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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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돌아온 탕아가 그리워하던 고향 집의 방을 보고 그 향기를 다시 맡을 때처럼 내 마음은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그것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고, 나는 이제 죄를 잔뜩 진 채 낯선 물결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 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86쪽

그 모든 것이 환한 광채로 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신성하고 정결했다. 그리고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이제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받았으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밀쳐 내며, 역겨워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멀리 되돌아 간 유년의 금빛 찬란한 정원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사랑스럽고 친밀한 체험들이 ― 어머니의 입맞춤, 성탄절, 집에서 보낸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정원의 꽃들 하나하나가 ― 그 모든 것이 황폐해져 버렸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데미안> 속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부서져버리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위에 인용한 두 부분은 처음으로 세계가 부서져나감을 느끼며 처음으로 탕자가 되던 순간과 탕자에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후 방황 속에서 처음으로 술에 취해 엉망으로 망가져 다시금 탕자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싱클레어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세계가 부서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계기는 무척 다르다. 

 처음에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적'의 위협으로 인해 떠밀리듯 세계의 부서짐을 '당했다'면 두 번째에는 스스로 '부순' 꼴이 된 거다. 

'위험, 불안, 치욕'이라는 감정과 '역겨움'이라는 감정의 대립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부서지는 세계의 배경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의 부서짐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충격과 공포, 두려움과 고통도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올 것이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를 죽이지 않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름을 잊은 불가의 유명한 수행자가 말했다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면에서는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일을 맞이한다는 것이 오늘의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은 적에 의해 떠밀려 죽음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딛을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어린 싱클레어는 최초의 적 프란츠 크로머의 그림자로부터 혼자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데미안의 힘에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뿐더러, 프란츠 크로머를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에서 일종의 금기로 만든다. 

 술에 취해 방탕에 빠져든 젊은 싱클레어는 자신의 방황을 계기로 세계의 부서짐,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그 죽음에서 회복하고 본래 자신이 지녔던 '카인의 증표'가 더 분명해지는 계기로 만든다. 

 이왕 부서질 세계라면, 스스로 부수는 길을 택할 일이다.

 


24쪽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새겨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선 넘어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난 첫 번째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線)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점점 수가 늘어나고, 아물고, 잊혀 가지만, 우리 마음 속 가장 비밀스러운 방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계속 피를 흘린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 어쩌면 가족은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싱클레어의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흔히 '반항'이라고 부르는 충돌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위와 위력, 신성함에 최초의 반기를 드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첫 번째 칼자국을 새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칼자국에서 흐르는 피는 자신만의 자신이 되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기둥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기둥의 것이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참지 못해 상처내기를 그치거나 피를 멎게 한다면 우리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는 멀어지게 된다.

 


25쪽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쓰디쓴 맛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은 탄생이니까, 무시무시한 새로운 것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이니까.

 죽음의 맛은 쓰디쓰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곧 탄생이라고도 한다. 에스프레소의 맛은 쓰다. 하지만 그 쓴맛 너머에 강렬한 단맛도 기다리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새로운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거다. 사람은 때로 새로운 것의 '무시무시함'이 두려워 더 좋은 것조차 마다한다. 그 결과 보통의 삶에 보통 혹은 보통 이하의 만족감을 느끼며, 때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43쪽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일을 받아들이고 나를 잘 보살펴 주고 진정 안타까워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나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운명인데도, 그들은 그저 일종의 탈선으로 보리라는 것을.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까지 느낄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 앞에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련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

 이해라는 것은 단순한 받아줌과 보살핌, 안타까움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애써 설명을 거듭해도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이해는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보게 되어 있기에 타인이 되어 전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전할 상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 인간을 더 잘 아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데미안>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는 시험문제인지 모른다.



51쪽

그 후에도 내 두려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내 적과 맞서 길고도 무서운 대결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만큼, 모든 것이 그리도 고요하고 그리도 비밀스럽고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이 더 이상했다.

 싱클레어의 이 '각오'가 운명의 어떤 수레바퀴를 굴렸는지 확신은 없다. 다만 분명 어딘가에서 '죽음'에 정체되어 있던 그의 수레바퀴를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56쪽

아, 이젠 나도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지만 이 문장이 전에도 눈에 들어왔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힘겹다'가 아니라 '내키지 않는다'니.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싱클레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거기에 자신이 그 내키지 않는 길로 갈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아 버렸을 때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프란츠 크로머에게서 벗어나, 데미안의 길과 마주했을 때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의 세계로 숨어든 것은 당연하다. 결국에는 떠나게 되겠지만 아직은 평화가, 평화로운 세계에서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보다 더 간절했던 시기였을테니 말이다.



67쪽

내가 이런저런 것을 상상할 수는 있겠지. 무조건 북극에 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거나 충분히 강력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소망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있을 때, 실제로 내 존재가 완전히 그 소원으로 꽉 차 있을 때뿐이야.

 하나의 소망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채우는 것의 불가능성, 그 어려움을 얼마나 익히 알게 되어야 했던가. 그럼에도 그 불가능성을 넘어서라고 요구하는 구나, 나의 운명이여.



74쪽

생각이란,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거야. 너의 '허락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걸 넌 알았어. 그런데 신부님이나 선생님들이 하듯 두 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지.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야! 한번 생각이라는 걸 시작하면 누구도 그렇게 못해!"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말이다.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것이 생각이라니.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생각하지 말 것'을 교육 받는 지 모른다. 마치 <1984> 속 이중사고처럼 인식하는 동시에 인식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틀렸다. 이미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져 버렸다는 거다. 이제는 둘 중 하나다. 가치 있게 되는가, 가치 없게 되는가. 



111쪽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게 바로 그 이유다. 자신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럿이다. 그것이 너무 '제 멋대로'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타인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르다는 건 그것 자체로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다름이 끊임 없이 세계의 부서짐, 죽음을 경험해서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라면 힘들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127쪽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라 하고,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니고 있어. 아브락사스는 자네의 어떤 생각에도 반대하지 않고, 자네의 어떤 꿈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그걸 잊지 말게. 그러나 자네가 언제고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아브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자네를 떠나서 자신의 사상을 담아 요리할 새 그릇을 찾는 거지.

