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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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하는 일의 축적이며, 마음도 그럼으로써 성장한다. 마음이 사물을 보는 데 능해진다. 눈은 사물을 보기만 하지만, 마음은 본 것을 해석한다. 그 해석이 가끔은 눈으로 본 것과 다를 때도 생긴다._451쪽」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믿고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는 편이다.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행동이지만 처음의 의도는 그렇게 의미심장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간교하고, 집요했다고 말하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다. 눈을 보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말을 하고 있는 내 마음도 전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보통 "너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마"였다. 연상의 사람들에게는 버릇 없어 보였을 거고, 한참 연하의 사람들에게는 집요해 보였을 거다. 하지만 여전히 눈으로 말하고자 했고, 마음을 드러내고자 애써왔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머리로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사실. 

누구도 '같은 눈'을 가지고 서로를 볼 수 없으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였다. 위에 적어둔 본문 속 쇼노스케의 말을 여러 번 되새기게 된 이유 말이다. 설사 '같은 눈'을 하고 '같은 마음'을 지니더라도 '해석'이 달라진다면 결국 같아질 수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우리가 서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깨달아지던 순간이다.


 이 소설 <벚꽃 다시 벚꽃>은 무사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무에 재능이 없고, 아버지를 닮아 야심도 없는 차남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누군가의 모함으로 할복 자살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쇼노스케는 어머니의 지인인 동시에 에도 대행인 사카자키 시게히데의 도움과 지시를 받아 진실에 점점 더 다가가게 된다. 후루하시 쇼노스케는 자신이 밝혀야 하는 진실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함하게 했던 '위조 장부'를 작성한 대서인을 찾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의 글씨든 완벽하게 똑같이 쓸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수수께끼의 대서인만 찾는다면 집안을 다시 세우는 일도, 고향의 번의 혼란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쇼노스케가 진실에 닿았을 때 오히려 쇼노스케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그가 눈으로 보았던 것을 마음에서는 다르게 기억했고, 마음으로 바랐던 것을 눈은 다르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내게 그런 교훈으로 남았다.


 112쪽

개구리를 잡으려면 못으로, 전갱이를 잡으려면 바닷가로 가야지. 표적과 같은 못에 있으면 아무리 넓은 못이라도 파문을 감지할 수 있다. 같은 바닷가에 있으면 제 아무리 복잡한 바닷가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야.


 진실 혹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위에 적은 말들은 하나 같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구리를 잡으러 못으로 갔다가, 못에 잡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실제로 적지 않다. 전갱이를 잡으러 바닷가에 가더라도 전갱이를 잡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더 높다. 같은 못에 있으면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넓은 못'이라는 전제와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요구되는 거다. 파문은 펴지면서 넓어지지만 동시에 약해진다. 그런 파문이 장애물과 부딪히면 굴절되기 마련이고 그 파문을 감지한 사람이 장애물의 파문 안에 있다면 최초의 파문이 아니라 장애물에 굴절된 파문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왜곡된 파문을 감지하고 그것이 그 못에 번진 최초의 파문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같은 바닷가에 있더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시작이 같다고 해서 그 파도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굳이 밝히자면 쇼노스케는 그 왜곡되고 굴절된 파문만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실에, 사실에 접근하기란 무척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


 169쪽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이 말에서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적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오히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당연한 말이다. 두 번 적으면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길만큼. 같은 못에 있다고 해서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해도 '나'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이 정보를 다르게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마음'이 다르게 해석해버리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결국 글씨나 그림이나 생각이나 쓰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 왜곡이나 굴절이 우리를 사실이나 진실, 더 나은 내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곡이나 굴절은 거의 모든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기가 더 쉽다.


 이 작품의 한국 제목은 <벚꽃 다시 벚꽃>이지만 원 제목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라고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얽히고,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섞이니 당연히 뒤죽박죽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극적인 불행이나 행운이 없더라도 모두의 삶은 뒤죽박죽이어서 예측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르게 하고, 본 것들을 가지런히 마음에 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아닐까. 

