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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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출근길, 회사 건물에 들어가기 전 문득 문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검지 손가락만큼이나 '작은 새'였다. 차디찬 대리석 위에서 식어가는 작은 새를 발견한 다음 순간, 어쩐지 자연스럽게 그 새를 집어 들었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따뜻하지는 않지만 아직 완전히 차가워지지도 않은 그 작은 몸이 부서질 것처럼 손 안에 들어왔다. 


" 아주 작은 생명,

그러나 당당히 하늘을 누볐을 온전한 하나의 생명이,

이제는 숨이 멎어 ,

낯선 이의 손 위에서 덧없이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내 앞에 이토록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걸까?"


 무수한 생물의 숨을 끊은 손, 

사방에 죽어있던 무수한 생명이었던 것을 묻어준 손,

이 손은 죽음을 주워다 지하에 묻는 묘지기의 손을 닮아 있었다. 

방금 전에도 작은 새를 낙엽 아래에 묻어두고 온 죽음이 묻어 있는 손이었다.


그 손이 바로 나의 손, 내게 속해 있는 손이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오래전 보았던 광고 속 문구가 떠올랐다. 그 문구는 이런 거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됐지만 나는 한 때 이 말의 신봉자였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라고, 분명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믿었었다. 변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알게 된 것은 하나였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조차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했다. 하물며 낯 모르는 타인이야 오죽할까.

이 모든 일이, 이 모든 생각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을 읽기를 마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종종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을 듣고는 한다.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 가운데 숨겨진 무수한 순간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공기 속에 순간순간 내쉰 호흡이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그 시간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행인>의 첫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세키는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집착하는 걸까?"

그랬다.

 이 이야기는 마치 부모가 정해준 인연에 만족하며 살아가려던 한 여자가 뒤늦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한 후 갈등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 엇갈린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뒤로 가면서 점점 그 신빙성을 잃어가다가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결말에 닿게 되지만 처음에는 정말 그럴 듯해 보였던 거다. 

 <행인>에서 소세키의 마음에 대한 집착 혹은 애착을 떠올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야기의 흐름이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인> 다음에 쓴 작품인 <마음>때문이다. <마음>이라는 소설은 사람, 인연의 엇갈림이 낳은 고뇌와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그 전편쯤 되는 내용이 아닐까 하고 경솔히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소세키의 작품은 노골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경박하거나 경솔하지 않다. 

 

 조용조용 하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뒤흔드는 그런 미지의 힘이 소세키의 작품에는 숨어 있다. 그 힘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주한 죽음처럼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제야 "아, 살아있구나"하고 깨닫는 거다. 죽음이 삶을 깨우는 모순이 일상의 가까운 곳에 널려 있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살아있지만 죽어가고, 죽은 것 같지만 살아가는 세계,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것 같은 모호한 세계를,

우리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기이하다고 하면 몹시도 기이한 일이다."


<행인>은 평범한 일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가족 가운데 한 사람, 화자의 형님인 '이치로'의 존재로 인해 그 긴장의 폭이 넓어지고, 강도가 커지며, 갈등이 깊어지는 범상치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 '이치로'의 가족은 물론 그의 지인 대부분은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과도하게 쇠약해져 간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마치 늘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아를 보는 것처럼 "저 녀석은 늘 저런 식이지"하며 모든 문제가 그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오로지 그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치로는 유별난 아들, 유별난 형, 유별난 남편을 거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어질 상황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나 이 모든 갈등 상황은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날아든 형의 친구의 편지로 인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목적은 요양 혹은 기분전환이었지만 관광을 핑계로 삼아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에게 형이 속에 든 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이해하려고 애쓴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만한 실마리가 생겨났던 거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날 아침에 조용히 죽어간 작은 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 새의 죽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떠올린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런 죽음은 너무나 허무하고 쓸쓸한 것이다. <행인> 속 형님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그의 친구에게 속에 든 말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편지로 동생 '지로'에게 전하지 않았다면 형의 생각, 고민, 갈등과 고통을 그 후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해와 의심을 계속하다가 누군가가 미치거나 죽음에 이름으로써 이야기가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말한다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의 띠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다리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표현 수단이 있다. 