 우리는 언제든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 방법은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거다. 우리가 품고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세계 가운데 밝음이라는 절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면 신인 동시에 악마인 아브락사스는 우리를 떠나고, 우리는 다시 공통의 세계에 편입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하지만 역시, 이미 생각을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을테고 공포는 멈추더라도 후회는 멈출 수 없게 될 거다.



131쪽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거든.

 우리가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모두 우리 내면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버릇을 닮는 아들이 그 흔한 증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볼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흥분은 조금도 우리를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더 과장된 흥분에 자신을 맡기게될 뿐이다.



148~9쪽

누구에게나 사명이 있지만, 누구도 그 사명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고쳐 쓰거나, 마음대로 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틀렸고, 세상에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생각도 틀렸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길이 어디로 이끌든 간에.

(중략)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 그리기 위해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일이었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작가는 이 한 문장을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꼽으라면 역시 이 문장을 꼽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역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소설을 썼다. 여행을 했고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연장이다. 무엇을 위한 연장인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만들어가기 위한 연장인 거다. 

 그렇다고 연장들이 가치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 연장들은 반드시 필요했고,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연장을 얻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그것을 쓰고 있는가 하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인 거다.



175쪽

하늘과 숲과 시내, 모든 것이 새로운 빛깔로 신선하고 찬란하게 다가와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로 속삭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을 하나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안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뚫고 지나며 환희의 빛을 뿜어냈다. 그는 사랑을 했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거다.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 가운데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있지 않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서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알면서도 탄생은 언제나 무시무시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움츠리게 한다. 그럼에도 나아가려 한다. 나를 잃어버렸다면 되찾으러 가야겠고, 되찾은 다음에는 지켜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데미안>은 내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밑줄 하나 긋기에도 온 기운을 쓰게 만드는 묘한 이야기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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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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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_데미안(을유문화사)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의 제목은 <헤세로 가는 길>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가는 길이 될 게 분명하다. 

작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길을 이야기한다. 단지 그 소재가 정여울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고향 칼프와 죽기까지 머물렀던 죽음의 고향 몬타뇰라일 뿐인 거다.

 정여울이 들려주는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헤세는 누구의 길이 되려고도, 누구에게 길을 가르쳐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럴수도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고 느낀다면, 그건 헤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 독자가 스스로의 길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할 거란 이야기다.


헤세를 처음 만난 건 고 1 혹은 고 2 때였다. 그때 읽은 작품이 <데미안>이다. 그리고 종종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카인의 증표'를 가진 존재라고 믿었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도 아닐 뿐더러, 카인은 박해받는 자의 상징이다. 

더 나빠질 것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통해 더 좋아질 것도 없었기에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흔히 '중 2병'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단순히 생각하면 '카인의 증표'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응으로 '중 2병' 운운 하는 것 역시 일종의 박해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선언을 돌려서 말하는 셈인 거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헤세의 고향인 칼프로 떠난 여행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았다.

두 번째는 헤세의 대표작 몇 가지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이야기를 적었다. 

세 번째는 헤세가 독일을 떠나 죽기까지 살았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의 이야기다.

여행 에세이와 서평의 균형을 잘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을 읽고 독일의 칼프 혹은 스위스의 몬타뇰라로 떠나고 싶어질 거고, 책을 좋아하는 이 혹은 헤세에 관심이 있던 이들은 헤세의 전작에 욕심을 내게 될 거다. 어느 쪽으로든 그 결말은 각자가 택한 길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물어볼 것도 없이 후자 쪽에 욕심이 솟았다. 생긴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격렬한 욕구에 가까웠기에 솟았다고 적는 게 옳다.


누구나 자기의 읽는 방식이 있겠으나 나란 사람은 스스로도 감상을 적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감상을 읽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책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감상에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좋아하는 작가나 읽고 싶은 책에 대해 '서평가'들이 쓴 것은 어쩐지 읽기가 불편해지고 마는 거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마주한 정여울 작가의 책 이야기 역시 어느 정도는 그랬다. 그나마 <마음의 서재>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어 거부감은 없었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헤세 이야기에서 상당 부분이 심리학자 융에서 시작한다는 게 어느 정도의 아쉬움을 남겼다. 융이 프로이트보다는 거부감이 덜하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심리를 규격화 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기에 그 틀 안에서 헤세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거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니 조금쯤 아쉬움을 털어 놓아도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이야기는 먼저 적었던 '밑줄 긋기'에서 거의 늘어 놓은 것 같기에 여기서는 한 부분만 발췌해서 몇 마디 보태기만 해야겠다.


 76쪽

대부분 인간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춤추고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별을 닮은 인간도 있다고. 별을 닮은 인간은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걷는다고. 어떠한 강풍도 별을 닮은 인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자신의 내부에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별을 닮은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 중 가장 혼란스러운 상태의 하나인 전쟁에서 독일 청년들이 손에 들고 전장으로 향했던 책이 <데미안>이라고 한다. 별을 닮은 인간으로,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평생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 시대와 이념의 강풍인 전쟁 속에서 유난히 빛났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어쩌면 청년들은 헤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믿든 생각을 하든, 그들이 늘 원하는 것은 자기네가 준비되어 있고, 자기네가 필요한 존재이며, 자기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리라는 사실이었다."_데미안/을유문화사


자신의 삶이 이어지건 끝장나건 관계 없이, 오직 '자기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리라는 사실'이 전쟁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그들의 최후의 보루는 아니었을까? 모두가 '별을 닮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해도 별똥별처럼 한 순간 격렬하게 타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삶보다 낫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헤세로 가는 길>을 읽으면서 정작 내내 생각한 것은 '내가 가려는 길'에 대한 것 뿐이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 책 속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별을 닮은 인간'을 옮겨 적게 됐을 거다. 인간이 모든 별의 궤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별은 비틀거리는 것처럼, 방황하는 것처럼, 때로는 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내 삶이 그런 비틀거림과 방황, 깜빡임을 계속하는 것도 내가 그런 삶을 구하고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거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이리 불거나 저리 불어대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가 가야할 궤도 속에 있기 때문일 거다. 흔들림도 필요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방황하고, 대상도 없이 막연하지만 격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나에게는 이 길 뿐이다. 세상의 길이 아닌 나에게로 가는 길, 진정한 자신에 이르는 길을 끝까지 가고 싶다.