 옳기만 한 사람도 없고, 그르기만 한 사람도 없으니 역시 세상이 뒤죽박죽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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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스터즈 - 눈만 뜨면 티격태격, 텔게마이어 자매의 리얼 버라이어티 성장 여행기
레이나 텔게마이어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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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 혹은 친구, 그리고 동반자.

나의 형제와 자매를 떠올리고 그들과의 시간을 추억하며. 



 언니 레이나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여동생과는 전혀 딴판인 여동생 아마라와 남동생 윌, 엄마는 자동차로 일 주일이라는 시간동안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앙숙을 넘어 원수나 다름 없어, 사사건건 부딪히고 으르렁 거리는 자매와 자기만의 세계 속에 푹 빠져있는 남동생과의 여행.

이 여행은 과연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조금쯤 달라져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짧고도 짧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담고 있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 가족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지요.



 어느 날, 한 소녀는 혼자 놀기에 지쳐 "같이 놀아줄 사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렇게 소원을 빕니다.

"엄마! 아빠!! 나 여동생이 갖고 싶어요!"

아아, 이 일을 어쩌죠? 

소원을 빌어버리고 말았어요. 


소녀의 이름은 '레이나'예요.




 다른 소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런 소원은 용케 잘 이루어지지요.

소녀의 소원도 마치 '꿈처럼'(꿈 가운데에는 길몽 말고도 흉몽 혹은 악몽이 있는 법이죠) 쟈쟌! 하고 이루어졌답니다.

그런데, 이런.

소녀의 여동생은 소녀가 '원했던' 그 여동생과는 너무나너무나 달랐어요.

애초에 이게 여동생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무지 뭐가 재밌는지 알 수 없는 데서 까르르 혼자 웃곤 하는 거였죠.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못한다고 자기는 절대 '저랬던 적'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여동생의 이름은 '아마라'입니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름 답죠?



 

  그래도 '언니니까 참고 놀아줘야지'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특한 마음으로 함께 놀아보려고 해도 영문 모를 곳에서 싫다며 난리 발버둥에, 온갖 소리라는 소리는 다 질러대는 통에 금세 질려버리고 맙니다.

 왜 그러는지 말이라도 해주면 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이라도 해볼텐데, 그저 막무가내로 싫다고만 하니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울고 보채는 통에 애완동물로 금붕어를 사가지고 왔어요.

동생의 금붕어가 똥을 누는 걸 보고 언니는 자기도 모르게 놀리듯 "아마라의 물고기가 똥쌌다"고 말해버립니다.

그 똥은 마치 살사 소스처럼 빨간 색이었는데요, 짖궂은 아마라는 언니가 나쵸에 살사 소스를 찍어 먹는 걸 보고는 자기의 물고기의 '똥처럼 생겼다'고 말해버리죠. 그통에 레이나는 입안을 헹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물고기를 가지고 서로를 놀리며 며칠을 보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마라의 물고기가 죽어버려요. 

엄마는 애먼 레이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책임을 묻습니다.

그저 레이나는 억울할 뿐이었죠.



 

 아아, 여동생 하나만으로도 벅차건만 남동생이 또 생겨버렸어요. 

이름은 윌인데요, 신의 뜻이라는 의미랍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어찌나 아빠랑 똑같은지, 철이 없는데다 제멋대로라면 둘째가가 서러울 지경이지요. 

엄마는 그저 비명같은 부탁을 소리 높여 부르짖을 뿐이죠.



 레이나와 아마라, 윌과 엄마는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도착한 곳에서도 레이나는 자기와 '놀아줄'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하고 말아요. 어렸을 때는 곧잘 어울렸던 사촌언니오빠들도 이제는 관심사가 달라져 어울리기 어려워졌습니다.

 부모님과 이모님들의 이야기야 말할 것 없이 고리타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라 근처에도 가지 못하지요.