그리고 친구라는 그 말을 전해줄 존재가 있다. 

물리적인 다리는 없으나 그 다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겨울이 깊어간다.

날씨는 차가워지고, 바람은 매일 날카로움을 더해간다.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따뜻한 말 한 마디, 푸근한 마음 씀씀이가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곁에 있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새빨간 건 루돌프 사슴의 코로 족하다. 그러니 이제 더는 속지도 속이지도 말기를. 

고백하기 좋은 계절이다. 마음을 연다고 그 마음에 겨울이 들이닥치지는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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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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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쪽 

형의 이마에는 학자다운 주름이 점점 깊게 새겨졌다. 그는 점점 더 책과 사색에 빠져들었다.


 이 관찰의 진술은 이야기의 중심 화자인 형의 동생 '지로'의 관점에서 본 형 '이치로'의 면모다. 지로에게는 형의 태도나 행동이 학자라는 직업과 지위, 깊은 사색에 빠져들곤 하는 습관으로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형의 진정한 면모를 깨달았을지 어떨 지 모를 일이다.


 238쪽

"보시는 대로 저는 눈을 못 쓰게 된 이후로 색이라는 색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해님조차 이제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잠깐 바깥으로 나가려고 해도 딸 신세를 지지 않으면 볼일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혼자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무슨 업보로 이런 업병에 걸렸나 싶어 정말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 눈은 멀어도 그다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가장 괴롭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까지를 읽기 전에는 이 '눈을 못 쓰게 된' 여자의 이야기가 어떤 쓰임이 있는지 알 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서 '이치로'가 왜 이 여자의 이야기에 그토록 슬퍼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당연히 여자의 말 속의 '가장 밝은 해님'이나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가장 괴롭'다는 말 역시 그 백분의 일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읽고 난 후에는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치로는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괴로워 하는 동시에 모든 색을 잃고,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해님조차도 볼 수 없게 된 상태에 있었던 거다. 이 이야기를 읽지 않고는 지금 내가 적은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 할 것이 당연하다. 읽었다고 해도 달리 해석했다면 엇갈리는 게 자연스럽다. 소세키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 역시 그런 엇갈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240쪽

 그녀에게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두 눈을 잃고 남들로부터 거의 반편이 취급을 받는 것보다 한 번 장래를 약속한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손에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앞서 발췌한 이야기 속 눈을 못쓰게 된 여자의 다음 이야기다. 동시에 앞에서 한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다. 눈을 잃은 것보다, 사람들의 반편이 취급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장래를 약속한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손에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쯤을 읽었을 때 문득 소세키가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는 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집착에 대해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소세키는 사람들의 마음에 집착에 가까운 탐구정신을 발휘했던 것일까?" 

가끔은 소세키 자신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겪거나 품고 있는 고민 혹은 고뇌를 안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한두 번 생각한 것을 이토록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을 리도 없다. 무수히, 수 없이 떠올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소세키 자신의 고뇌의 산물이라면, 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이야기를 읽는 내가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다리는 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있다.


  311쪽 

 나는 희미한 불안감 속에서 어렴풋한 기쁨과 그 기쁨에 동반되는 일종의 덧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 가슴을 덮친 이 감상적인 기분에 되도록 자신을 맡기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부분은 단순히 메모를 해뒀을 뿐, 달리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기쁨과 기쁨이 동반하는 덧없음의 대비가 눈에 띄었기에 메모를 했던 거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읽고 보니 이 부분 역시 다르게 읽혔다. 이 문장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동생 '지로'의 기분일 뿐 아니라 성격이기도 하다. 지로는 '기분'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이와는 달리 형 '이치로'는 자신의 기분을 바로 알고, 이해하고, 제어하려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분명 형제지만 이렇듯 성격의 근본부터가 다르다.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지로의 성품에 더 가깝다. 형과 동생의 갈등의 주된 원인이 되는 형수 또한 형과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형, 이치로는 고립된 기분으로 지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기 안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며, 사색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작지 않은 괴로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이치로의 태도를 가족들은 유별난 성격, 그다지 좋지 않은 건강 탓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부분이 이들의 한계이자, 전혀 다른 세계의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의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경계선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363쪽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형의 생각과 행동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동류에게 이끌리는 본능적인 기울어짐이었다. '하고 있는 일이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는 형의 모습은 연민이 아닌 공감을 일으켰다. 언제나 나를 고민하고 또 갈등하게 만드는 이유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책을 읽는 것이 목적이 되기를 바랐고, 글을 쓸 때면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이 되기를 바랐다. 일을 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이상과 현실이 동일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두 가지가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이라도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게 내 마음이다.


