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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농장 - 세상의 모든 인간성을 논하다
류짜이푸 지음, 송종서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0월
평점 :
20쪽
- 육체적 인간을 논함 -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영혼·사상·학식이 없고, 오직 범속한 몸뚱이만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여야 한다고 확신한다면 '육인'은 영靈은 모두 소실되고 '육肉'만 남은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논하고 있는 것이 육체적 인간 즉 '육인'이다. 육인은 위에 적은 것처럼 영은 소실되고 육만 남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저자인 류짜이푸는 육인은 '무식하고 무지한 인간일 뿐'이지 '결코 나쁜 인간이 아니며 간사한 소인배도 아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 없이 육체적인 존재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인적인 면모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며 악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육인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공부하지 않고 사색하지 않고 스스로 의기소침에 빠지거나 사회에 의해 독립적 사색 능력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육인은 본래의 가능성을 스스로 내던졌거나 사회에 독립적 사색 능력을 박탈당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사회와 시대의 해악이 낳은 비극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육인들은 오히려 교묘한 인간들에게 먹히고 마는 순수한 동시에 어리석은 희생양에 가까워 보인다. |
30쪽
인성은 야수성이나 가축성과 상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회에는 정신, 기질 등 에토스 면에서 짐승이나 가축과 유사한 인간이 확실히 적지 않다.
인간의 성정인 인성이 야수나 가축의 성정과 상통한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기에 적어뒀다. 우리는 인간의 몸에 가축 혹은 짐승의 머리가 달린 조각 혹은 그림을 종종 본다. 그 모든 것들이 일종의 인성 안의 가축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유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단다. |
44쪽
지금까지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꼭두각시 인간이란 타인에게 조종되고 장악되어 자신의 영혼이 없고 자신의 언어가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말은 하나의 금언처럼 우리를 강제한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은 일종의 자기 검열이 가져온 부작용인데 그것이 지속되어 자주성을 잃게되면 결국 타인에게 조종되어 자신의 영혼이 하는 말을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어 급기야 타인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와 같이 되어버린다. 저자는 스스로도 한 때는 꼭두각시 인간이었다고 밝힌다. 나 역시 그랬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자신이 꼭두각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은 또 얼마나 많던가. |
46쪽
슬프도다! 스스로 꼭두각시가 된 뒤라야 남들도 그를 꼭두각시 취급하는 법이다. 중국이 꼭두각시가 된 지 참으로 오래건만 오늘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구제하고자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다시 임금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백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놓고는 충성을 다하고 꾀를 짜내어 타인을 위해 죽을힘을 바친다.
꼭두각시는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꼭두각시로 행동하지 않으려 하는 동안에는 세상도 그를 두고 꼭두각시라 하지 못한다. 하지만 꼭두각시가 된 인간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국가까지도 꼭두각시로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언제까지고 그 모든 것이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다. |
52쪽
천재적 작가인 체호프는 소설 속에서 일찌감치 틀에 박힌 인간은 앞으로 끊임없이 번성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벨리코프는 땅속에 묻혔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이렇게 틀에 박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군다나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이 생겨날 것인가!"
지난 달에 적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감상에서 "'죽음'이라는 육신의 관 대신에 '정신병원'이라는 정신의 관에 갇히게 된 셈이다"라고 적었었다. 조금 다르지만 틀에 박힌 인간들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부러 틀 속에 자신을 끼워넣는다. 틀에 박힌 말을 하고, 행동과 생각을 하면서 동류를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도 없고, 말썽도 없는 만들어진 평화 속을 살다 가는 것이다. |
58쪽
너에게 정책이 있으면 나에게는 대책이 있다.
틀에 박힌 인간이 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재밌어 보여서 적어봤다. 정책이나 대책이나 그렇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틀 속에 넣고 보면 달라지는 모양이다. |
60쪽
19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은 대부분 성실함이 넘치고 영리함은 부족했다. 반면 20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은 대부분 성실함이 부족하고 영리함은 넘친다. 이로부터 우리는, 19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이 20세기의 틀에 박힌 인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냥 읽어보면 어느 쪽이 '더 낫다'가 아니라 19세기 쪽 틀에 박힌 인간이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결론이 나오는 이유를 다들 알 것이다. |
63쪽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인간은 그의 몸이 더없이 번화한 문명세계 속에 있지만 내면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임을 깨닫는다.(중략) 현대인은 낙원에서 절반을 살고 황무지에서 절반을 산다.