 남동생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또 어찌나 소란스럽게 굴던지 지나갈 때마다 질러대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하릴 없는 마음으로 밖에 나와보니 동생 아마라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자기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으로 말을 붙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쿨'하고 단호해서 마음을 붙이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처음 마음과는 달리 다시 다퉈버리고 말았어요.

왜 여동생인데도 나와 이렇게 다를까요? 

아마라는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요?

다시 화가 난 레이나는 문을 '쾅' 닫아버립니다.



 

 친척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 주일 간의 여행이 시작됐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도중에 차가 고장나서 도로 한 가운데 멈춰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뱀마저 다시 나타났구요.

과연 이 가족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레이나와 아마라는 화해하고 사이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오래 전 동생과 매일, 매순간,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서로 티격태격 아웅다웅 다투던 때가 떠올라서 웃음도 나고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셋째로 태어난데다 위로 누나가 둘이고 그 터울이 작지 않아서 어렸을 때는 혼자 놀았을 거에요. 기억은 없지만.

아마 그때는 저도 모르게 '동생 하나'쯤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에도 적은 것처럼 동생과 함께 보낸 첫 기억 역시 싸웠던 것 같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생소해서 처음 받았을 때는 "이건 어떻게 읽으면 좋은 거지?"하고 잠깐 생각했더랍니다. 

하지만 막상 읽을 때가 되니, 단편 소설조차 읽기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만화는 또 아니다 싶다면 그럴 때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마 직전에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이 클 것 같네요. 


처음 읽은 그래픽 노블치고는 재밌게 잘 읽었다고 자평해 봅니다.


정말 비슷할 것 같고, 가장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바로 가족이죠.

그 가족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것은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 사이구요. 하지만 그렇게 늘 함께 있어도 이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 수록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배려와 관심이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 가족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어요. 

이 책의 말미에서 여행은 끝이 나지만, 아마 지금도 여전히 씨스터즈의 이야기, 레이나와 아마라, 남동생 윌과 엄마, 아빠의 이야기는 진행형일 겁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한 걸 찾으신다면 한번쯤 들춰봐도 좋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저 뱀의 행방이 궁금하군요.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질까요?)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었던 덕에 유난히 휴식하듯 읽힌 책이었어요.

역시 세상에 다양한 책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제가끔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내일은 고향 집, 누나들에게 전화 한 번 해야겠구나 하게 되는 밤입니다.


- 이 감상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적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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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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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_"!!!" 제임스 조이스_의식의 흐름을 읽는 방법

 

이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절실하게 와 닿은 감정은 '권태로움'이었다어마어마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선생각의 전환분명하지는 않지만 격렬한 감정의 충돌들이 매 순간순간 그려지고 있음에도 읽는 내내 권태로웠다주제를 정하고 감상을 적지는 않지만굳이 이 감상에 제목을 다시 적자면, <그들의 권태로움에의 변명>쯤 되겠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읽어나갈수록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마치 다른 데 신경을 너무 쏟은 나머지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호흡이 곤란해져 왔다가만히 앉아서 20분이고 30분을 읽는 게 힘이 들었다정말, "이런 적 처음이다."싶었다.

 

'사고(思考)란 사고의 사고인 거다.'_76/스티븐

스티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로 했다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건 그 사고에 사고를 더한 4중 충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곤란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한다는 건 사고와 사고가 부딪히고 이어지는 과정의 연속인 거다그래서 사고의 흐름이 맞지 않으면 그 사고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자꾸만 끊어지기 마련인 거였다이제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그만 두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사고를 맞춰보는 거다.

다행히도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다른 하나를 택하고 호흡을 느리게 했다한쪽을 읽는데 일 분이 걸리건 삼 분이 걸리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읽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하지만 생각은 빠르게 가까워졌다그러나 그렇게 가까워졌어도 역시 같아지기는 어려워서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봤을 때 열에 하나쯤 이해하게 되었다면 다행이지 싶다.

 

초반에 적어둔 메모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는 읽었을지 몰라도, 《율리시스》는 읽지 못했다."