정여울 작가는 헤세의 탄생과 죽음의 땅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곳들도 들러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도 자기의 길을 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미치도록 빠져있는 작가의 발자취를 좇으며 자신의 길로 이어진 골목을 찾는 일도 즐거운 일 일 거다. 


헤세를 좋아하는 사람, 정여울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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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5-05-2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 다섯개!!! ㅋㅋㅋ

대장물방울 2015-05-22 23:13   좋아요 0 | URL
흐흣, 헤세에 대한 편애의 결과물이지요. ^^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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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쪽

대부분 인간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춤추고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별을 닮은 인간도 있다고. 별을 닮은 인간은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걷는다고. 어떠한 강풍도 별을 닮은 인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자신의 내부에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별을 닮은 인간이다.


 별을 닮은 인간이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도, 여러 번 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꿈꿨다기보다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별은 어느 순간에도 추락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별을 닮은 인간이고 싶다. 나의 궤도를 확고하게 걷는, 마르고 지는 일을 염려하는 나뭇잎처럼, 혹은 마르고 지는 날을 생각조차 못하는 나뭇잎처럼 덧없고 싶지는 않다. 기왕에 덧없고자 한다면 별의 마지막처럼 화려하게 우주의 한복판에 거대한 빛무리를 남기고 사라지고 싶다. 

 별도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에 밀려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질서, 내부의 법칙에 따라 자기의 길을 가는 것 뿐이다.


97쪽

나는 꽃이기를 바랐다

그대가 조용히 걸어와

그대 손으로 나를 붙잡아

그대의 것으로 만들기를


 이렇게 답하기로 했다.


나는 꽃이기를 바랐다.

그대가 조용히 다가와 

그대 눈으로 나를 담아

잠시 그대의 소유로 하기를

 


102쪽

한 사람의 시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시인을 향해 이론적인, 또는 윤리적인 결론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시인이 들려주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밭을 지닌 사람은 작품이 지닌 고유의 언어만으로도 자신이 바라는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 나는 관계에 서툰 편이다. 다른 무엇보다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부분이 유난히 서툴다. 매일 혹은 순간순간 뭔가를 끄적이는 이유는 그 서툶을 메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할 줄 아는 게 쓰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헤세는 유명한 사람이다. 많은 작품을 소설, 시, 그림에 이르는 넓은 분야에서 두루 남겼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헤세는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지음(知音)을 가졌을까?"

위에 발췌한 문장은 「카프카 해석」에 적은 것이라 한다. 헤세는 카프카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해했을까? 

감히 추측해 적자면 헤세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말하지 않은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 소리를 아는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단 몇 줄의 시 속에서 나눴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헤세 자신도 그처럼 이해받기를 원했으리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일목요연, 자세하고 많은 설명을 통해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이해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정말 이해하는 사람, 진정한 이해자라면 시인의 메시지를 어떤 왜곡이나 분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답을 얻는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마음밭을 갖춰가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110쪽

독특하게 여기는 밑줄이 아닙니다. 사진이거든요. 

 


 

 인파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한적한 풍경입니다. 혼자 혹은 두서넛이 모여 신문을 읽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그저 보기만 해도 느긋함이 옮아오는 그런 사진입니다. 그런데, 오호,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눈에 띄었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테이블의 커피인지 혹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노트, 어쩌면 헤세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인입니다. 

 누구일까요? 

한참을 들여다보고, 표지 뒤의 날개를 펼쳐보고 하면서 비교분석한 결과 작가이신 정여울 님인 것으로 확신합니다.

 낯선 곳이건만, 그 풍경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세계와 닮아있다는 것이겠지요.

헤세를 찾아간 길, 정여울 작가님의 헤세 사랑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네요.

 


116쪽

누구든 제대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진심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책들에 관한 메모


 

 말할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진심으로 이야기하기는 이야기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진심을 전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제대로 말할 기회를 늘 찾아야 하고, 진심으로 진실된 이야기를 해야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 이 문장이 '책들에 관한 메모'에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책들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헤세에게 진심으로 다가왔던 게 아닌가 할 뿐이다.

 


161쪽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 때, 그 첫 느낌은 반가움보다 공포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영혼을 찍는 초고화질 카메라라도 가진 것처럼 내 마음 구석구석을 엿보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일단 경계하게 된다. 그 사람은 내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의 가장 밝은 빛을 끌어낼 가능성을 지닌 사람인데도,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삶에 도래하지 않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적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기적으로 느끼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거다. 

 그런 만남이 있다면 분명 나 역시 공포로 어디로든 숨어버리려 할 것이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무기까지 손에 쥐고 경계를 해온 사람일 수록 그 공포는 커질 것이고 도망은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는 동안은 안타깝지만 영원히 그 상처가 나을 일은 없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단정이자 확신이다.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공포일 수 있고, 설렘일 수 있고, 눈부심이거나 어두움일 수 있다. 

 보통의 우리는 도망치기에 빠르고 맞서기에는 약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 공포를 느꼈을 때 도망치지 않고 상처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오랜 상처에서 놓여나게 되는 것 아닐까.

 


251쪽

나의 깨달음은 오직 나만이 개척할 수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어야 했다. 그는 최고의 스승을 눈앞에 두고서야 알게 되었다. 깨달은 자를 매일 본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님을. 최후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스승이 아니라 고독한 자기 인식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한다. 하지만 외로움은 경계해야 할 것, 타파해야 할 것,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왜 사람이 외로운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나이기 때문이다"라는 거다. 나의 인생은 누구도 먼저 가보지 못한 나만의 길이다. 그런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다면 오히려 "자신을 삶을 살고 있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청출어람이라 했지만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나오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는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 스승에 대한 예의, 그러니까 "어찌 제자가 되어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스승의 길에 자기를 가져다 붙여놓은 셈이라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것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다 갔다 말하기 어려워진다. 외로움을 두려워 말자.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나만의 길을 가는 중이라는 걸 잊지 말자.

