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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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헬조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우선 이 표현은 지나치게 '가볍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건이나 현상, 심지어는 시대까지를 단순화시키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것 같다. 

'헬조선'이라는 표현 역시 입에 맞도록, 부르기 쉽도록, 마치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의 거리를 두도록 만드는 단순화의 산물인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조상님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이웃집 아저씨?

아니다. 이 문제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건 우리 모두다. 

노인에서부터 아이까지, 국민 모두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함께 하고 있는 거다. 


"누구 탓이냐?"고?

누구 하나의 탓이 아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누구'를 찾아서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내도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누구 탓이냐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하는 건 우리 모두 함께다.


<어쩌다 한국인>은 <가끔은 제정신>을 통해 알게된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의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에 관한 저서다.

이 여섯 가지 심리가 정확하다거나 틀림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접근과 해석 방식이 흥미롭다.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가 뭔지 궁금한가? 

그럼 일단 그 이름만 적어보기로 한다.


1. 주체성 

 부제 : '내가 한 턱 쏜다'에 숨겨진 본심


2. 가족확장성

 부제 : 한국형 국가 모델 : 큰아버지와 조카?


3. 관계주의

 부제 : '저희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


4. 심정중심주의

 부제 : 한국인의 진심 확인법


5. 복합유연성

 부제 : 한국인이 유독 포기를 싫어하는 이유


6. 불확실성의 회피

 안 보일까봐 불안한 사람들


 각각의 주제만 봐도 적잖이 흥미가 일어날 거다. 사실 내용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다. 그럴 것이 한국인의 민감한 심리를 들추는 것이다보니 지금도 거의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책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태도, 떨쳐내지 못하는 학연과 지연, 폭탄주와 인재상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거의 모든 '현상'에 숨겨진 한국인의 심리를 파헤친다. 저자는 흔히 '헬조선'이라고 하는 현재의 한국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거나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 등 여러 방면이 성숙의 시간에 들어갔다고 본다. 그런 모습이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사춘기와 같다고 해서 대한민국은 사춘기다라고 선언하는 거다. 


 본문에서 저자는 한국인이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가치와 제도가 이제는 변화를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다른 나라와 역사적 흐름을 들어 주장한다. 주장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대와 세상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꼽은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는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버려야 하거나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음을 꼬집는다. 


특별히 마음이 끌렸던 몇 부분을 적어보기로 한다.


 220쪽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니, 남들이 하는 걸 그냥 따라한다. 매도 같이 맞으면 덜 아프니까.

 


처음에는 '인고의 착각'이 인과의 착각의 잘못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고의 착각은 인고의 착각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의 표현이었다. 인고의 착각은 간단히 말하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아 고생을 사서 했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마치 미덕처럼 일컬어 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행위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키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일이 적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권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을 뿐이고, 허울뿐인 권위를 미워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쓸 데 없이 고생해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발, 무의미한 고생을 사서 하지도, 시키지도 말자.


 253쪽

 결핍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다만 한국인들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낄 뿐이다. 이제는 결핍의 사회에서 성숙의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래 전 일이다. 해외 유학파 출신의 대학생이 유명 목사인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 범죄가 뉴스에 보도됐다. 그런데 이 범죄의 이유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유흥비를 주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해서 놀랐다기보다 그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놀랐었다. 그 이후에도 수십 만원의 카드 값을 갚으려고 강도가 되어 살인에까지 이른 사건이나 명품을 갖고 싶어, 상습 절도범이 된 사건 등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이제는 거의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없을만큼 너무나 '흔한' 현상이 되어버린 거다. 

 "얼마나 가져야 행복한가?"라는 물음이 있다. 사람에게 얼마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생계'는 어느 정도 수준이면 되는 걸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배웠다. 앞을 보며 나아가면서 발 밑에 짓밟히는 것들은 무시하라고 했다. 나아가려다 보면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말고 더 위를 바라보라고 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 진 것이 지금의 불행한 세대다. 얼마를 가져야 행복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나 '남보다 많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은 끊임 없이 샘 솟는다. 충분하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독하게 욕심을 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목말라하다 죽어갈 게 분명하다. 


 393쪽

 인문학은 결코 교양도, 수단도 아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불편했다. 그 열풍을 이어가기 위해 나왔다는 책들을 읽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구분이 모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문서에서조차 '무엇무엇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수 없이 봐왔다. 인문학까지도 '학습'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도를 따라가다가 '별 것 아니구만'하며 내려놓는 걸 보았다. 