이 메모의 의미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가 기묘한 문장으로정신 사납게마치 미친 것처럼 질리지도 않고 이런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확인했지만율리시스》가 왜 율리시스인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게 될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이 예언은 적중해서 15장쯤 읽을 때까지도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오히려 "이렇게 방탕하고선정적이며과격하다 못해 어떤 의미로는 폭력적인 이야기를 왜 썼을까?"하는 의혹의 구체화가 뒤따랐다.

 

말 돌리기는 그만 두기로 하자.

율리시스》처럼 여러 방향에서 여러 편의 글을 쓰게 한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벌써부터 힘을 빼놓아서야 다음 글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율리시스》는 이랬다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당연히 이해해야 한다이것은 정당한 요구임을 여기에 선언한다.

 

율리시스》는 걸작이다규모가 너무 커서 알아보기 힘들지만읽어 가면 읽어갈수록 등장인물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준다혹 마지막까지 '괴롭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건 내 사정이 아니라 모르겠다

 농담이고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인물의 사고와 작가의 사고와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사고가 계속해서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건데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답이 나올 리가 없다는 거다.


솔직히 율리시스》의 거대함은 거의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의 거대함이다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쓸데없는 규모인 셈이다. 마스토돈이나 매머드를 가끔 블룸이 언급하는데그렇다그 멸종한 거대 동물들처럼 불필요해서 이제는 멸종되었을,혹은 앞으로 멸종할 것이 분명한 그런 거대함이 바로 율리시스》의 정체다.


율리시스》는 귀향이다오디세우스가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위험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것처럼애쓰고 노력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휴식이다.

율리시스》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핵심 귀향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오디세우스'와 '리오폴드 블룸', '스티븐 데덜러스', '마리언 블룸'의 네 사람이다그리고 그 외에 연회의 끝에서 저마다의 휴식처를 찾아간 이들은 이 배의 선원들이다.

그 선원들의 면면은 대략 이렇고그들의 목적지는 이렇다.

 

「블룸이 그날 그 종소리의 여운을 따라 남쪽 샌디마운트에서 북쪽 글래스네빈까지 함께 여행했던 일행 중 몇몇의 구성원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가?

마틴 커닝엄(침대에), 잭 파우어(침대에), 사이먼 데덜러스(침대에), 네드 램버트(침대에), 톰 커넌(침대에), 조 하인즈(침대에), 존 헨리 멘턴(침대에), 버나드 코리건(침대에), 팻시 디그넘(침대에), 패디 디그넘(무덤 속에)_1174쪽」

 

일행들이 침대에서 무덤까지 자기 목적지에 찾아들어간 이 시간에 블룸과 스티븐은 블룸의 집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었다그 목적지에는 페넬로페인 몰리가 있고블룸은 오디세우스가 되며스티븐은 텔레마코스였다.

 

위에 발췌한 부분은 아무 주석도 없다그냥 '귀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블룸과 스티븐이 목적지에 닿은 거라면 그들 역시 오랜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단순히 이들이 목적지에만 닿았다면 이 이야기는 내게 아무 의미 없이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럽기만 했던 따분한 책으로 기억됐을 거다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영혼의 엇갈림이라고도 할 만한 무수한 시도와 어긋남이 있었다그 엇갈림으로 인해 스티븐은 방황하고 있었고블룸은 권태로워하고 있었다스티븐은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렸고블룸은 하녀들과 놀아나거나 길을 지나며 여인들의 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찾거나 훔쳐보거나 마사라는 여성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팔방미인의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의 가능성이 권태와 방황으로 낭비되고 있었다.

굳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그 낭비는 개인을 넘어 도시더블린의 현실이었으며더블린 너머 아일랜드의 현주소였으리라.