 최후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고독한 자기 인식이라지 않는가.

 


337쪽

이 드넓은 세상에서 구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세상에서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사물이 있으면 나에게 가르쳐다오!

『페터 카멘친트』


 

  헤세는 자신을 구름에 비추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처럼 '그'보다 더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왜, 흔히 아이들이 누가누가 더 사랑하는가를 경쟁할 때 뭐라고 말하던가?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태양만큼' 하는 식이 아니던가?

이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많이"라는 말이기에 그보다 더 구름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더라도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다른 이 역시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많이 구름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구름을 사랑한다. 홀로 물들지 않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서로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음을 사랑하고, 섞이지 않음도 사랑한다. 무엇보다, 미련도 없이 흩어질 줄 알는 그 넉넉한 무던함이 좋다.

 


401쪽

당신이 좋은 것은 아마 나와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나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올 여름에는 이 말을 써먹어보자.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와 다른 여자(남자)에게는 사랑한다고 고백해보자.

나는 차마 못하겠으니, 누구든 시도해보고 그 결과를 일러줬으면 좋겠다.

이 문장에 공감했다. 좋아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사실은 이유가 없다.

비슷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닮지 않았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애정의 이유가 아닌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닮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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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농장 - 세상의 모든 인간성을 논하다
류짜이푸 지음, 송종서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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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 육체적 인간을 논함 -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영혼·사상·학식이 없고, 오직 범속한 몸뚱이만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여야 한다고 확신한다면 '육인'은 영靈은 모두 소실되고 '육肉'만 남은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논하고 있는 것이 육체적 인간 즉 '육인'이다. 육인은 위에 적은 것처럼 영은 소실되고 육만 남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저자인 류짜이푸는 육인은 '무식하고 무지한 인간일 뿐'이지 '결코 나쁜 인간이 아니며 간사한 소인배도 아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 없이 육체적인 존재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인적인 면모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며 악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육인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공부하지 않고 사색하지 않고 스스로 의기소침에 빠지거나 사회에 의해 독립적 사색 능력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육인은 본래의 가능성을 스스로 내던졌거나 사회에 독립적 사색 능력을 박탈당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사회와 시대의 해악이 낳은 비극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육인들은 오히려 교묘한 인간들에게 먹히고 마는 순수한 동시에 어리석은 희생양에 가까워 보인다.

 


30쪽 

인성은 야수성이나 가축성과 상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회에는 정신, 기질 등 에토스 면에서 짐승이나 가축과 유사한 인간이 확실히 적지 않다.


 인간의 성정인 인성이 야수나 가축의 성정과 상통한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기에 적어뒀다. 우리는 인간의 몸에 가축 혹은 짐승의 머리가 달린 조각 혹은 그림을 종종 본다. 그 모든 것들이 일종의 인성 안의 가축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유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단다.

 


44쪽

지금까지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꼭두각시 인간이란 타인에게 조종되고 장악되어 자신의 영혼이 없고 자신의 언어가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말은 하나의 금언처럼 우리를 강제한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은 일종의 자기 검열이 가져온 부작용인데 그것이 지속되어 자주성을 잃게되면 결국 타인에게 조종되어 자신의 영혼이 하는 말을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어 급기야 타인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와 같이 되어버린다. 

 저자는 스스로도 한 때는 꼭두각시 인간이었다고 밝힌다. 나 역시 그랬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자신이 꼭두각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은 또 얼마나 많던가.

 


46쪽

슬프도다! 스스로 꼭두각시가 된 뒤라야 남들도 그를 꼭두각시 취급하는 법이다. 중국이 꼭두각시가 된 지 참으로 오래건만 오늘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구제하고자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다시 임금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백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놓고는 충성을 다하고 꾀를 짜내어 타인을 위해 죽을힘을 바친다.


 꼭두각시는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꼭두각시로 행동하지 않으려 하는 동안에는 세상도 그를 두고 꼭두각시라 하지 못한다. 하지만 꼭두각시가 된 인간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국가까지도 꼭두각시로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언제까지고 그 모든 것이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다.

 


52쪽

천재적 작가인 체호프는 소설 속에서 일찌감치 틀에 박힌 인간은 앞으로 끊임없이 번성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벨리코프는 땅속에 묻혔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이렇게 틀에 박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군다나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이 생겨날 것인가!"


 지난 달에 적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감상에서 "'죽음'이라는 육신의 관 대신에 '정신병원'이라는 정신의 관에 갇히게 된 셈이다"라고 적었었다. 조금 다르지만 틀에 박힌 인간들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부러 틀 속에 자신을 끼워넣는다. 틀에 박힌 말을 하고, 행동과 생각을 하면서 동류를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도 없고, 말썽도 없는 만들어진 평화 속을 살다 가는 것이다.


58쪽

너에게 정책이 있으면 나에게는 대책이 있다.


 틀에 박힌 인간이 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재밌어 보여서 적어봤다. 정책이나 대책이나 그렇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틀 속에 넣고 보면 달라지는 모양이다.

 


60쪽

19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은 대부분 성실함이 넘치고 영리함은 부족했다. 반면 20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은 대부분 성실함이 부족하고 영리함은 넘친다. 이로부터 우리는, 19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이 20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냥 읽어보면 어느 쪽이 '더 낫다'가 아니라 19세기 쪽 틀에 박힌 인간이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결론이 나오는 이유를 다들 알 것이다.

 


63쪽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인간은 그의 몸이 더없이 번화한 문명세계 속에 있지만 내면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임을 깨닫는다.(중략) 현대인은 낙원에서 절반을 살고 황무지에서 절반을 산다.


