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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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출근길, 회사 건물에 들어가기 전 문득 문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검지 손가락만큼이나 '작은 새'였다. 차디찬 대리석 위에서 식어가는 작은 새를 발견한 다음 순간, 어쩐지 자연스럽게 그 새를 집어 들었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따뜻하지는 않지만 아직 완전히 차가워지지도 않은 그 작은 몸이 부서질 것처럼 손 안에 들어왔다. 


" 아주 작은 생명,

그러나 당당히 하늘을 누볐을 온전한 하나의 생명이,

이제는 숨이 멎어 ,

낯선 이의 손 위에서 덧없이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내 앞에 이토록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걸까?"


 무수한 생물의 숨을 끊은 손, 

사방에 죽어있던 무수한 생명이었던 것을 묻어준 손,

이 손은 죽음을 주워다 지하에 묻는 묘지기의 손을 닮아 있었다. 

방금 전에도 작은 새를 낙엽 아래에 묻어두고 온 죽음이 묻어 있는 손이었다.


그 손이 바로 나의 손, 내게 속해 있는 손이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오래전 보았던 광고 속 문구가 떠올랐다. 그 문구는 이런 거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됐지만 나는 한 때 이 말의 신봉자였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라고, 분명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믿었었다. 변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알게 된 것은 하나였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조차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했다. 하물며 낯 모르는 타인이야 오죽할까.

이 모든 일이, 이 모든 생각이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을 읽기를 마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종종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을 듣고는 한다.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러나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 가운데 숨겨진 무수한 순간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공기 속에 순간순간 내쉰 호흡이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그 시간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행인>의 첫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세키는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집착하는 걸까?"

그랬다.

 이 이야기는 마치 부모가 정해준 인연에 만족하며 살아가려던 한 여자가 뒤늦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한 후 갈등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 엇갈린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뒤로 가면서 점점 그 신빙성을 잃어가다가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결말에 닿게 되지만 처음에는 정말 그럴 듯해 보였던 거다. 

 <행인>에서 소세키의 마음에 대한 집착 혹은 애착을 떠올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야기의 흐름이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인> 다음에 쓴 작품인 <마음>때문이다. <마음>이라는 소설은 사람, 인연의 엇갈림이 낳은 고뇌와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그 전편쯤 되는 내용이 아닐까 하고 경솔히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소세키의 작품은 노골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경박하거나 경솔하지 않다. 

 

 조용조용 하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뒤흔드는 그런 미지의 힘이 소세키의 작품에는 숨어 있다. 그 힘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주한 죽음처럼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제야 "아, 살아있구나"하고 깨닫는 거다. 죽음이 삶을 깨우는 모순이 일상의 가까운 곳에 널려 있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살아있지만 죽어가고, 죽은 것 같지만 살아가는 세계,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것 같은 모호한 세계를,

우리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기이하다고 하면 몹시도 기이한 일이다."


<행인>은 평범한 일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가족 가운데 한 사람, 화자의 형님인 '이치로'의 존재로 인해 그 긴장의 폭이 넓어지고, 강도가 커지며, 갈등이 깊어지는 범상치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 '이치로'의 가족은 물론 그의 지인 대부분은 그의 성격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과도하게 쇠약해져 간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마치 늘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아를 보는 것처럼 "저 녀석은 늘 저런 식이지"하며 모든 문제가 그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오로지 그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치로는 유별난 아들, 유별난 형, 유별난 남편을 거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어질 상황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나 이 모든 갈등 상황은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날아든 형의 친구의 편지로 인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목적은 요양 혹은 기분전환이었지만 관광을 핑계로 삼아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에게 형이 속에 든 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이해하려고 애쓴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만한 실마리가 생겨났던 거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날 아침에 조용히 죽어간 작은 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 새의 죽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떠올린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런 죽음은 너무나 허무하고 쓸쓸한 것이다. <행인> 속 형님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그의 친구에게 속에 든 말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편지로 동생 '지로'에게 전하지 않았다면 형의 생각, 고민, 갈등과 고통을 그 후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해와 의심을 계속하다가 누군가가 미치거나 죽음에 이름으로써 이야기가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말한다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의 띠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다리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표현 수단이 있다. 

그리고 친구라는 그 말을 전해줄 존재가 있다. 

물리적인 다리는 없으나 그 다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겨울이 깊어간다.

날씨는 차가워지고, 바람은 매일 날카로움을 더해간다.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따뜻한 말 한 마디, 푸근한 마음 씀씀이가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곁에 있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새빨간 건 루돌프 사슴의 코로 족하다. 그러니 이제 더는 속지도 속이지도 말기를. 

고백하기 좋은 계절이다. 마음을 연다고 그 마음에 겨울이 들이닥치지는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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