 

스티븐과 블룸은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온다블룸과 스티븐의 목적지에 닿은 셈이며 부자간(상징적인 의미의)의 화해이자세대 간의 연결에 닿은 거다잘은 모르지만 당시 아일랜드더블린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을 거다영국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며과격한 방법도 불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그런 의미에서 율리시스》는 그들의 충돌과 화해를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야기 속에서 블룸은 유대인으로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양쪽에서 핍박당하고 박해를 받으며의심을 산다그가 아무리 선량하게 베풀고나누어도, "꿍꿍이가 있을 거다"는 의심을 버리지 않는다(셰익스피어 작품 속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그게 그들의 세계였다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세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결이 완성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 생각에 닿았을 때제임스 조이스의 거대한 그림이 만약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면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구나." 하게 된 거다.

의도했든 의도 하지 않았든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이방인인 나에게 이 책이 이렇게 읽힐 수 있다면 같은 문화와 역사현실을 공유하고 있던 아일랜드인 들에게는 어떻게 읽혔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야말로 '걸작'이라 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임스 조이스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이런 작품이 아일랜드에 있다는 건 부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부정과 외도가 그려진다하지만 누구도 그 중 누구에게 주홍글자를 걸어 돌을 던지거나 하지 않는다이것은 무관심이라 읽을 수도 있지만포용력이라 할 수도 있다.

거대한 사상이나이념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유명한 정치가나 이름난 영웅을 가져다 쓰지 않아도 한 개인의 내면의 소리에서 시작해한 도시로다시 한 시대의 거대한 역사를 그려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읽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이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읽은 이가 움직이고 애쓰기 시작해야 무엇이든 남길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오랜 의문이 있다그리고 지금까지도 다 풀지 못한 의문이다.

<파우스트>에서 마지막에 파우스트 박사가 '애씀'이라는 미덕으로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던 상황에서 천국으로 구원받는 장면 말이다.

애씀이 무엇이기에 그 많은 부덕과 잘못만행과 음행을 씻겨줄 수 있었을까?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타락해 있다술에 취하고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그럼에도 그들은 목적지에 닿기 위해 애쓰고 있다그리고 그 애씀이 내 눈에도 보인다.

 

새삼스레 '애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그것은 애씀이다."

애씀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서 구해야 할 답이다.

 

율리시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모험은 끝났다지금쯤 여전히 페넬로페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리오폴드 블룸 역시 목적지에 도착했다마찬가지로 그도 잠자고 있을 거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화해해야 할 것들사람들목적지에 닿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 것일까.

긴 이야기를 읽고 난 후라 그런지길게 이어진 물음표가 난무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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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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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현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륵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게 무리수"라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적는다.


이 이야기는 우륵을 중심으로 흐른다. 하지만 역시 우륵이 주인공은 아닐거다.

진짜 주인공은 소리이고, 악기일 거다.

쇠의 소리, 금의 소리, 사람과 고을, 나라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을 내는 제가끔의 악기들.

중요한 건 균형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륵이 앞에 세워진 것이고, 우륵이 현이 되어 제가끔의 소리를 받아 들려주고 있던 걸 거다.


간과한 것이 있다.

우륵이 금을 만드는 과정, 가야금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소리는 나무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빈 것을 지나온 소리였다. 빈 통이 단단한 나무의 소리를 펴서 둥글게 돌려내고 있었다._198쪽」


「― 니문아, 봐라, 비어야 울리는구나. 소리란 본래 빈 것이다. 비어 있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것이다._199쪽」


「― 여러 고을의 금들이 석 줄이나 넉 줄인데, 이제 새 금에 몇 줄을 걸어야 하리까?

  ― 열두 줄을 걸자. 열두 줄이면 이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이 담기기에 족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두 손은 능히 열두 줄을 넘나들며 울려낼 수 있다. 더 많아도, 더 적어도 안 될 것이다. 열두 줄이다._199쪽」


「― 니문아, 다로의 금이 생각 나느냐?

  ― 줄을 버팀목으로 고여, 그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가 있었습니다.

  ― 그랬다. 새 금에 줄마다 버팀목을 받쳐야 한다._199쪽」


「금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에 폭이 한 자 세 치로, 사람의 키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다. 굵고 가는 줄들이 가지런히 들어섰고 버팀목들이 들어선 모양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대열과 같았다.