쉬운 인문학.

가벼운 인문학.

친근한 인문학.

모두 좋다. 하지만 인문학이 단순히 역사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의 '상식'이나 '지식'을 쌓고 채우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이상 인문학 책을 읽지 않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정의'가 바뀐 것만 같다.

누가 그랬는가?

모두가 그랬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을 누군가가 제시해주는 지식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문학은 수단이 아니다. 본질이다. 그 속에 담긴 생각과 고민이 우리의 삶에 옮겨져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이 인문학이다. 무슨 철학자의 말을 외우고, 무슨 이론을 읊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쩌다 한국인이 된 걸까?

누구도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다. 이중국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의 부모의 선택일 뿐 태어난 자의 의지는 아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원망만 하고 있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 고민할 때다. 지금까지의 이론과 상식, 법칙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곧 온다. 이미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개개인을 살려내고 구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스스로 나아가자.


 사실 이 책에 담긴 한국인의 대표적인 여섯가지 심리 따위 아무 의미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 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보고,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앎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 그 방향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마음껏 이용하면 된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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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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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눈이 멀어 저마다의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 있으면서 육체의 눈이 먼 사람들에게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가 목사로 부임해 있는 한 마을에서의 어느 겨울.

 한 노파가 눈이 먼 손녀 하나를 남기고 죽는다. 목사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없이(실제로는 어떤 의도가 있었어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소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 소녀를 본 아내는 '예상과는 달리' 지나치게 화를 내고(어쩌면 그 태도는 집안에 들어오려는 재앙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써 아내를 달래며 다음 날을 기약한다. 이 소녀는 거의 교육받지 않은 상태였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에도 웅얼거리는 소리 외에는 내지 못한다. '나'는 목사로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하듯 소녀를 가르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나'는 거의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그 소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대단히 어그러지고 뒤틀려 있음을 말이다. '나'는 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믿었으나 결국은 자기 자신,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자기애가 부른 절망적인 결과 앞에 쓰러지듯 무릎 꿇는다.


 흔히 '적당한 자기애'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적당한 자기애는 자신감이 되어 준다. 자신도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사랑받고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자기애를 근거로 한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말로 자존감이 있겠다. 자존감이 온전히 높은 사람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은 소심함을 넘어 비참해 보인다.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경우에는 오만하고 교만해 보인다. 

 자기애와 자존감의 학술적인 정의는 어떻든 둘은 무척 닮아 있다. 적당히는 필요하지만 많든 적든 지나치면 고통과 불행을 부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이야기 속 목사는 소녀를 대하는 동안 서서히 눈멀어 간다. 육체의 눈이 멀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족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을 목사만은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를 신성한 과업을 수행하는 자, 순수한 선행을 베푸는 자, 사랑으로 곤란에 처한 자를 이끌어 주는 목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나쳐서 애처로워 보이는 '사랑' 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목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랑을 못 본 척, 모른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족의 괴로움 역시 외면한다.


 아무도 소녀의 이름을 몰랐기에 소녀는 목사의 딸이 부르는 대로 이름을 붙여 '제르트뤼드'라 불렀다. 소녀는 할머니와 사는 동안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지식은 물론 감정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소녀였지만 목사의 지도를 따라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서서히 인간의 마음에 눈뜨게 된다. 그리고 모든 소녀가 그런 것처럼 이 소녀 역시 사랑에 빠진다. 그 대상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인 자크였다. 

 소녀는 눈멀었으므로 집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로 사람들이 웃는지 우는지는 알았다. 소녀가 사랑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떤지 소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 역시 확인할 수 없다. 그런 그녀의 주위를 채우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목사였다. 그것은 목사의 열망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그들이 자신보다 제르트뤼드를 이해하고 아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독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더 멀리 떨어뜨린다. 아니다. 멀리 떨어뜨린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의 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녀는 목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목사 역시 사랑한다고 말한다.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눈이 보인다. 소녀는 가족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목사는 가족의 표정을 언제나 보고 있다. 


 소녀의 눈을 검사하고 간 의사 친구는 소녀의 눈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목사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소녀에게 세상을 보여주기로 한다. 수술은 성공했고, 소녀는 돌아왔지만 결말은 비참하다. 