 364쪽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오네.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그치는 것을 허락해준 적이 없지. 도보에서 인력거, 인력거에서 마차, 마차에서 기차, 기차에서 자동차, 그리고 비행선, 비행기, 아무리 가도 쉬게 해주지 않네.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지. 정말 두렵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걱정들,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치로를 보며 쓸 데 없는 걱정으로 심기를 소모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일랑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며 살라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충고는 진실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아가기만 하려는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정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더 빨리지고 더 편리해져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소세키가 살았을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진 현대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우며,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자. 편안하고 느긋이 살아가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킨 결과 우리는 더 바빠졌고 더 분주해져 버렸다. 앞으로 발전을 계속한다면 또 얼마나 바쁘고 정신 없이 지내야만 하게 될까? 나 역시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가까운 이의 마음조차 들여다 볼 여유를 잃어버리고 말 그 미래가, 그 내일이 몹시도 두렵기만 하다.


 369쪽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형님의 머리는 그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좀 달랐네. 형님은 멍하니 산보를 하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게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네. 걸으려고 생각하면 걷는 것은 자신임에 틀림없지만 그렇게 걷자고 생각하는 마음과 걷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불쑥 샘솟는지, 형님에게는 그게 커다란 의문이었던 거네.

 


 형님의 수준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쓸 데 없이 생각이 많다는 소리를 들어온 나였기에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제에 구애되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게 보통의 견해였다. 정말 그런 것들을 다 신경쓰며 생각하다가는 신경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서로의 생각이 좁혀지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이야기 하기를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다 이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불쑥 혼자라는 걸 깨닫는 순간과 마주쳤다. 나는 언제나 분열되어 있다. 마치 한 순간도 하나였던 적이 없던 것처럼.


 375쪽

 "Keine Brücke führt von Mensch zu Mensch."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는 '중매'의 의미일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중매로 결혼하거나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그런 방식이 보편적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것만이 서로의 이해와 수준에 맞는 적합한 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불행한 결혼으로 자신의 능력을 펴기는 커녕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람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결혼이란 그렇게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것이다. 한 사람, 두 사람, 한 집안, 두 집안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 큰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그 말을 이해하고 알아들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 말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거다. 

 이 두사람을 잇는 튼튼한 다리, 고속도로처럼 넓은 다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생길 것 같지 않다. 기껏 이어진다고 하면 가느다란 실 정도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실만큼 이어진 것으로도 상대방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 거다. 

 가족들보다 형제보다 부부보다 이치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던 친구 H씨의 편지에서 그런 단서 혹은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388쪽 

 형님은 때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불쑥 던진다네. 그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교육이 부족한 사람의 귀에는 어딘가 금이 간 종소리처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형님을 잘 알고 있는 내게는 오히려 습관적인 말보다 고마운 것이었네. 나는 평소붜 거기에 형님의 특색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네.

 


 '금이 간 종소리처럼 이상하게'라는 표현이 와 닿아 발췌했다. 

금이 간 종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뭔가 부족하거나 이상한 소리일 게 분명하다. 흔히 하는 말로 헛소리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두고 그렇게 표현할 것만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소리를 고마워하며 듣는 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친구를 염려하는 마음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나치게 영민하고 예민한 친구가 가끔 부족한듯 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잖이 안심이 되는 것이었으리라. 천재의 단명이나 광기의 원인은 대부분 이해받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해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한계 지점에서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미쳐버리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졌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논리의 정연함이나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납득시켜야 하는 필요성까지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미완결된 상태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형에게 그만한 친구가 있으므로 형은 괜찮을 것만 같다.


