 그 자체로 당연히 필요한것이구요.제가 지금까지 보아왔던는 깨어난 분들은 타인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더크다고 느껴졌습니다. 사회적인 도덕과 윤리보다 더 큰 ..존재자체에의 경외심..다만 깨어났어도 음주와 자유분방한 관계 등 사회의 선호적인 윤리에 부합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깨어남이 주는 울림은여전히 전해지더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2020-02-25 17:02   좋아요 0 | URL
네.. 경외심인 것 같습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로운 경외심... 그것이 이것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경이로운 부재 - 삶의 한가운데에서 해탈하기 Modern Spiritual Classic 4
제프 포스터 지음, 심성일 옮김 / 침묵의향기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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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제프 포스터의 신간 깊은 받아들임을 읽고나서 이 책을 찾았다. 저자의 이야기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현대적이고, 편안하면서도, 이지적이고, 아주 예리하고 치밀하다. 저자는 젊은 날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 우울증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실존적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바탕에 대한 자각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받아들임이었다고 한다. 캠브릿지를 졸업한 이 젊은 영적 지도자는 비이원론의 영적 가르침을 설파한다. 그것은 때로 뉴에이지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선불교의 가르침과도 상통한 것 같다. 선을 가르치는 심성일님께서 왜 이 책을 번역했는지 알 것 같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선의 냄새가 짙다.


나 또한 선불교 제도권 안에서 공부하면서 얻은 통찰과 영감을 갖고 이런 저런 글들을 쓰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편안하고 현대적이면서 적합하게 다가갈만한 글로써는 이 글을 뛰어넘을 만한 글이 없을 것같다. 직접적이면서도 아주 명쾌하다. 현대인들에게 최적화되어있다.


저번에 읽은 저자의 신간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책에도 저자는 한결같이 '추구'의 중단을 이야기한다. <깊은 받아들임>에서는 심리적 추구에 주목했다면 이 책에서는 영적 추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모든 영적 구도는 좌절되어야 한다고.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절망 또한 사라진다고.


사람들은 추구하여 획득하고자 하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그 추구가 좌절되었을 때야말로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 그래서 일본의 도겐 선사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깨달음을 드러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저자는 깨달음, 완전한 영적 평화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수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고 진실된 목소리로, 진실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가 '생각'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자는 '추구'를 내려놓을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는 안목있는 사람들에겐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절절히 공감할만한 것들이지마는, 아직 안목이 없는 이들에겐 그 얘기가 그 얘기같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당송시대 번성했던 조사선의 '직지'가 그 이후에 전승되지 못했던 것은 구도자들이 디딜 발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바로 가리키는' 가르침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늘상 스승을 옆에 두고 공부하는 이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구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이제 막 안목을 갖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읽기에 적합한 것 같다. 깨어났지만 그 깨어남의 길목 들에 도사리는 함정들을 아주 예리하고 치밀하게 지적해낸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해탈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상태이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부 헛소리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생각이고, 또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p.94


목격자가 목격되는 모든 것과 하나 될 때, 자각이 자각되는 내용물과 하나 될 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깊고 완전한 매혹뿐입니다. -----p.111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제프, 그게 당신한테는 어떤가요? 깨어 있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가요?"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모두가 어떤 개인을 향한 질문인데, 여기에는 그런 개인이 없습니다. 깨달음? 깨어남? 하나임? 그것은 모두 개인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없다면, 여기에는 깨달을 사람도 없고, 깨어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하나임'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p.119


제프가 (깨닫기) 전에는 우울했고, (깨달은) 지금은 우울하지 않은 걸까요? 아뇨, 떨어져 나간 것은 내가 (우울하거나 우울하지 않은) '제프'라는 느낌입니다. 떨어져 나간 것은 분리된 개인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여기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는 부분인데, 제프라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기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등장인물의 성격과 기질은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해탈은 성격과 기질을 잃어버리거나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개성이 없어지거나, 뒤로 물러나 삶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영적인 추구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p.120