 소녀는 비로소 가족의 표정을 보았다. 그 절망과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이 소녀가 거의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이었으리라. 세상은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으나 사람은, 인연은 엇갈리고 빗나가 비참해져 있었다.


 소녀가 사랑한 사람은 자크였다. 

목사가 사랑한 사람은 소녀였다. 

목사는 자신만이 소녀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오만한 감정을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비극 외에 어떤 결말도 준비할 필요가 없는 외길을 닦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모두가 보는 것,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몰랐을까.


세상에 '오직 나만이'라는 가정은 없다. 

"나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이런 생각은 오만이다.

그런 오만이 상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세상은 음악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눈을 돌리지 않도록, 눈을 감지 않도록 애써야만 한다.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있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는 '신'외에 아무도 없으며, 확신이라는 것조차 순간순간 변하고 또 흔들린다.


사랑도 좋고, 헌신도 아름답다. 그러나 사랑이나 헌신은 값이 없다. 대가를 기대해서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사랑도 헌신도 아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많아도 순수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 '나', 목사는 자신의 가정, 아내, 아이들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더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냥 친한 99명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더 빛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길을 잃었다 돌아온 양은 무리 속에 다시 섞여야 한다. 그를 구분하는 순간, 그 한 마리의 양은 언제까지나 길 잃은 채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로지 목자의 손에만 이끌려 다녀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선과 악은 인간이 분별할 수 있는 성질을 넘어선다. 

어떤 선은 악이고, 어떤 악은 선이 되는 것이 신에게도 가능할까?

인간은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흐름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는 존재다. 그런 인간 가운데 하나인 목사가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이 믿는 선 뿐이었다. 갑자기 알아버린 현실에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결과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인간은 모두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살아간다.  

사물도 현상도 저마다 다르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절대적인 '나'는 인간의 세상에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강요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말자.

우리는 저마다의 우리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어떤 사람은 코를, 어떤 사람은 귀를 쓰다듬으며 저마다의 진실을 말하며 살아가도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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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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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취할만큼 술을 마신 후에 적은 감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이 감상을 읽어보면 되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읽어볼 예정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감상 역시 내리 휘갈린 후 올려 버릴 것이므로. 

예고하건데, 이 감상은 몹시 감상적인 감상이 될 예정이므로 감상적인 것을 싫어하는 이는 읽지 말 것을 권함.


 책마다 읽는 이유와 목표가 제각각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출근과 퇴근 시간동안 읽었기에 거의 일주일 가까이 걸려 읽은 책이다. 시작부터 완독까지는 일주일도 넘게 걸린 책이기도 하다.


 <안녕 헤이즐>이라는 영화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이기도 한데 의외로 영화는 알지만 소설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우울한 이야기다. 불행한 이야기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우울, 동정, 슬픔은 소설 속 화자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의 부작용'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이며 필연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 없는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이 책을 다 읽었을즈음 한 편의 글을 편지에 적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 그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꼈기에 그런 편지를 적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 적고도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데는 언제 죽음이 닥칠 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작용하고 있었다. 10년 혹은 50년을 더 산다면 그 편지가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다. 


 이런 생각은 불확실한 내일의 소유자인 나에게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런 사치를 아무렇지 않게 거듭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삶이다. 나는 얼마나 방탕한가. 이런 자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는 아직 10대에 불과하지만 치명적인 암으로 인해 언제 그 생명을 잃어버릴 지 모른 채, 어느 정도의 체념과 어느 정도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아암 환자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다르게는 사랑과 세상에 대한 애정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래 전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던 날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렸음이 밝혀지면 어쩌지?"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두 가지 상황의 결론은 동일하다. 

"어쩔 수 없지. 곧 죽게 될 것이거나 이미 죽어버린 걸."

이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아암 환자들의 자기 인식이 슬픔을 안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수용'과 '체념'이다. 

이미 모든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이나 미련이 '죽음의 부작용'임을 인식하고 있는 아이를 보는 일은 얼마나 슬프고 힘겨운 것일까.

