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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1 - 마음이 속상할 때는 몸으로 가라 ㅣ 참선 1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평점 :
은둔자, 10년간의 묵언, 전강스님으로부터의 인가, 깨달은 선사... 용화사 송담스님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제방 안팎에서 위대한 선승으로 추앙받는 송담스님. 그리고 그 송담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시봉했던 환산스님. 몇년전 불교 tv에서 환산스님이 좌선 강의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인 스님이 영어로 강의를 한다니 신기해서 알아봤는데, 하버드대를 나온 재미교포 스님이었다. 삶에 대한 공허, 권태, 무의미... 어쨌든 그런 것들이 결국 스님을 만든다. 그렇게 전도유망한 하버드대생은 모든 미래를 포기하고 젊은 날 머리를 밀고 송담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는 환속을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30여년이나 승려생활을 하고서 환속하는 일은 드물 뿐더러 또 그 과정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 이는 더더욱 드물다. 때문에 내용은 차치하고 이 책 자체만 보자면 이것은 분명 드물고 귀한 책임은 틀림없다.
스님들은 자신들 속내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해봐야 절집 안에서만 돌고 돌 뿐이다. 그런 스님들의 속내를 가장 은밀한 곳까지 섬세하고 진솔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물다. 어쨌든 2권에 달하는 묵직한 책이 며칠도 안되어 다 읽혔다. 실존적 고민을 갖게 된 연유와 출가하게 된 계기, 그리고 환속, 환속 이후의 삶까지 아주 진솔하게 쓰여있다. 이 책이 참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테오도르 준 박, 자신의 자전적 수필집으로만 국한되었다면 별 5점 만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본질이 '참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는 별 2점을 주어야만 했다.
위대한 선승으로 알려진 송담스님 옆에서 30여년이나 선을 했고, 또 묵직한 두 권의 책을 냈기에 나는 그가 충분히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와 책 중간 중간 나오는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많은 선지식들이 으레 하는 말과 같이 겸양의 일부인줄 알았다. 선가에는 석가모니도 아직 수행중이고 달마대사도 아직 좌선중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그가 정말로 깨닫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선이 무엇인지 모른다. 선의 변두리만을 맴돌 뿐이다. 그래서 참선을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고 하는 문제들에 치중한다. 참선은 그렇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참선은 명상이 아니다. 명상이 참선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명상을 전부 선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통해 마약과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고, 더 선량한 사람이 되고, 더 맑은 정신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하며 이것을 선의 효험이라 떠벌린다. 그런 것들은 테라피 명상이지 선이 아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참선이란 감정, 생각, 신체의 생리적 변화 등에 국한되어있다. 그가 '이뭣고'를 하는 것은 정말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다루는 면이 강해보인다. 그는 참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모두가 사랑하기를 바라고, 세계가 조금 더 평화로워지기를 이야기한다.
많은 선사들이 선을 이야기하고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이 선의 정신으로 세계의 전쟁과 가난과 범죄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만연한 갈등이 선으로 융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정신을 개벽하자고도 이야기했고, 깨달아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했다. 글쎄,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조금 회의적이다. 일본의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자 스즈키 다이세츠의 스승이었던 소엔은 톨스토이의 러일전쟁 반전운동 제의를 거절했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소엔은 그렇게 살인과 전쟁을 정당화했다. 실제 태평양전쟁 당시 꽤나 많은 '깨달은' 선승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선전했다. 삼보교단의 창시자였던 야스타니 하쿤 선사 또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였고, 별로 보지도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유대인들을 극렬히 증오하기도 했다.
깨달음이 한적한 산사가 아닌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 놓였을 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측 불가의 형태로 전개될 수 있다. 때로 그 전개는 선의 모습을 갖기도 하고 악의 모습을 갖기도 한다. 어째서 그럴까? 깨달음의 속성에는 선도 악도 없기 때문이다. 선은 본래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 언어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실존의 날 것을 목격한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에 관한 불안의 문제는 해소된다. 그럼, 그 다음에는? 그러한 통찰 뒤에도 삶 자체는 언어를 통해 꾸려진다. 삶의 선과 악을 그려나가는 것은 언어의 영역이다. 깨달음은 단지 그 언어의 영역에 대한 실체없음을 직관하게 할 뿐이다.