'분열된 인간을 논함'의 일부다. 문명세계의 삶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분열시켰다. 그리고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불러 한 사람이 여러 면을 갖게 된다. 분열의 결말은 「미국 작가 헬러의 『군대 규칙 제22조』에서 군대 규칙에 제약을 받는 군인들이 이상기류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규칙대로 임무를 완성하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임무를 완성할 수 없다._71쪽」딜레마다. 어느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것이 해결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규칙을 바꾸는 것인데, 분열을 멈추지 않는 한 바뀔 수도 없다. 나도 분열되어 있는 것 같은 지경인데 뭘 더 말하겠나. |
66쪽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편으로는 선조들에게 받은 문화적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의 문화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하여 두 가지 문화가 머릿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고 투쟁하면서 온전한 전통적 인격은 온전치 못한 현대의 인격으로 변질되고, 온전한 인간은 분열된 인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비단 중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개발'이니 '개화'니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과 갈등을 계속한 결과를 보고 있다. 격차니 단절이니 하는 말도 두렵지만 분열은 그 격차의 해소와 단절의 회복을 방해하는 쟁애물이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이미 분열된 것을 되돌릴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아무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열된 상태로 살아가되 그 분열을 조절하고 서로 간의 이해의 공간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정도가 해결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69쪽
소위 양면이란, 한 면은 좋고 한 면은 나쁘고, 한 면은 선하고 한 면은 악하고, 한 면은 참되고 한 면은 거짓된 것으로, 이는 본래 일종의 가치판단이다. 그러나 분열된 인간의 '분열'은 가치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충돌이며 정신세계 내면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양면적 인간에게는 이런 내면적 그림이 없다. 세계에 대해 느끼는 깨달음도 없다. 그들의 영혼의 세계는 문화의식의 충돌이나 대화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정신적 특징도 당연히 없다.
류짜이푸는 현대인의 정신적 특징이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분열'이 정신적 특징이어야 하는데 기형적으로 이 분열에도 내적 충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충돌이나 대화가 없으니 갈등도 없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깨달음이나 결론에 닿을 일이 없기에 기차의 선로처럼 영원히 분열된 채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 적은 주석은 안 적었던 걸로 하자. 분열된 인간들 사이에 이해의 공간을 만든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
76쪽
그들의 산성은 고의로 부끄러운 척하거나, 일부러 상냥한 척하거나, 짐짓 달착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노인이 일부러 어린아이 시늉을 하거나, 남자가 고의로 여자 흉내를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의로 꾸며내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사람을 진저리나게 한다. 무릇 이와 같이, 고의로 어떤 태도를 꾸며내 진저리나게 하는 인간을 산성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느낌에 익숙하다. '오그라든다'는 표현이 어떨 때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산성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거나 어울리면 그것은 산성이 아니다. 일단 전제는 부자연스러움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 산성인간 짓은 좀 자제하기로 하자. 가뜩이나 산성비가 내린다 뭔다 해서 비도 맞고 다닐 수가 없는데 이러다 길 가다 실명할 위험에 처하게 생겼다. |
95쪽
참 이상한 점은, 문명의 번식은 매우 어려운 반면 야만의 번식은 아주 빠르다는 것이다.
문명인이라는 우리가 야만인이라 부르는 이들과 구분되는 것이 옷, 신발, 모자 말고 또 뭐가 있던가? 다른 것보다 '번식'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밑줄 그었다. 문명의 전파가 아니라 번식이라니, 야만은 번식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도 내 사고의 편협성이구나 한다. |
113쪽
이야기가 끝난 뒤 우리는 똑같이 한참 동안 탄식을 했고, 비로소 '악취'의 위력을 믿게 되었다. 아울러 선조들이 만들어낸 '악취가 하늘을 찌른다'라는 글귀가 더없이 잘 들어맞음에 감탄했으며 더러운 무기를 가볍게 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악취의 충격은 때로는 이빨의 비판보다 더 무섭다.
