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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평점 :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하는 일의 축적이며, 마음도 그럼으로써 성장한다. 마음이 사물을 보는 데 능해진다. 눈은 사물을 보기만 하지만, 마음은 본 것을 해석한다. 그 해석이 가끔은 눈으로 본 것과 다를 때도 생긴다._451쪽」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믿고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는 편이다.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행동이지만 처음의 의도는 그렇게 의미심장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간교하고, 집요했다고 말하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다. 눈을 보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말을 하고 있는 내 마음도 전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보통 "너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마"였다. 연상의 사람들에게는 버릇 없어 보였을 거고, 한참 연하의 사람들에게는 집요해 보였을 거다. 하지만 여전히 눈으로 말하고자 했고, 마음을 드러내고자 애써왔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머리로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사실.
누구도 '같은 눈'을 가지고 서로를 볼 수 없으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였다. 위에 적어둔 본문 속 쇼노스케의 말을 여러 번 되새기게 된 이유 말이다. 설사 '같은 눈'을 하고 '같은 마음'을 지니더라도 '해석'이 달라진다면 결국 같아질 수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우리가 서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깨달아지던 순간이다.
이 소설 <벚꽃 다시 벚꽃>은 무사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무에 재능이 없고, 아버지를 닮아 야심도 없는 차남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누군가의 모함으로 할복 자살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쇼노스케는 어머니의 지인인 동시에 에도 대행인 사카자키 시게히데의 도움과 지시를 받아 진실에 점점 더 다가가게 된다. 후루하시 쇼노스케는 자신이 밝혀야 하는 진실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함하게 했던 '위조 장부'를 작성한 대서인을 찾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의 글씨든 완벽하게 똑같이 쓸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수수께끼의 대서인만 찾는다면 집안을 다시 세우는 일도, 고향의 번의 혼란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쇼노스케가 진실에 닿았을 때 오히려 쇼노스케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그가 눈으로 보았던 것을 마음에서는 다르게 기억했고, 마음으로 바랐던 것을 눈은 다르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내게 그런 교훈으로 남았다.
112쪽 개구리를 잡으려면 못으로, 전갱이를 잡으려면 바닷가로 가야지. 표적과 같은 못에 있으면 아무리 넓은 못이라도 파문을 감지할 수 있다. 같은 바닷가에 있으면 제 아무리 복잡한 바닷가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야. |
진실 혹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위에 적은 말들은 하나 같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구리를 잡으러 못으로 갔다가, 못에 잡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실제로 적지 않다. 전갱이를 잡으러 바닷가에 가더라도 전갱이를 잡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더 높다. 같은 못에 있으면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넓은 못'이라는 전제와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요구되는 거다. 파문은 펴지면서 넓어지지만 동시에 약해진다. 그런 파문이 장애물과 부딪히면 굴절되기 마련이고 그 파문을 감지한 사람이 장애물의 파문 안에 있다면 최초의 파문이 아니라 장애물에 굴절된 파문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왜곡된 파문을 감지하고 그것이 그 못에 번진 최초의 파문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같은 바닷가에 있더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시작이 같다고 해서 그 파도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굳이 밝히자면 쇼노스케는 그 왜곡되고 굴절된 파문만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실에, 사실에 접근하기란 무척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
169쪽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
이 말에서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적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오히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당연한 말이다. 두 번 적으면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길만큼. 같은 못에 있다고 해서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해도 '나'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이 정보를 다르게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마음'이 다르게 해석해버리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결국 글씨나 그림이나 생각이나 쓰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 왜곡이나 굴절이 우리를 사실이나 진실, 더 나은 내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곡이나 굴절은 거의 모든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기가 더 쉽다.
이 작품의 한국 제목은 <벚꽃 다시 벚꽃>이지만 원 제목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라고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얽히고,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섞이니 당연히 뒤죽박죽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극적인 불행이나 행운이 없더라도 모두의 삶은 뒤죽박죽이어서 예측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르게 하고, 본 것들을 가지런히 마음에 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아닐까.
옳기만 한 사람도 없고, 그르기만 한 사람도 없으니 역시 세상이 뒤죽박죽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