삶에 있어선 오로지 양자택일이다. 선을 택하든가, 악을 택하든가. 어제 선택한 선이 오늘의 악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선택한 악이 내일의 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깨달음은 선에도 속하지 않고 악에도 속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깨달음은 하나의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하는 것 같다. 깨달음만 얻으면 문득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불식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상상. 그래서, 깨달은 선사들은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나?…. 이제는 입장정리를 확실히 해야만 한다. 세상의 영역을 애써 깨달음의 영역으로 끌어와선 안된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삶은 삶이다. 각자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삶의 공함을 꿰뚫는 것이지 삶을 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깨달음은 삶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설사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참선을 해 깨달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스타벅스에 갈 것이고, 페이스북을 할 것이다. 여전히 사치를 할 것이고, 불륜을 저지를 것이고, 모략을 꾸미고, 질투를 하고, 출세를 욕망하며,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 전법한 (깨달은) 선승들의 성추문 스캔들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효용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게한다. 미국에 티벳불교를 전한 초걈 트룽파 린포체는 술과 여자를 끼고 살았다. 그는 결국 환속했고, 어린 영국 여성과 결혼한 뒤에도 불륜을 하고 난교를 즐겼다. 그는 오십이 되기 전에 요절했는데, 그 사인은 알콜 중독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그의 전법제자 오셸 텐진은 서양인으로선 최초로 티벳불교를 계승한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에이즈에 걸린 뒤 그 사실을 숨기고 제자들과 성관계를 맺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초걈 트룽파의 깨달음이 부정당했냐하면 그것은 전혀 아니다. 트룽파 린포체는 영적 물질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미친 지혜’라는 그의 독특한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실 그의 방탕한 삶 조차도 미친 지혜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가 선심초심을 저술한 일본의 스즈키 순류 선사와 절친 사이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스즈키 선사를 말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스즈키 선사의 전법제자 리처드 베이커는 성추문과 예산횡령 문제로 선원에서 추방당했다.
타이잔 마에즈미 선사 또한 미국에서 조동종의 선을 전파했는데, 그는 이미 임제종, 조동종, 삼보교단 세 군데서 모두 인가를 받은 공인된 깨달은 선사였다. 그는 대처승으로서 아내가 있었음에도, 수많은 여성제자들과 암암리에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알콜 중독이었다. 그는 결국 선원에서 자신의 알콜 중독을 시인하고 치료소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일본에 잠시 귀국한 그는 욕조에서 술에 취한 채로 익사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그의 문란한 사생활로인해, 인가받은 제자들이 그와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의 깨달음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프로비던스에서 관음선종을 만들어 선을 전파한 숭산스님 또한 스캔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숭산스님은 두 명의 여성 제자와 성적 관계를 맺어왔고, 이 일로 두 번의 참회식을 치러야만 했다. 굳이 불교뿐 아니라 남방 힌두교 구루들의 사생활 또한 할 말이 많다. 다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쨌든, 불교를 믿든 안믿든 세상은 참선에 관해, 깨달음에 관해 너무나 뿌리깊은 환상을 갖고 있다. 선은 의외로 우리의 욕망을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의 인격을 다듬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지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실존적 불안만을 해결해줄 뿐이다. 물론 스스로의 깨달음을 공표하고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지도자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의 사회적 도덕과 윤리적 의무의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불안이라는 근본적 괴로움만을 다룰 뿐이지, 우리를 군자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인격자가 되고 싶다면 인격수양을 해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닦고, 예의범절을 배우고, 인의예지의 도리를 깊이깊이 숙고하고 익혀야 한다. 물론 그것은 유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저자는 참선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리 큰 열정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참선이라는 수단으로 삶을 변화시키려는데 노력하는 듯하다. 그러나 참선이란 삶의 바탕을 깨닫는 일이지, 삶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가 공한 것을 깨닫는 것이 참선이지, 있는 그대로를 공하게 만드는 것은 참선이 아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니 현상에 오도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계속해서 부정적 감정, 생각, 생리적 변화들만 물고 늘어진다. 그가 환속 후 왜 요가에 관심을 갖는지 알 것 같다. 그가 바라는 현상적 변화를 충족시켜주기엔 참선은 너무나 '본질적'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참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환속을 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 참선을 남들에게 가르치려는 자기 자신이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었을테니까. 그런데 그 똑같은 실수를 여기서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참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명상이라는 그럴듯한 수단들로 참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옛 선가에는 '불법을 잘못전해 납자들의 안목을 멀게 한 이에게는 눈썹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눈썹이 잘 붙어있나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