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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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쪽 

형의 이마에는 학자다운 주름이 점점 깊게 새겨졌다. 그는 점점 더 책과 사색에 빠져들었다.


 이 관찰의 진술은 이야기의 중심 화자인 형의 동생 '지로'의 관점에서 본 형 '이치로'의 면모다. 지로에게는 형의 태도나 행동이 학자라는 직업과 지위, 깊은 사색에 빠져들곤 하는 습관으로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형의 진정한 면모를 깨달았을지 어떨 지 모를 일이다.


 238쪽

"보시는 대로 저는 눈을 못 쓰게 된 이후로 색이라는 색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해님조차 이제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잠깐 바깥으로 나가려고 해도 딸 신세를 지지 않으면 볼일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혼자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무슨 업보로 이런 업병에 걸렸나 싶어 정말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 눈은 멀어도 그다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가장 괴롭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까지를 읽기 전에는 이 '눈을 못 쓰게 된' 여자의 이야기가 어떤 쓰임이 있는지 알 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서 '이치로'가 왜 이 여자의 이야기에 그토록 슬퍼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당연히 여자의 말 속의 '가장 밝은 해님'이나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가장 괴롭'다는 말 역시 그 백분의 일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읽고 난 후에는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치로는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괴로워 하는 동시에 모든 색을 잃고, 세상에서 가장 밝은 해님조차도 볼 수 없게 된 상태에 있었던 거다. 이 이야기를 읽지 않고는 지금 내가 적은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 할 것이 당연하다. 읽었다고 해도 달리 해석했다면 엇갈리는 게 자연스럽다. 소세키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 역시 그런 엇갈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240쪽

 그녀에게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두 눈을 잃고 남들로부터 거의 반편이 취급을 받는 것보다 한 번 장래를 약속한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손에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앞서 발췌한 이야기 속 눈을 못쓰게 된 여자의 다음 이야기다. 동시에 앞에서 한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다. 눈을 잃은 것보다, 사람들의 반편이 취급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장래를 약속한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 손에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쯤을 읽었을 때 문득 소세키가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는 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집착에 대해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소세키는 사람들의 마음에 집착에 가까운 탐구정신을 발휘했던 것일까?" 

가끔은 소세키 자신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겪거나 품고 있는 고민 혹은 고뇌를 안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한두 번 생각한 것을 이토록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을 리도 없다. 무수히, 수 없이 떠올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소세키 자신의 고뇌의 산물이라면, 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이야기를 읽는 내가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다리는 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있다.


  311쪽 

 나는 희미한 불안감 속에서 어렴풋한 기쁨과 그 기쁨에 동반되는 일종의 덧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 가슴을 덮친 이 감상적인 기분에 되도록 자신을 맡기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부분은 단순히 메모를 해뒀을 뿐, 달리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기쁨과 기쁨이 동반하는 덧없음의 대비가 눈에 띄었기에 메모를 했던 거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읽고 보니 이 부분 역시 다르게 읽혔다. 이 문장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동생 '지로'의 기분일 뿐 아니라 성격이기도 하다. 지로는 '기분'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이와는 달리 형 '이치로'는 자신의 기분을 바로 알고, 이해하고, 제어하려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분명 형제지만 이렇듯 성격의 근본부터가 다르다.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지로의 성품에 더 가깝다. 형과 동생의 갈등의 주된 원인이 되는 형수 또한 형과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형, 이치로는 고립된 기분으로 지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기 안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며, 사색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작지 않은 괴로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이치로의 태도를 가족들은 유별난 성격, 그다지 좋지 않은 건강 탓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부분이 이들의 한계이자, 전혀 다른 세계의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의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경계선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363쪽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형의 생각과 행동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동류에게 이끌리는 본능적인 기울어짐이었다. '하고 있는 일이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는 형의 모습은 연민이 아닌 공감을 일으켰다. 언제나 나를 고민하고 또 갈등하게 만드는 이유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책을 읽는 것이 목적이 되기를 바랐고, 글을 쓸 때면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이 되기를 바랐다. 일을 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이상과 현실이 동일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두 가지가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이라도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게 내 마음이다.


 364쪽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오네.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는 과학은 일찍이 우리에게 그치는 것을 허락해준 적이 없지. 도보에서 인력거, 인력거에서 마차, 마차에서 기차, 기차에서 자동차, 그리고 비행선, 비행기, 아무리 가도 쉬게 해주지 않네.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지. 정말 두렵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걱정들,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치로를 보며 쓸 데 없는 걱정으로 심기를 소모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일랑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며 살라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충고는 진실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아가기만 하려는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정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더 빨리지고 더 편리해져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소세키가 살았을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진 현대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우며,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자. 편안하고 느긋이 살아가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킨 결과 우리는 더 바빠졌고 더 분주해져 버렸다. 앞으로 발전을 계속한다면 또 얼마나 바쁘고 정신 없이 지내야만 하게 될까? 나 역시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가까운 이의 마음조차 들여다 볼 여유를 잃어버리고 말 그 미래가, 그 내일이 몹시도 두렵기만 하다.


 369쪽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형님의 머리는 그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좀 달랐네. 형님은 멍하니 산보를 하다가 문득 자신이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게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네. 걸으려고 생각하면 걷는 것은 자신임에 틀림없지만 그렇게 걷자고 생각하는 마음과 걷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불쑥 샘솟는지, 형님에게는 그게 커다란 의문이었던 거네.