 '분열된 인간을 논함'의 일부다. 문명세계의 삶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분열시켰다. 그리고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불러 한 사람이 여러 면을 갖게 된다. 분열의 결말은 「미국 작가 헬러의 『군대 규칙 제22조』에서 군대 규칙에 제약을 받는 군인들이 이상기류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규칙대로 임무를 완성하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임무를 완성할 수 없다._71쪽」딜레마다. 어느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것이 해결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규칙을 바꾸는 것인데, 분열을 멈추지 않는 한 바뀔 수도 없다. 나도 분열되어 있는 것 같은 지경인데 뭘 더 말하겠나. 

 


66쪽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편으로는 선조들에게 받은 문화적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의 문화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하여 두 가지 문화가 머릿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고 투쟁하면서 온전한 전통적 인격은 온전치 못한 현대의 인격으로 변질되고, 온전한 인간은 분열된 인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비단 중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개발'이니 '개화'니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과 갈등을 계속한 결과를 보고 있다. 격차니 단절이니 하는 말도 두렵지만 분열은 그 격차의 해소와 단절의 회복을 방해하는 쟁애물이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이미 분열된 것을 되돌릴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아무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열된 상태로 살아가되 그 분열을 조절하고 서로 간의 이해의 공간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정도가 해결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69쪽

소위 양면이란, 한 면은 좋고 한 면은 나쁘고, 한 면은 선하고 한 면은 악하고, 한 면은 참되고 한 면은 거짓된 것으로, 이는 본래 일종의 가치판단이다. 그러나 분열된 인간의 '분열'은 가치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충돌이며 정신세계 내면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양면적 인간에게는 이런 내면적 그림이 없다. 세계에 대해 느끼는 깨달음도 없다. 그들의 영혼의 세계는 문화의식의 충돌이나 대화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정신적 특징도 당연히 없다.


 류짜이푸는 현대인의 정신적 특징이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분열'이 정신적 특징이어야 하는데 기형적으로 이 분열에도 내적 충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충돌이나 대화가 없으니 갈등도 없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깨달음이나 결론에 닿을 일이 없기에 기차의 선로처럼 영원히 분열된 채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 적은 주석은 안 적었던 걸로 하자. 분열된 인간들 사이에 이해의 공간을 만든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76쪽

그들의 산성은 고의로 부끄러운 척하거나, 일부러 상냥한 척하거나, 짐짓 달착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노인이 일부러 어린아이 시늉을 하거나, 남자가 고의로 여자 흉내를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의로 꾸며내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사람을 진저리나게 한다. 무릇 이와 같이, 고의로 어떤 태도를 꾸며내 진저리나게 하는 인간을 산성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느낌에 익숙하다. '오그라든다'는 표현이 어떨 때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산성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거나 어울리면 그것은 산성이 아니다. 일단 전제는 부자연스러움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 산성인간 짓은 좀 자제하기로 하자. 가뜩이나 산성비가 내린다 뭔다 해서 비도 맞고 다닐 수가 없는데 이러다 길 가다 실명할 위험에 처하게 생겼다.

 


95쪽

참 이상한 점은, 문명의 번식은 매우 어려운 반면 야만의 번식은 아주 빠르다는 것이다.


 문명인이라는 우리가 야만인이라 부르는 이들과 구분되는 것이 옷, 신발, 모자 말고 또 뭐가 있던가? 

다른 것보다 '번식'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밑줄 그었다. 문명의 전파가 아니라 번식이라니, 야만은 번식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도 내 사고의 편협성이구나 한다.


113쪽

이야기가 끝난 뒤 우리는 똑같이 한참 동안 탄식을 했고, 비로소 '악취'의 위력을 믿게 되었다. 아울러 선조들이 만들어낸 '악취가 하늘을 찌른다'라는 글귀가 더없이 잘 들어맞음에 감탄했으며 더러운 무기를 가볍게 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악취의 충격은 때로는 이빨의 비판보다 더 무섭다.


 앞서 끝난 이야기는 족제비를 잡으려다 족제비가 내뿜은 악취에 숨이 막혀 창문을 열었더니 거기로 도망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저자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이빨의 비판'은 말로 혹은 글로 행하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면 '악취의 충격'은 뭘까?

너무 더러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뭐가 있을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너무나 더럽고 심각해 아무 것도 적을 수 없게 만드는 일, 적지 못하니 비판 받을 일도 없던 것 아니겠는가.

 


132쪽

내가 해외에 온 뒤로 쥐들이 또다시 내 책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망망대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사각사각사각" 톱질하는 것 같은 소리는 더 이상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으로 해결할 필요도 없고, 잠도 아주 달게 자고 있다.


 저자는 일종의 추방 상태로 미국에 살고 있다. 그의 저작들은 때로는 족제비의 이빨에 또 때로는 쥐들의 이빨에 비판 받고 있는 모양이다.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잠도 아주 달게 자고 있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개운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막혀있고 비판과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줄 모르는 자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닐 것이다. 들리지 않아도 안타까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148쪽

아Q는 스스로 죄를 만들고, 스스로를 짓밟고, 스스로를 먹는 데 매우 숙달된 인물이다. 자신에게 인간의 생각에 속하는 어떤 맹아가 조금이라도 자라나면 그는 재빨리 스스로 그것을 박멸해버린다.


 생존을 위한 자기 검열이 극단에 이른 인물이 아Q다. 공산당은 '자아비판'이라는 것을 행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밝히고 반성하여 되돌리는 과정이다. 인간은 존엄하기를 원하는 법이다. 스스로를 엄혹하게 비판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살아갈 힘을 잃어가게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Q는 스스로 자신 안의 인간의 생각을 먹어치우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자기 검열의 미래가 대략 이런 것이다.

 


149쪽

이것은 또 나에게 인류 속에 있는 늑대의 무리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인류를 먹을 때는 직접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속한 보편적 본질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득의양양하며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들은 '유類'와 집단을 위해 이바지한다고 느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먹는' 비극은 끝나기 어렵다.