예전에는 나도 명상을 하는 것이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더 '영적'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가 충격적일 만큼 평등하다는 것을 보게 되자, 그런 분별적인 관념들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명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고, 자기탐구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명상에 관심이 없고, 현존을 실천하는 일에도, 고요함이나 다른 무엇과 접촉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삶은 지금 이대로 언제나 충분합니다. -----p.123


언젠가 어느 아드바이타(비이원론) 스승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전히 거기'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내가 '여전히 한 사람'이라고, 또는 나의 사람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또는 그 비슷하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는 물론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그의 '사람'은 아마 그에게, 다른 사람들의 사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때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법 같은 능력을 주고는 사라졌나 봅니다. 어쨌든, 자기에게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매우 개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사람 없는' 사람이 놓치고 있는 점은, 다른 사람의 현존이나 부재를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모두 투사와 내사의 게임입니다. 교묘한 속임수들입니다. '여기'있는 사람이 '저 바깥으로' 사람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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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받아들임 - 바다보다 드넓은 참된 자기로 살아가기 Modern Spiritual Classic 6
제프 포스터 지음, 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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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어느 여름날 친구가 죽었다. 학교 안에 차려진 분향소에는 스무살 남짓한 학생들의 영정사진이 즐비해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성거렸고,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몰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죽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은 언제든 죽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로 죽음의 불안에서 오는 근원적 결핍감이 나를 흔들었다. 내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들었다. 사는 것이 허무했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그만두고 절에 들어갔다. 그리고 중이 되었다. 중이 되어서는 선원에 갔고, 좌복 위에 앉아 사람들이 참선이라 부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우울, 권태, 허무,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근원적 결핍감. 그런 것들이 결국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내몬다. 영성을 찾고, 구도자가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제프 포스터도 아주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그랬다 하고. 결국 병든 인간들만이 참선을 하고 영성을 이야기하며 깨달음을 찾는 것이다.


나는 전통적인 선불교 제도권에서 공부해왔지만 비이원론 전통의 많은 영적 가르침 또한 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느 날 나는 선원장스님께 물었다. "스님, 이 선이라고 하는 것... 선이라고 하는 것의 효용은 안도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심리적인 안도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근원적이고, 더 깊은 안도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지."


선을 하면서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선이란 그 '무엇'이 아닌, 그 무엇들의 '바탕'에서 살아가게 해주었다. 초점이 몸과 마음이 아닌 몸과 마음의 바탕으로 옮겨가면서, 삶의 방식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뀌어나갔다.


저자는 깊은 받아들임을 통한 궁극의 평화는 '개인적' 평화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어떤 개체적, 심리적 결과물이 아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완전한 의미의 평화임을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여전히 참선이나 영성적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평화'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심리적 평화를 얻는 것은 결국 또다른 풍경일 뿐이다. 근본적인 것은 모든 풍경의 배경을 아는 것이지, 풍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풍경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또다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근원적 평화, 근원적 안도감이며 오직 이것이야말로 실존의 근원적 결핍감을 해소한다고 본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근원적 '불안'의 해소라고 이야기해야할까..


저자는 생각, 느낌, 감정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의 바탕에서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길 이야기한다. 그 받아들임은 은밀하게 가장된 '추구'를 내려놓음으로써 이뤄진다. 저자의 이야기는 특별한 영성적-수행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성이나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추장한 이야기들 또한 몰라도 상관없다. 저자는 삶의 자질구레한 사건들, 이를테면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던가,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 자기 자아감이 좌절되는 데서 오는 무력함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사건 사례들을 통해 그 모든 추구의 날 것을 그대로 직시할 것을 이야기한다.