앞서 끝난 이야기는 족제비를 잡으려다 족제비가 내뿜은 악취에 숨이 막혀 창문을 열었더니 거기로 도망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저자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이빨의 비판'은 말로 혹은 글로 행하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면 '악취의 충격'은 뭘까? 너무 더러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뭐가 있을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너무나 더럽고 심각해 아무 것도 적을 수 없게 만드는 일, 적지 못하니 비판 받을 일도 없던 것 아니겠는가. |
132쪽
내가 해외에 온 뒤로 쥐들이 또다시 내 책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망망대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사각사각사각" 톱질하는 것 같은 소리는 더 이상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으로 해결할 필요도 없고, 잠도 아주 달게 자고 있다.
저자는 일종의 추방 상태로 미국에 살고 있다. 그의 저작들은 때로는 족제비의 이빨에 또 때로는 쥐들의 이빨에 비판 받고 있는 모양이다.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잠도 아주 달게 자고 있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개운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막혀있고 비판과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줄 모르는 자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닐 것이다. 들리지 않아도 안타까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
148쪽
아Q는 스스로 죄를 만들고, 스스로를 짓밟고, 스스로를 먹는 데 매우 숙달된 인물이다. 자신에게 인간의 생각에 속하는 어떤 맹아가 조금이라도 자라나면 그는 재빨리 스스로 그것을 박멸해버린다.
생존을 위한 자기 검열이 극단에 이른 인물이 아Q다. 공산당은 '자아비판'이라는 것을 행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밝히고 반성하여 되돌리는 과정이다. 인간은 존엄하기를 원하는 법이다. 스스로를 엄혹하게 비판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살아갈 힘을 잃어가게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Q는 스스로 자신 안의 인간의 생각을 먹어치우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자기 검열의 미래가 대략 이런 것이다. |
149쪽
이것은 또 나에게 인류 속에 있는 늑대의 무리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인류를 먹을 때는 직접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속한 보편적 본질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득의양양하며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들은 '유類'와 집단을 위해 이바지한다고 느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먹는' 비극은 끝나기 어렵다.
'나는 예외'라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행위에 가혹함을 더한다. 거기에 '나는 무죄'라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이제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마음 껏 날뛰게 된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얼핏 섬뜩하지만 비유적으로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늘 타인을 먹는다고는 생각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먹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보편적 본질'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의 함정이다. 죄를 저지른다는 의식도, 자신을 먹는다는 의식도 없는 언제나 득의양양한 희생자로 남게 되는 비극이다. |
159쪽
그때 나는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늑대』를 떠올렸고, 그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늑대의 몸속에도 심연이 있다. 정말이다. 늑대 몸속에는 확실히 스스로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이 필요로 하는 것은 농밀하게 가라앉은 철저한 암흑뿐이다. 나는, 늑대 몸속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광명을 적대시하는, 그런 특수한 세계라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를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이라 밑줄 그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심연이니 암흑이니 광명이니 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를 깨닫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
164쪽
그것은 사람을 못살게 하고, 추악한 인물로 바꿔놓고, 인격을 짓밟고, 원한을 배설하는 행위다. 생각이 깊은 민족이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란, 이미 사람의 육신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는, 게다가 사람의 정신과 존엄성까지 철저히 파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잔인함 가운데 그 악독함이 유별난 '얼굴을 찔러 먹칠하는 행위'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생각이 깊은 민족'이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이 순간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단순히 외적인 부분에 대한 파괴가 아닌 더 근원적인 정신과 본래의 존엄성까지 파괴하려는 악질적인 행위가 바로 먹칠을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 역시 생각이 깊고 뿌리가 오래 됐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도 잔인함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만 같다. |