 '나는 예외'라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행위에 가혹함을 더한다. 거기에 '나는 무죄'라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이제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마음 껏 날뛰게 된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얼핏 섬뜩하지만 비유적으로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늘 타인을 먹는다고는 생각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먹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보편적 본질'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의 함정이다. 죄를 저지른다는 의식도, 자신을 먹는다는 의식도 없는 언제나 득의양양한 희생자로 남게 되는 비극이다. 

 


159쪽

그때 나는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늑대』를 떠올렸고, 그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늑대의 몸속에도 심연이 있다. 정말이다. 늑대 몸속에는 확실히 스스로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이 필요로 하는 것은 농밀하게 가라앉은 철저한 암흑뿐이다. 나는, 늑대 몸속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광명을 적대시하는, 그런 특수한 세계라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를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이라 밑줄 그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심연이니 암흑이니 광명이니 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를 깨닫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164쪽

그것은 사람을 못살게 하고, 추악한 인물로 바꿔놓고, 인격을 짓밟고, 원한을 배설하는 행위다. 생각이 깊은 민족이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란, 이미 사람의 육신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는, 게다가 사람의 정신과 존엄성까지 철저히 파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잔인함 가운데 그 악독함이 유별난 '얼굴을 찔러 먹칠하는 행위'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생각이 깊은 민족'이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이 순간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단순히 외적인 부분에 대한 파괴가 아닌 더 근원적인 정신과 본래의 존엄성까지 파괴하려는 악질적인 행위가 바로 먹칠을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 역시 생각이 깊고 뿌리가 오래 됐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도 잔인함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만 같다.

 


174쪽

자신을 밑바닥까지 심각하게 부정해버리면 남들이 더 이상 비판하기 어려워질 테고, 그러면 단번에 고비를 넘길 수 있다. 이를 '철저한 혁명' 또는 '단번에 끝내는 혁명'이라고 한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혁명'이 이처럼 우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우습다. 죄를 추궁당하는 이가 자신의 뿌리부터 껍질까지 몽땅 부정해버린다면 무엇을 더 비판할 수 있을까? 정말 철저하게 단번에 끝내버렸으니 혁명도 이런 혁명이 없다.

저자는 중국이 부르짖던 혁명의 맹점을 유머를 통해 들여다보게 만든다. 혁명이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222쪽

이 산문들은 세계 각지에 대해 쓰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의 내적 여정이므로 '마음의 전기心傳'또는 '영혼의 역사心靈史'라 부를 수 있다. 나는 글쓰기를 자아 수련으로 삼고 있기에 글을 쓰면 쓸수록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 이전의 험준하고 급박한 자아와 멀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심경>이라는 글 속에 담긴 내용이다. 조국을 떠나 해외를 전전하며 비록 집이 있고, 일이 있다지만, 자신의 중국에서의 삶을 '전생'이라 부르는 저자의 마음이 늘 편안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그는 글쓰기를 여행에 빗대고 역사라 말하며 자신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감정적인 해석이라 저자가 화를 낼 지 모르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다만, 마음이 평온해지고 급박한 자아와 멀어진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는 말을 적고 싶었다.

 


223쪽

비록 육체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생명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발자국이 영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노력을 쏟는 것은 글쓰기가 곧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내가 낸 책들이 모두 생명의 배처럼 끊임없이 나를 싣고 나아가서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고 동경하던 곳에 나를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것 같다. 이런 체험이 펜을 멈출 수 없게 한다. 허나 어느 날엔가 정말 육지에 닿고 발 디뎌야 할 곳에 도착하면 이 배들은 사명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불살라 버릴 수 있다.


 글쓰기가 영혼의 호흡이라면 그 영혼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그의 책이 생명의 배고, 그를 끊임 없이 싣고 나아간다면 목적지는 어디가 될까? 동경하는 곳이란 어디일까? 역시 감상적인 생각일 지 모르지만 그곳은 그의 조국 중국일 것만 같다. 최후에 배를 불살라 버릴 날은 정말 육지에 닿는 '어느 날'이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땅을 '대륙'이라 칭한다. 그곳을 육지라고 적은 것이라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헛될 수 있지만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가 동경하는 세계가 중국에 펼쳐지기를.

 


224쪽

골짜기 밑바닥은 어둡고 캄캄하지 않으며 조용하고 엄숙하다. 목청껏 노래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골짜기 밑바닥은 산꼭대기보다 묵묵히 수련하기 적합하다. 골짜기 밑바닥은 끝없이 펼쳐지는 경치는 없지만 샘물이 졸졸졸 흐른다. 골짜기 밑바닥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쉽게 잡아끌지는 못하지만 조용히 마음속 깊은 곳의 자유롭고 진실한 목소리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


 타국에서 글을 쓰는 저자의 마음이 골짜기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괜찮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228쪽

이 배움에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첫째, 위대한 인물은 언제나 마음씨가 가장 훌륭하다.

 둘째, 위대한 인물은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셋째,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비결'이 있다. 창작할 때 온 정신을 쏟아붓는 것이 그것이다. 사상이 고도로 집중될 뿐 아니라 혼신의 정력을 집중하여 자신을 도외시하고 주위 세계를 모두 잊어버린다.


 츠바이크가 로댕을 보며 배웠다는 세 가지다. 자신을 맞이하는 것에서 첫째 배움을 얻고, 식사를 함께 하며 둘째를 배우고, 로댕 자신이 안내한 츠바이크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며 셋째를 배웠다고 한다. 

 간단하면서도 또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세 가지다 해볼만 하다 싶어 밑줄 그어둔다.

 


231쪽

우리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마찰시켜서 끊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서 끊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끈기다(…) 그 어떤 재난과 마주치더라도 생활의 미덕을 등져서는 안 된다.