돌아보면, 그렇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하나의 주제(다른 말로는, 추구)가 있었습니다. 즉, 나는 통증을 받아들이면 '통증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심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임으로 가장한, 통증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영적 수행이라니, 추구자가 숨기에 얼마나 교묘한 장소인가요! 어떤 희망이나 동기, 기대를 품고 하는 받아들임은 참된 받아들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장된 거부입니다. ----- p.84


이 책에서 나는, 겉보기에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더 깊은 의미의 좋음을 알아차리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겉보기에 상황이 완전해 보이지 않을 때도, 더 깊은 완전함을 보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궁극의 이완, 궁극의 평화, 궁극의 쉼에 관해 얘기합니다. 당신이 분리된 개인으로서 이완되거나 평화로워지거나 쉬는 방법에 관해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을 포함하여 모든 생각, 모든 감각, 모든 느낌이 당신 자신인 그 공간에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때 주어지는 더 깊은 의미의 이완에 관해 얘기합니다. ------ p. 86


저자는 어떠한 것을 더 좋게 바꾸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실상을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길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은밀하게 행해져온 '추구'를 직시하는 것으로 이뤄지며, 그 받아들임은 또다시 '추구'를 멈추게 하는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다만 저자의 이런 견해가 구도자들로 하여금 또다시 가장 은밀한 '추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론 현실적 문제들이 '추구'를 통해 빚어지기에, 그 '추구'가 멈춰지면 현실적 문제들 또한 많은 부분 해소되리라는 뉘앙스를 넌지시 비추고 있다. 깨어남과 깨달음이 주변의 갈등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현실적 문제들이 여전히 그대로 산재한다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제방에 어른스님 몇분도 "혼자 깨달아 뭣하냐"는 말을 하시는데, 이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깨달음의 정의와 범위는 너무 광범위해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할 듯.)


이른바 가장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조차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는 여전히 갈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정말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깨달음의 의미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일까요? ----- p.218


선불교에서는 돈오돈수라는 말이 있다. 단박에 깨달아 단밖에 닦아 마친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오직 깨달음만 이야기할 뿐이지 수행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수행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고, 깨닫고 나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진실한 자기는 근본적 차원이 다른 입장이므로,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자기의 관계는 비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연속적으로 진실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해서 진실한 자기로 전환하므로 임제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나의 견처를 가져 말하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도 없고 이제도 없다. 얻는 자는 바로 얻어서 오랫동안 수행하였다는 세월이 필요없다."라고 말했다.


생사의 자기는 닦을 것이 있지만 생사가 없는 진실한 자기는 닦을 것이 없다. 만일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진실한 자기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임제스님은 닦음이란 장엄문, 불사문이지 불법은 아니라 하고 이것은 업을 조작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생사를 탈각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만일 도를 닦는다면 이것은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통적 조사선을 체험함에는 돈오돈수의 입장이라야 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서옹스님 법문 중에서


​아마 이것이 선불교와 여러 영적 가르침들 간의 공통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선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오직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실존의 불안에 관한 해결을 중점으로 두지만, 현대의 영적 가르침들은 그보다도 삶의 현실적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다. 똑같은 깨달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깨달음의 효용이 어디에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조금 달라지는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그럴싸한 영적 미사여구들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고, 정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또 치밀하게 법을 이야기한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부담없이 펴들만 하지만, 그 안의 내용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현실의 부정, 소망적 사고, 희망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큰 자유는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희망과 꿈, 계획과 아무리 강하게 충돌하더라도. - P44

깨어남은 삶에 참여하는 것의 끝이 아닙니다. 참여의 시작일 뿐입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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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다 -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샬럿 조코 백 지음, 안희경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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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샬럿 조코 백이라는 미국인 선사가 쓴 책이다. 1960년대, 야스타니 하쿤 선사와 타이잔 마에즈미 선사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로스엔젤레스 선원에서 마에즈미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일본인 선사로부터 전법받은 1세대 미국인 선사이며, 샌디에고에서 Ordinary Mind Zen School을 설립하여 선을 전파하다가 2011년에 입적하였다. 조동종 계열의 승려이며, 이 책은 조동종의 전통 수행법인 묵조선, 지관타좌를 다룬다. 전문적인 수행용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선수행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어도 접근 가능하다. 다만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의 깊이가 상당히 깊다. 선의 현대화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고답적인 불교 용어는 피하고, 현대적인 용어들로만 선을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세련됬다. (미국 선불교의 특징이다.) 선에 관한 안목의 깊이도 굉장히 뛰어나서, 한번 훑어보고 덮을만한 책이 아니다. 사실 이런 책은 명상 에세이라기보다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는 수행승들이나 재가수행자들이 읽어야 할 수행지침서에 가깝다.