 


 형님의 수준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쓸 데 없이 생각이 많다는 소리를 들어온 나였기에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제에 구애되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게 보통의 견해였다. 정말 그런 것들을 다 신경쓰며 생각하다가는 신경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서로의 생각이 좁혀지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이야기 하기를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다 이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불쑥 혼자라는 걸 깨닫는 순간과 마주쳤다. 나는 언제나 분열되어 있다. 마치 한 순간도 하나였던 적이 없던 것처럼.


 375쪽

 "Keine Brücke führt von Mensch zu Mensch."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는 '중매'의 의미일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중매로 결혼하거나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그런 방식이 보편적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것만이 서로의 이해와 수준에 맞는 적합한 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불행한 결혼으로 자신의 능력을 펴기는 커녕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람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결혼이란 그렇게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것이다. 한 사람, 두 사람, 한 집안, 두 집안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 큰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그 말을 이해하고 알아들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 말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거다. 

 이 두사람을 잇는 튼튼한 다리, 고속도로처럼 넓은 다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생길 것 같지 않다. 기껏 이어진다고 하면 가느다란 실 정도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실만큼 이어진 것으로도 상대방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 거다. 

 가족들보다 형제보다 부부보다 이치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던 친구 H씨의 편지에서 그런 단서 혹은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388쪽 

 형님은 때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불쑥 던진다네. 그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교육이 부족한 사람의 귀에는 어딘가 금이 간 종소리처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형님을 잘 알고 있는 내게는 오히려 습관적인 말보다 고마운 것이었네. 나는 평소붜 거기에 형님의 특색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네.

 


 '금이 간 종소리처럼 이상하게'라는 표현이 와 닿아 발췌했다. 

금이 간 종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뭔가 부족하거나 이상한 소리일 게 분명하다. 흔히 하는 말로 헛소리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두고 그렇게 표현할 것만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소리를 고마워하며 듣는 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친구를 염려하는 마음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나치게 영민하고 예민한 친구가 가끔 부족한듯 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잖이 안심이 되는 것이었으리라. 천재의 단명이나 광기의 원인은 대부분 이해받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 이해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한계 지점에서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미쳐버리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졌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논리의 정연함이나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납득시켜야 하는 필요성까지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미완결된 상태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형에게 그만한 친구가 있으므로 형은 괜찮을 것만 같다.


 396쪽

 "이보게,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형님이 물었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내가 대답했네.

"철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나?" 형님이 다시 물었네.

"근본적인 것 같네." 내가 다시 대답했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연구적인 내가 실행적인 나로 바뀔 수 있을까? 제발 가르쳐주게." 형님이 부탁했네.

"나한테 어떻게 그런 힘이 있겠나?" 생각지도 못한 나는 거절했네. 

"아니, 있네. 자넨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네. 그러니 행복한 거지. 그래서 그렇게 차분히 있을 수 있는 거라네." 형님이 거듭 말했네.

 


 선문답 같은 이 물음과 답은 어딘가 가슴을 찌르르하게 하는 서글픔과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모순을 깨달은 인간, 한계를 알아챈 인간은 철저하게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인간적인 한계이지 개인의 한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치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치로가 살아내는 삶은 그가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 이야기 속에 거듭 등장하는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 그러나 이치로 자신은 그 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려고 한다. 그런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부딪히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애쓰는 인간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다른 인간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하지만 천성을 변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타고났다'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몇인가 알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연구적'인 편에 가깝다. 그렇기에 나 역시 실행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닮아보려고도 하며, 변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쪽인가 하면 여전히 연구적인 쪽의 인간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인간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아주 몹쓸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에 적잖이 안심하고 있는 중이다. 형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 것처럼 때때로 기댈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괜찮을 수 있다.


 398쪽

 친밀하다는 것은 그저 사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네. 어딘지 섞여서 원만해지는 특성을 서로 분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네.

 


 '사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섞여서 원만해지는 특성'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서로 분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설명하려 풀어 쓴 문장이 오히려 더 뜻 모를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친밀하다는 것은 단순히 사이나 관계의 가깝고 멂보다, 마음의 거리 혹은 이해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낟. 서로 분담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성격이 같아야만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 거다. 섞여서 원만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불완전한 부분을 드러내도 흉이 되지 않는 사이를 찾기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뚫어진 성격 혹은 모난 성격의 사람들을 모질게 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미운짓,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난 성격 혹은 비뚫어진 성격이 생각을 달리 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에 서로를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부분이기에 대부분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허락할 수 있기까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단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 단계를 넘는 것은 어쩌면 가까운 사이인 가족에게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깝다는 것이 친밀하다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걸 읽는 사람이야 어찌 알아들을 수 있을까.


 413쪽

 다만 구름이 하늘에 있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네. 자네나 어르신들은 형님이 곁에 있는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며 딱한 형님에게 다소 비난의 의미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네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을 행복하게 할 힘이 있을 리 없네. 구름에 싸인 태양을 보고 왜 따뜻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그렇게 다그치는 쪽의 억지일 걸세. 나는 이렇게 함께 이쓴 동안 가능한 한 형님을 위해 그 구름을 걷어내려 하고 있네. 자네나 어르신들도 형님에게 따뜻한 빛을 바라기 전에 우선 형님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주는 게 좋을 걸세. 만약 그걸 걷어낼 수 없다면 가족인 자네나 어르신들에게 슬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형님 자신에게도 슬픈 결과가 되겠지. 나도 슬플 거네.

 


 누군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친구를 가졌다면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 다시 어디있겠는가. 구름 낀 하늘에서 따뜻한 빛을 내놓으라 다그치지 않고 스스로 그 구름을 걷어내겠다고 말하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따사로운가. 이런 행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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