 몽테뉴 수상록 제 2권의 <케아섬의 풍습에 대하여> 속의 문장이다. 마침 몽테뉴 수상록이 있어서 같은 구절을 찾아봤다. 그런데 번역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를 잡아맨 쇠사슬을 부수기보다도 그것을 사용하는데 훨씬 더 지조가 있으며(…)어떠한 사정도 활기 있는 덕성에게 등지게 하지 않는다._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동서문화사 411쪽/손우성 옮김"

프랑스어에 조예는 없지만 인간농장 속의 해석이 좀 더 본래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미덕의 끈기'에 대해 적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문장과 뒷문장을 조금 더 읽어보면 동서문화사 판 번역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의 해석은 거의 같다. 

 몽테뉴 수상록 1,2,3 전권이 번역된 것이 있는가 찾아봤지만 동서문화사 판 밖에는 없는 듯해 아쉬워하는 중이다.

 


253쪽

그러나 지금 나는 또 하나의 그늘과 지옥을 발견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도망치기 가장 어려운 지옥이 바로 자신의 지옥이라 느낀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기를 좋아한다. 거울 속의 자신은 점차 자신의 우상이 된다. 이 우상이 바로 최후의 우상이다.


 인간만큼 여러가지 지옥을 만들어두고 살아가는 존재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아는 것이 많은 소위 지식인들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많으면서 무수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저자는 앞에서는 '타인의 지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도망치기 어려운 지옥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지옥이라는 거다. 거울에 비추듯 스스로를 우상화 한 결과 그 자부심 가득한 '기념비'가 자신을 가두는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우상을 깨버리는 것, 자기가 만든 틀을 부수는 것이다.

 


260쪽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어제의 '내 생각'과 지금의 '내 존재'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아울러 새로운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으며, 어제의 '내 생각'에 대해 새로운 비판과 새로운 해설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내 생각에 대한 반성'은 진정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길이 결코 죽음의 길이 아니라고 믿는다.


 생각과 존재는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생각에 대한 반성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은 더 드물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과정으로 나아가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래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그 길은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죽음의 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333쪽

스탈린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런 뒤에야 그는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그렇다. 불쌍한 사람은 타도당하고 패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처럼 남에게 멋대로 주물리는 사람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공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불쌍한 이 '선사先師'는 '치켜세워 죽이기'에 희생되기도 하고 압살당하기도 하고 추격을 받아서 죽기도 했다. 이리 주물리고 저리 주물리면서 신이 되기도 했다가 요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성인이 되었다가 때로는 죄인이 되었다가(…)


 공부자는 다름 아닌 공자를 말한다. 고향인 중국에서 가장 박해당하는 동시에 가장 존경받는, 말 그대로 '이리 주물리고 저리 주물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공자라는 것이다. 그가 불쌍한 이유는 타도당하거나 패배당했기 때문이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본래의 인물과 무관하게 해석되고 이용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자에 대한 비판의 날이 매서웠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책에서는 위정척사파가 패배했기에 서양 문명에 함몰됐다는 논리를 펴는 저자도 있었다. 

 이정도로 '거듭거듭 주물리면서 배역이 거듭거듭 바뀐 뒤에 그 기능도 변화무쌍해'진 공자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346쪽

21세기는 대뇌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문명과 문화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사유는 아마도 이 근본적인 충돌을 거머쥐어야만 비로소 핵심을 붙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며 앞으로 100년의 '정곡'을 똑바로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90년대 초에 쓴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제법 멀리 내다보고 예측을 내놓았던 셈이다. 그 예측은 당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오히려 마음이 대뇌에 밀리고 있는 실정인 것처럼 보인다. 21세기가 시작되고 15년 만에 마음이 밀리기 시작한 이유는 앞서 저자가 적었던 인간들, 잔인한 인간과 틀에박힌 인간, 분열된 인간이 저자의 예상보다 더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회복이고 이 앞의 무엇이 핵심인지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로서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마음은 계속해서 밀릴 것이고 대뇌는 득세를 계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문명의 시대에 살면서 야만의 번식을 지켜보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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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서 두 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두 번째 삶은 첫 번째 삶과 어디가 닮아있고 어디가 달라져 있을까?
두 번째 삶의 '내'가 첫 번째 삶의 '나'의 전기를 쓴다면 가장 먼저 적을 이야기는 무엇일까?
만약 나에게 그런 삶이 주어진다면 역시 첫 번째 삶의 마지막이자, 두 번째 삶의 처음 이야기를 가장 먼저 쓰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거기가 끝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삶은 이미 끝나 돌이킬 수 없으므로, 첫 번째 삶의 처음을 돌아보는 건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역시 지금의 나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면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두 번째 삶의 처음에서 시작하게 되는 거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인간농장>이다. 
인간농장이라는 제목에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었고,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 속의 동물들에게 대상의 특성을 부여해 풍자했듯이 류짜이푸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한국어 제목이 인간농장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원제는 人性諸相(인성제상)으로 내용에서 추측해보면 인간의 성정의 모든 모양(태도, 이미지, 특징)에 관해 적은 것을 모아둔 책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까지를 참고해보면 인간농장이라는 제목은 조금은 지나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이유는 저자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풍자를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문명 비판과 국민성 비판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그러면서도 가볍고 '짖궂은' 글들'을 골라낸 것이기에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처럼 이러한 성정은 누구의 것, 이것은 누구의 것 하고 대상을 좁혀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은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인류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상과 금전이 여러 인간을 길러낸다는 의미와 그러한 인간들이 모인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인간농장도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다.

사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풍자를 통한 중국 내부의 고발과 비판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 수준이 온건해서 직접적으로 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만 여겼던 거다. 하지만 저자 후기에서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저자의 말이다.

 "오늘 이 잡문들을 다시 읽어보니 비록 어느 정도는 장난하며 비웃은 점이 있지만 오로지 '현상'을 겨냥한 것이지 '개인'을 겨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글 속에도 분명 한계선이 있다. 더군다나 유머는 풍자와 달라서 공격적 성격이나 상해를 주는 성격이 없다. 선의의 회초리를 가한 것일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을 역자는 다시 언급함으로써 유머와 풍자를 구분해서 읽어줄 것을 당부한다. 
'공격'이나 '상해'의 성격이 없는 '선의의 회초리'와 같은 글에 대한 감상을 쓰려는 이유다.