  ― 니문아, 이것은 곧 사람의 몸이로구나. 끌어안고 뜯어보아라._200쪽」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비어야 한다. 하지만 비어 있음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히 있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비움이다.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을 뿐 아니라 사람의 두 손이 능히 넘나들 수 있는 현의 수가 열두 줄이다. 그보다 많으면 능히 넘나들 수 없겠고, 그보다 적어서는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아내지 못할 거다.

 이것은 균형이 맞는 거다.

 줄만 걸어서는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 없기에 줄에 버팀목을 고였다. 

 이것은 이치다.

 그 금의 길이와 폭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다. 

 이것은 사람이다.


결국 우륵은 하나의 금을 만드는데 사람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담았다. 제가끔에 맞는 모든 소리를 담고 있기에 누구나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소리를 내기 위함이라 해도 비워야만 한다는 거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치에 따라 균형을 잃지 말아야만 한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누구의 소리를 내는가? 

악기의 현을 울리는 사람의 소리다. 


현의 노래는 가야의 이야기도, 신라의 이야기도, 신라 장군 이사부나, 대장장이 야로, 우륵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저마다의 소리로 울려댈 독자와 그 독자의 가능성이 만들어갈 세상의 이야기다.


제가끔으로 읽어 울려야 좋은 이야기로구나.



혹 작가 님이 들으신다면 묻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어렵게 그려내셔야만 했습니까.

우문이지요. 그래야만 하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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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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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_149쪽


어쩌면 이 한 문장과 마주하기 위해 그토록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 헤르만 헤세는 이 이야기를 적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마도 없을 누군가는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나를 흥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나를 흥분시킨다.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 흥분에 열기를 부추긴다.

결국 그렇게 완성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아득하고 혼미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니 새로운 삶을 보고자 이 작품을 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새롭기보다 구태의연하기 쉬울 것이다. 그럴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내면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그 안에서 우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고 구태의연하지만 그 관조의 상태는 격렬한 변화와 거의 같은 공간에 놓여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얇게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걷히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을 슬쩍 드러내는 거다. 

 

이제는 지금까지 거듭해 온 구태의연한 습관이 장애물이 되는 순간이 되었다. 단순히 멈추어 들여다보기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서 덜 고통스러워졌을 거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의 풍경은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맞춤한 세계임에도 무척 낯설게 느껴질 거고 동경과 동시에 공포 또한 품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다. 선택의 시간이다. 열린 장막 안으로 한 걸음 내딛을 것인지, 조용히 못 본 것처럼 장막을 되돌릴 것인지 말이다.


싱클레어는 기묘한 소년 데미안을 만난다. 그리고 데미안과 만나기 전에 자신의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아름다운 세계가 단 하나의 적, 자신의 박해자,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부서지는 충격을 겪는다. 이 선량하고 순수한 소년 싱클레어는 매일 같이 탈선으로, 더러움으로, 치욕으로 가득한 세계로 떠밀려간다. 평화와 순수의 세계의 주민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홀로 고민하는 동안 병이 나기도 한다. 치욕과 고통을 견디던 싱클레어는 자신을 괴롭히던 치욕이 누이들에게 옮겨갈 위기에 처하자 선택의 기로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때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프란츠 크로머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서 싱클레어에게 말을 걸어오고, 떠나기 전에 "달리 방법이 없다면 때려죽여 버려!"라는 무시무시한 조언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와 대결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엇인가를 바꿔놓았는지 프란츠 크로머는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가까워지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가야할 길,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해서도 깨달아 간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결코 데미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 자신, 자기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데미안>은 내겐 무척 특별한 작품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데미안을 읽고, 충격과 함께 "나 역시 카인의 증표를 가진 것이다."라고 믿게 되었다. 그 후에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중 2병이었구나."하는 조롱 섞인 핀잔을 듣기 일쑤였기에, 아무데서나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가끔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도 비슷한 반응에 단지 웃으며 응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나는 나의 투쟁으로 얼룩진 세계로 나아가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였다.