수행은 '영성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단어가 통용될만한 그런 개념은 아니다. 수행이란 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자 한다면 '영성적' 상태에 목표를 둘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수행이 유혹적이면서 해로운 목적이 될 수 있다.


수행의 길에서는 '좋은' 것만 밝게 비추고 소위 '나쁜' 것이라 불리는 상태를 제거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지려는 몸부림은 수행이 아니다. 그런 훈련은 운동 종목에 행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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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물어왔다. "관찰하는 수행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이분법적인 수행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가 관찰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분리된 둘이 아니다. 관찰하는 자는 따로 떨어져 나온 다른 주체가 아니라 대신 빈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공'인 존재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저 관찰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듣는 이도 없다. 다만 듣는 행위만 있을 뿐이다. 보는 사람도 없다. 그저 보는 행위만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체인 관찰자를 너무나 꽉 움켜쥐고 있다. 수행을 충실하게 했다면 관찰하는 사람만 빈 존재가 아니라 관찰되는 대상도 비어 있다는 것을 읽히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찰자(목격자)는 붕괴된다. 이것이 수행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 관찰하는 주체가 마침내 파괴되는 걸까? '없음'이 '없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까? 삶의 경이로움뿐이다. 그 무엇에서 분리된 그 어떤 이도 없다. 오로지 그 자체로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이다.


/


물고기는 바다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스승을 찾아다녔다. 여러 스승이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 좋은 물고기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네가 보다시피 여기 바다는 엄청난 곳이다. 그걸 가늠하려면 너는 정말 오래도록 명상해야 한다. 너 자신을 담금질해야 하고, 정말 좋은 물고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단다."


물고기는 한 스승을 만나 마지막으로 물었다. "무엇이 위대한 바다인가요? 무엇이 위대한 바다입니까?" 그 스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



샬럿 조코 백, 「가만히 앉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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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 나와 세상에 속지 않고 사는 법
원제 지음 / 불광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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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면서, 팔릴 수 있는 글이다. 선의 대중화라 할 만 하다. '간화선'의 대중화는 아니고, '선'의 대중화다. 일상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선을 이야기한다. 확실히 상품성이 있으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혜민스님의 책들이 대중성에 기울었다면 이 책은 대중성과 저자의 안목이 균형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영화로 치면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 같은 느낌이다. 균형이 있다.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나이가 적은 사람도, 모두가 쉽게 접근 가능하다.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또한 알 것이다. 이 책이 한낱 자기계발서로 소모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든 이 책은 성공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저자는 '선'을 갖고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다음 행보의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이 책이 시장에, 대중들에만 한정되지 않고 절집 안에서, 특히 제방선원에서도 영향력을 갖길 바라며….


많은 이들이 수행을 하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더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겁니다. 설혹 화가 나더라도 화나는 그 마음을 곧장 알아차려 화를 내지 않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모든 경우는 아닐 테지만,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화를 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할까? 화가 나쁜거라서? 화가 본디 내면의 성품이 아니라서? 화를 내는 그 마음이 지옥이니까? 화 또한 '이렇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것들, 이를테면 졸리면 하품이 나오고, 배고프면 꼬르륵 소리 나고, 어딜 다치면 '아얏'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화가 나면 욕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드러난 것들 중의 하나로서 화가 있을 뿐입니다. 화는 잘못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화를 문제 삼는 것을 그것을 실체화하여 마음 안에 담아두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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