저자의 말 가운데 몽테뉴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 있었다. 

 "학술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타인의 말을 따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되풀이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새로운 말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 글쓰기 원칙은 새로운 말이 없으면 쓰지 않는 것입니다."

몽테뉴 역시 옛사람들의 말을 가져다 따라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간농장>의 중간쯤을 읽다 몽테뉴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몽테뉴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책이 마치 '수상록'처럼 읽힌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우연은 아닌 모양이다.
위에 적어놓은 작가의 이야기는 나 역시 따르고 싶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위대한 철학자, 석학들의 말을 가져다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쓰는 일은 마음이 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덜 진실하게 느껴져서 내가 쓴 글이라도 거리감이 생겨버린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 싫어도 한참 더 써야겠지만 조금 더 나아지면 그때는 나도 새로운 말이 없으면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오독의 즐거움 또한 무시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읽어본 느낌을 적어보기로 한다.

저자는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머무는 현재의 삶을 두 번째 삶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삶을 '전생'이라고 말한다. 그가 인간의 성정에 대해 적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적던 시기가 그의 두 번째 삶의 시작즈음이었을 것이고 거기가 그의 현재였을 거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모두 6부로 되어 있다. 
각 부는 1부 인간의 모습, 2부 짐승의 모습, 3부 아Q의 모습, 4부 마음의 모습, 5부 중생의 모습, 6부 시대의 모습이다.
짐승이나 시대 역시 인간에게서 끄집어낸 특성이고 현상이기에 이 책은 역시 인간에 대해 적은 책이라는데 이견을 달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여기는 점은 순수하게 '중국적'이라는 점이다. 몇몇 외국 작가의 저작이나 작품에 대한 인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중국인들의 것에서 가져다 쓰고 있다. 덧붙여 직접 가져다 쓰는 것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견해나 해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 주목할만 하다. 
국내 저작의 경우 해외의 학설이나 연구를 가져다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떠올려보면 자국의 역사와 사상에 밝은 이를 가진 중국이 부러우면서도 그러한 인물이 해외를 떠돌아야 한다는 것에서 씁쓸함도 느꼈다. 

저자가 책 속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인물은 루쉰과 조설근이다. 루쉰은 <아Q정전>과 <광인일기>를 통해 언급되고, 조설근은 <홍루몽>을 통해서 자주 이야기에 등장한다. 어떻게보면 이 책은 <아Q정전>과 <홍루몽>을 빼면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을만큼 두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간상과 시대의 모습을 발견해 적고 있다. 이 점 역시 저자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시대를 보는 넓은 시야가 없이는 이러한 이야기를 쓸 수 없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읽기는 수월해도 설명하거나 느낌을 적기 어려운 책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어긋난 감상 쪽으로 도망치는 걸 선택하기로 한다.

책 속에 언급된 인간의 성정을 한 번씩만 언급해도 수백 가지가 될 거다. 그러니 자세한 내용은 궁금한 사람들이 직접 읽어보는 것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앞에도 적었지만 이 책은 읽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히려 <아Q정전>이나 <홍루몽>을 읽은 사람은 아주 간단히 읽을 수 있을 것이며, 혹 읽어본 적이 없다해도 저자의 정황 설명이 있기에 내용을 따라가는데 무리는 없다.

 저자는 자신의 조국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전생의 일과 글을 쓰던 시점의 중국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몇 군데서는 돌아갈 수 없는 조국에 대한 아쉬움과 향수, 발전을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문제들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친다. 특히 자신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제와 오늘의 심경'에서 그러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날카로움은 빼고, 상처를 주는 일도 없는 회초리 같은 글을 썼다고 하는 말에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이제는 단지 중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와 시대의 현상이 되어버린 것들로 조국을 상처입히고 물어 뜯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등애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추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류짜이푸는 조국의 회초리는 될지라도 '순전히 제 생명의 요청 때문'에 해외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다. 등애와 회초리의 기능은 닮았지만 두 사람의 태도가 다른데는 류짜이푸가 인용한 몽테뉴 수상록 2권의 <케아섬의 풍습에 대하여>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케아섬의 풍습에 대하여에서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죽음 가운데서도 특히 '자살'에 대한 비중이 큰데 '어느 때에 자살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한 사색이라고 봐도 좋겠다. 
 류짜이푸가 목숨을 위해 몸을 피한 건 아직은 해볼 만한 일들이 남아있는데 가만히 죽음을 선택하기에는 억울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단순히 중국의 사정이나 그들의 혁명 이야기, 역사 속 미해결 상황이나 현재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저자도 말한 것처럼 저자의 글에는 허구적인 요소가 없이 모든 것이 있었거나 있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들로 가득하다. 몇 가지만 짚어보면 보편적인 현상으로써의 분열된 인간과 틀에 박힌 인간의 세계적인 증가는 이미 어디에 눈을 두든 눈에 띌 정도가 됐다.
잔인성과 폭력성은 더 말을 보탤 것도 없이 만연해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와 세태를 탓하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이 독립적인 사색을 포기하고 틀에 박힌 사고와 말, 행동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시대와 세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부르게 된다. 분열은 사고의 중심을 갖추지 않는 한 계속 될 것이고, 그 속에서 주관을 잃고 세태에 휩쓸려 잔인성과 폭력성의 주체가 되거나 피해자가 될 뿐이다.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해서 가해자가 아닌 것이 아니고, 지금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영원히 그 피해가 나를 피해갈 것이라 믿는 것도 안일하다. 

이 책 속의 뼈대가 아Q와 홍루몽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아Q정전>과 <홍루몽>이 다음에 읽어볼 책 목록에 들어간 것은 자연스럽다.
읽히기는 잘 읽혔는데, 결론으로 남은 건 <아Q정전>을 다시 읽고 <홍루몽>을 읽고,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늑대>와 루쉰의 <광인일기>를 읽어보면 좋으며, 몽테뉴의 <수상록>도 읽어야지 하는 독서 목록 뿐이다.
아무래도 밑줄 긋는데 에너지를 너무 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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