174쪽
자신을 밑바닥까지 심각하게 부정해버리면 남들이 더 이상 비판하기 어려워질 테고, 그러면 단번에 고비를 넘길 수 있다. 이를 '철저한 혁명' 또는 '단번에 끝내는 혁명'이라고 한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혁명'이 이처럼 우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우습다. 죄를 추궁당하는 이가 자신의 뿌리부터 껍질까지 몽땅 부정해버린다면 무엇을 더 비판할 수 있을까? 정말 철저하게 단번에 끝내버렸으니 혁명도 이런 혁명이 없다. 저자는 중국이 부르짖던 혁명의 맹점을 유머를 통해 들여다보게 만든다. 혁명이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
222쪽
이 산문들은 세계 각지에 대해 쓰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의 내적 여정이므로 '마음의 전기心傳'또는 '영혼의 역사心靈史'라 부를 수 있다. 나는 글쓰기를 자아 수련으로 삼고 있기에 글을 쓰면 쓸수록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 이전의 험준하고 급박한 자아와 멀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심경>이라는 글 속에 담긴 내용이다. 조국을 떠나 해외를 전전하며 비록 집이 있고, 일이 있다지만, 자신의 중국에서의 삶을 '전생'이라 부르는 저자의 마음이 늘 편안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그는 글쓰기를 여행에 빗대고 역사라 말하며 자신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감정적인 해석이라 저자가 화를 낼 지 모르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다만, 마음이 평온해지고 급박한 자아와 멀어진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는 말을 적고 싶었다. |
223쪽
비록 육체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생명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발자국이 영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노력을 쏟는 것은 글쓰기가 곧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내가 낸 책들이 모두 생명의 배처럼 끊임없이 나를 싣고 나아가서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고 동경하던 곳에 나를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것 같다. 이런 체험이 펜을 멈출 수 없게 한다. 허나 어느 날엔가 정말 육지에 닿고 발 디뎌야 할 곳에 도착하면 이 배들은 사명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불살라 버릴 수 있다.
글쓰기가 영혼의 호흡이라면 그 영혼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그의 책이 생명의 배고, 그를 끊임 없이 싣고 나아간다면 목적지는 어디가 될까? 동경하는 곳이란 어디일까? 역시 감상적인 생각일 지 모르지만 그곳은 그의 조국 중국일 것만 같다. 최후에 배를 불살라 버릴 날은 정말 육지에 닿는 '어느 날'이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땅을 '대륙'이라 칭한다. 그곳을 육지라고 적은 것이라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헛될 수 있지만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가 동경하는 세계가 중국에 펼쳐지기를. |
224쪽
골짜기 밑바닥은 어둡고 캄캄하지 않으며 조용하고 엄숙하다. 목청껏 노래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골짜기 밑바닥은 산꼭대기보다 묵묵히 수련하기 적합하다. 골짜기 밑바닥은 끝없이 펼쳐지는 경치는 없지만 샘물이 졸졸졸 흐른다. 골짜기 밑바닥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쉽게 잡아끌지는 못하지만 조용히 마음속 깊은 곳의 자유롭고 진실한 목소리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
타국에서 글을 쓰는 저자의 마음이 골짜기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괜찮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
228쪽
이 배움에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첫째, 위대한 인물은 언제나 마음씨가 가장 훌륭하다.
둘째, 위대한 인물은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셋째,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비결'이 있다. 창작할 때 온 정신을 쏟아붓는 것이 그것이다. 사상이 고도로 집중될 뿐 아니라 혼신의 정력을 집중하여 자신을 도외시하고 주위 세계를 모두 잊어버린다.
츠바이크가 로댕을 보며 배웠다는 세 가지다. 자신을 맞이하는 것에서 첫째 배움을 얻고, 식사를 함께 하며 둘째를 배우고, 로댕 자신이 안내한 츠바이크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며 셋째를 배웠다고 한다. 간단하면서도 또 쉬워보이지는 않지만 세 가지다 해볼만 하다 싶어 밑줄 그어둔다. |
231쪽
우리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마찰시켜서 끊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서 끊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끈기다(…) 그 어떤 재난과 마주치더라도 생활의 미덕을 등져서는 안 된다.