<데미안>은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주인공이 나이 어린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면에서는 분명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소설에는 성장보다는 투쟁의 요소가 더 많이 숨어 있다.

결정적으로 흔히 <데미안>하면 떠올리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_105쪽는 구절만 봐도 성장이라고 하는 부드럽고 고요한 느낌보다 파괴라고 하는 거친 투쟁의 느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더해 싱클레어가 자신으로 가는 길을 가기 위해 경험하는 세계의 부서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데미안>의 감상은 기운을 빼놓지 않고는 쓸 수가 없다. 너무 긴장하게 되어서는 힘이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헤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든 헤세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끊임 없이 자기의 세계를 부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이라는 거다.  

 신을 세계의 절반이라 하고, 악마까지를 더해야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은 어떤 시각에서는 범죄를 넘어 죄악이라 비난 받을 위험까지도 품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헤세는 거듭 신과 악마를 한 세계에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 세계란 다름 아닌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의 밝은 면, 선한 성품,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만을 보고자 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밝은 세계, 공동의 세계의 규칙이기도 하다. 선한 사람은 사랑받고 악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곳,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다. 하지만 완전한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람에게 선과 악은 명백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사랑과 환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의 진짜 모습이다.


 사람은 악인을 미워한다. 하지만 악인보다 더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악인이라 느끼게 만드는 더 선한 자다. 

옛 어른들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 하는 말로 그 가르침을 대신했다. 그러니까, 너무 맑다는 건 사람이 너무 선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맑은 사람이 고기가 없는 것을 아쉬워해서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그것은 정말 그 사람 자신을 위한 일일까? 자신이 가려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버리고 다중, 대중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맑은 물에는 그 맑은 물에만 살 수 있는 고기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 맑은 물은 있을 수가 없다. 혹은 너무 맑은 물도 분명 때와 시를 보내며 변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그 물도 한 세계를 거듭해서 부수어 왔을거다. 하나의 상태에 계속 머무른다면 언제까지고 맑을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나는 선한 존재, 신과 같은 존재일 거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존재, 악마와 같은 존재일 거다.

하지만 그런 존재의 선악 구분이 나의 길을 가는데 어떤 장애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나에게 덧씌운 세계는 그저 부수어 나가야 할 수많은 세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에 끊임 없이 투쟁을 계속할 뿐이다.


사실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어쩌면 데미안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읽었을 때부터는 데미안이 확실히 존재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스레 데미안의 실존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이 달리 읽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나를._193쪽

이야기 속에서 헤세가 거듭 말하는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미워하지 않는다거나,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흥분하지 않는다거나, 진정으로 해야 할 일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와 '똑같이 닮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내 안에 있는 것, 바로 진정한 자신일 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들여다보는 '어두운 거울'이 있는 곳은 '나 자신 속'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것도 싱클레어 자신이다. 

이쯤 적으면 왜 데미안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는지 이해했으리라.


데미안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싱클레어 자신의 투영인지는 사실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싱클레어가 자신의 모습에 가서 닿았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내면, 자기 안에서의 투쟁에서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외부, 그러니까 물리적인 세계가 부딪히는 현장 즉 전쟁에서도 투쟁을 계속 했다. 주위에서 죽어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헤어려보려고 애썼다. 단지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광기어린 환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며 싱클레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 역시 폭발에 휘말려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난다. 그리고나서 고백하기를 「붕대 감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 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_193쪽」고 한다. 그 고통 속에서 들여다 보는 것이 위에 적은 '검은 거울'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끝났다거나 멈추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적고 보니 꼭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수한 세계를 부수면서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를 감내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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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3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다시 을유문화사 고전을 사게되더라구요.^^

대장물방울 2015-05-23 15:13   좋아요 0 | URL
을유 세계문학 몇 권을 읽어봤는데 번역이 매끄럽고 좋더라고요. ^^
그래서 조금씩 들여놓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