 396쪽

 "이보게,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형님이 물었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내가 대답했네.

"철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나?" 형님이 다시 물었네.

"근본적인 것 같네." 내가 다시 대답했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연구적인 내가 실행적인 나로 바뀔 수 있을까? 제발 가르쳐주게." 형님이 부탁했네.

"나한테 어떻게 그런 힘이 있겠나?" 생각지도 못한 나는 거절했네. 

"아니, 있네. 자넨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네. 그러니 행복한 거지. 그래서 그렇게 차분히 있을 수 있는 거라네." 형님이 거듭 말했네.

 


 선문답 같은 이 물음과 답은 어딘가 가슴을 찌르르하게 하는 서글픔과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모순을 깨달은 인간, 한계를 알아챈 인간은 철저하게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인간적인 한계이지 개인의 한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치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치로가 살아내는 삶은 그가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 이야기 속에 거듭 등장하는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 그러나 이치로 자신은 그 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려고 한다. 그런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부딪히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애쓰는 인간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다른 인간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하지만 천성을 변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타고났다'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몇인가 알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연구적'인 편에 가깝다. 그렇기에 나 역시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닮아보려고도 하며, 변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쪽인가 하면 여전히 연구적인 쪽의 인간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인간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아주 몹쓸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에 적잖이 안심하고 있는 중이다. 형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 것처럼 때때로 기댈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괜찮을 수 있다.


 398쪽

 친밀하다는 것은 그저 사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네. 어딘지 섞여서 원만해지는 특성을 서로 분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네.

 


 '사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섞여서 원만해지는 특성'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서로 분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설명하려 풀어 쓴 문장이 오히려 더 뜻 모를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친밀하다는 것은 단순히 사이나 관계의 가깝고 멂보다, 마음의 거리 혹은 이해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낟. 서로 분담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성격이 같아야만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 거다. 섞여서 원만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불완전한 부분을 드러내도 흉이 되지 않는 사이를 찾기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뚫어진 성격 혹은 모난 성격의 사람들을 모질게 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미운짓,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난 성격 혹은 비뚫어진 성격이 생각을 달리 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에 서로를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부분이기에 대부분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허락할 수 있기까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단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 단계를 넘는 것은 어쩌면 가까운 사이인 가족에게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깝다는 것이 친밀하다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걸 읽는 사람이야 어찌 알아들을 수 있을까.


 413쪽

 다만 구름이 하늘에 있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네. 자네나 어르신들은 형님이 곁에 있는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며 딱한 형님에게 다소 비난의 의미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네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을 행복하게 할 힘이 있을 리 없네. 구름에 싸인 태양을 보고 왜 따뜻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그렇게 다그치는 쪽의 억지일 걸세. 나는 이렇게 함께 이쓴 동안 가능한 한 형님을 위해 그 구름을 걷어내려 하고 있네. 자네나 어르신들도 형님에게 따뜻한 빛을 바라기 전에 우선 형님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주는 게 좋을 걸세. 만약 그걸 걷어낼 수 없다면 가족인 자네나 어르신들에게 슬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형님 자신에게도 슬픈 결과가 되겠지. 나도 슬플 거네.

 


 누군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친구를 가졌다면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 다시 어디있겠는가. 구름 낀 하늘에서 따뜻한 빛을 내놓으라 다그치지 않고 스스로 그 구름을 걷어내겠다고 말하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따사로운가. 이런 행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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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빌 게이츠 선정 올해의 추천도서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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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과 겸손함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다. 

겸손과 자신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 책은 어떤 이에게는 채찍질처럼 읽힐 것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로,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격려이자 응원이 담긴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과거를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옛날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미국 역사 속의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 역시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남의 이야기처럼 읽히지도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목적이라는 것을 자주 드러낸다. 노골적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의도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잘못하고 있기에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미로 저자가 인정하는 이들의 태도를 언급함으로써 깨달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는 안심의 시간이자 확신의 시간이며 응원의 이야기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권장하는 태도와 주장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견해'이자 '해석'일 뿐이다. 결국 이렇다 저렇다 해도 지금은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 책을 전해준 친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했다. 