몽테뉴 수상록 제 2권의 <케아섬의 풍습에 대하여> 속의 문장이다. 마침 몽테뉴 수상록이 있어서 같은 구절을 찾아봤다. 그런데 번역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를 잡아맨 쇠사슬을 부수기보다도 그것을 사용하는데 훨씬 더 지조가 있으며(…)어떠한 사정도 활기 있는 덕성에게 등지게 하지 않는다._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동서문화사 411쪽/손우성 옮김" 프랑스어에 조예는 없지만 인간농장 속의 해석이 좀 더 본래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미덕의 끈기'에 대해 적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문장과 뒷문장을 조금 더 읽어보면 동서문화사 판 번역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의 해석은 거의 같다. 몽테뉴 수상록 1,2,3 전권이 번역된 것이 있는가 찾아봤지만 동서문화사 판 밖에는 없는 듯해 아쉬워하는 중이다. |
253쪽
그러나 지금 나는 또 하나의 그늘과 지옥을 발견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도망치기 가장 어려운 지옥이 바로 자신의 지옥이라 느낀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기를 좋아한다. 거울 속의 자신은 점차 자신의 우상이 된다. 이 우상이 바로 최후의 우상이다.
인간만큼 여러가지 지옥을 만들어두고 살아가는 존재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아는 것이 많은 소위 지식인들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많으면서 무수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저자는 앞에서는 '타인의 지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도망치기 어려운 지옥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지옥이라는 거다. 거울에 비추듯 스스로를 우상화 한 결과 그 자부심 가득한 '기념비'가 자신을 가두는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우상을 깨버리는 것, 자기가 만든 틀을 부수는 것이다. |
260쪽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어제의 '내 생각'과 지금의 '내 존재'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아울러 새로운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으며, 어제의 '내 생각'에 대해 새로운 비판과 새로운 해설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내 생각에 대한 반성'은 진정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길이 결코 죽음의 길이 아니라고 믿는다.
생각과 존재는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생각에 대한 반성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은 더 드물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과정으로 나아가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래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그 길은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아를 초월하는 길이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죽음의 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
333쪽
스탈린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런 뒤에야 그는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그렇다. 불쌍한 사람은 타도당하고 패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처럼 남에게 멋대로 주물리는 사람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공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불쌍한 이 '선사先師'는 '치켜세워 죽이기'에 희생되기도 하고 압살당하기도 하고 추격을 받아서 죽기도 했다. 이리 주물리고 저리 주물리면서 신이 되기도 했다가 요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성인이 되었다가 때로는 죄인이 되었다가(…)
공부자는 다름 아닌 공자를 말한다. 고향인 중국에서 가장 박해당하는 동시에 가장 존경받는, 말 그대로 '이리 주물리고 저리 주물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공자라는 것이다. 그가 불쌍한 이유는 타도당하거나 패배당했기 때문이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본래의 인물과 무관하게 해석되고 이용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자에 대한 비판의 날이 매서웠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책에서는 위정척사파가 패배했기에 서양 문명에 함몰됐다는 논리를 펴는 저자도 있었다. 이정도로 '거듭거듭 주물리면서 배역이 거듭거듭 바뀐 뒤에 그 기능도 변화무쌍해'진 공자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
346쪽
21세기는 대뇌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문명과 문화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사유는 아마도 이 근본적인 충돌을 거머쥐어야만 비로소 핵심을 붙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며 앞으로 100년의 '정곡'을 똑바로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90년대 초에 쓴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제법 멀리 내다보고 예측을 내놓았던 셈이다. 그 예측은 당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오히려 마음이 대뇌에 밀리고 있는 실정인 것처럼 보인다. 21세기가 시작되고 15년 만에 마음이 밀리기 시작한 이유는 앞서 저자가 적었던 인간들, 잔인한 인간과 틀에박힌 인간, 분열된 인간이 저자의 예상보다 더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회복이고 이 앞의 무엇이 핵심인지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로서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마음은 계속해서 밀릴 것이고 대뇌는 득세를 계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문명의 시대에 살면서 야만의 번식을 지켜보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