"자신감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을 주는 게 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확히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던 말이다. 


어쩌면 정말 조금은 염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적어두기로 한다. 

"그날도 이야기했듯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읽었으므로 염려와는 반대로 고마워하고 있다."고.


 예전부터 정리와 설명에는 재주가 없었다. 이번에도 이 책의 무엇이 재밌었으며, 어떤 책이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조금 애써볼까 한다. 


자신감을 품어야 하는 시대.

스스로 자신을 홍보해야 하는 시대.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시대.

겸양의 미덕을 몸에 익혀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시대. 


 분명 지금은 그러한 시대다. 그러나 지나친 겸손은 과도한 자신감처럼 사람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하는 무례한 태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띠지에 적힌 'Big Me'와 'Little Me'는 말 그대로 '큰 나'와 '작은 나'를 의미한다. 바꿔 적어 큰 나가 '자신감 넘치는 나'라면 작은 나는 '겸손한 나'를 뜻하다고 보면 된다. 책 속에서 저자는 큰 나보다 작은 나가 더 훌륭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나를 실천한 사람들, 겸손하게 절제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나치게 자신감을 찬양하는 이 시대의 표면적 질서 속에 숨어있는 함정을 드러내 보여준다.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것, 겸손하게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것은 분명 품격있는 인간의 모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적절한 순간의 정당한 자신감의 표출 역시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하기보다 겸손과 자신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진정한 의미의 품격있는 인간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저자 역시 이러한 점을 모르지 않았으리라. 다만, 이 시대는 '지나치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내게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시대에는 미덕이 아니라 부끄러운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그 '한 가지 태도'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견뎌오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겸양을 두르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교만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거의 모든 것에서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편이다. 겸양이 지나쳐 민폐가 된 일도 적지 않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웃기지도 않는 태도 덕분에 이 책 속에 담긴 인물들의 이야기에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감은 공감일 뿐 나를 변화시키겠다거나 달라지겠다는 식의 다짐을 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온 이야기를 책 속에서 읽고는 달라져야 한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인가 실없이 혼자 웃고 말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역사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미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의외의 효과도 있었던 셈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전황과 뒷이야기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얼마 전 읽었던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 역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폴리오, 즉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를 갖게 되는 장면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던 것을 떠올리며, 미국사를 복습하는 기분까지 느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을 수밖에 없던 이유 가운데 또 한 가지는 저자가 소개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저마다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겸양의 미덕, 겸손한 사람의 인격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러나 책 속의 인물 가운데는 히스테릭한 사람부터 화를 잘 내는 사람까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하며 그 태도에는 의도적인 과장 혹은 필요라는 이유가 달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인정하고, 한계를 극복하려 하거나 수용하는 식으로 자신의 단점을 대하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단점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그 단점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닌게 되기도 한다.


 겸양 혹은 겸손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을 품위있게 만드는 것일까? 

저자는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고 겸허한 태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지나치게 자신감을 찬양하고 성과주의와 성공만을 인정하는 현대의 경향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해치고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한계를 감추고 자신만만해지라고 말한다. 더 이상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 개개인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나 성격, 특징이나 재능 등 그 사람의 특징 혹은 삶을 가늠하는 재능이나 능력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뛰어나다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기성품이 될 수 없다. 기성품이나 다름 없는 하나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현대의 교육과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근본적인 품격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차별에 찬성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차별한다는 것이 언제나 나쁜 행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배려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다. 


 잘못 읽은 탓인지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은 인간의 삶은 대단히 다양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규칙도, 완벽한 삶의 표본도 없다. 모든 삶은 아름다워질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품격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 품격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품격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자신이 꿈꾸는 삶을 완결시키기 위한 고집스러운 '나다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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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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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삶의 목표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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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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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태도가 중요한 이 시대에 담담하게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이의 모습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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