무슨 짓을 해도 언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장날 지 알지 못하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운 삶은 오히려 끝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곧 죽을 것이기에,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기에, 내일을 확신할 수 없기에 이들은 절망에게 희망 몫의 자리까지 내놓는다. 온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한 동안은 오히려 슬픔이나 설움이 마음을 장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보는 일이란 몹시도, 대단히도 서글픈 일이라 마음으로 울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주인공은 고작 열여섯이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이미 모든 희망이 박탈되었다는 것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좌절이나 슬픔을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필멸자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떤 생명체도 죽음을 자처하지는 않는 법이다. 모두가 생을, 삶을, 시간을 갈구한다.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박탈한다. 거기에는 어떤 희망도 약속도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완결이다. 

죽음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해요." 

"사랑하지만 시간이 모자라요."

"그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사랑하기를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게 이런 이유들은 모두 사치스러운 투정처럼 들릴 것이 분명하다. 이들이야말로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하고 또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이야기는 스스로의 존재의 마지막인 죽음과 죽음을 앞두고 소중한 사람을 만들려는 시도에 대한 성찰, 남겨질 지 모를 사람에게 안길지 모를 상처까지를 염려하며 자기 안에 갇혀 마지막을 기댜리는 소녀의 이야기다. 그러나 암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내일의 삶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다. 병이 있고, 암에 걸렸기에 먼저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을 위협하는 죽음은 암 하나가 아니다. 삶의 부작용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삶의 어디에나 웅크리고 있다가 삶을 거꾸러뜨릴 수 있게 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삶은 사랑하면서 죽음은 두려워하고 또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피하려고 애쓰는 동안 흘러가버리는 삶은 두려움의 부작용으로 삶의 어느 부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술에 취한 상태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횡설수설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태다. 거기에 이 시간이다. 술에 취한데다 잠까지 부족하다면 도대체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나부터 궁금할 지경이다.


 앞에서 책마다 읽는 목표나 이유가 제각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처음부터 목적이나 이유를 정하고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책 역시 처음에는 아무 목적 없이 읽기 시작했었다. 그러다가 하나의 목표가 생겼는데, 그 목표란 이 책의 제목인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문장에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거였다. 


 결론부터 적자면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일단 무슨 '잘못'인지 알 수 없고, '우리'가 누군지도 불분명 하며, '별'이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지 않다"는 의미의 문장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누구인지, 무슨 잘못인지, 어느 별 이야기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역시 오리무중인 거다. 


 이야기가 끝나갈즈음에는 이 문제를 푸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그저 인간이라는 '필멸자'의 존재를 좀 더 확실히 각인시켰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내일이 '반드시'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죄가 없으면, 순수하다면 그 삶은 죽음으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받게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내일? 내일은 내일이 오기 전까지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선형적인 흐름 속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그 지점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재생시켰을 때 그 시간에 내가 있을 지 없을 지도 알 수 없다. 온통 불확실한 것 뿐인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삶이다. 죽음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작용이다.


 이 책은 '사랑'의 속성을 일깨워준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언제 끝날 지, 어떤 이유로 파괴될 지 염려하는 동안에는 사랑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가족, 친구와의 사랑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통의 사람과 암 환자의 삶이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다. 혹 남겨질 사람에게 상처가 될 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이 소설 속의 '헤이즐'처럼 마음을 여는 것을 망설인다면 또다른 의미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떤 '상징'에 얽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나' 혹은 '자아'라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것에 얽매이는 것처럼 어떤 완벽하고도 완전한 '상징'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삶, 사랑, 죽음.

 이 셋은 언제나 충돌하지만 항상 함께 한다. 잊혀지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은 슬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슬픔은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실컷 삶과 죽음, 사랑과 두려움에 대해 떠들었지만 그 가운데 무엇하나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거다. 죽음은 염려나 걱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오로지 삶만이 걱정과 미련을 남기는 거다. 그러므로 삶의 부작용을 마음껏 즐기자. 그 부작용은 걱정일 수도 있고, 미련일 수도 있으며, 후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픔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잘못이 어느 별에 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별에도 잘못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기회를 잃어버리는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감상이 엉망진창이 된다면 그 잘못은 확실히 내게 있다. 역시 어느 것 하나는 확실한 게 좋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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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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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마음이 어지럽고 머릿속이 복잡해 무엇을 제대로 읽는 것도, 가지런하게 옮기는 것도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어제도 감상을 적어야지 하고 자리에 앉아 한 시간은 멍하니 있다 횡설수설해둔 것을 버려두고 잠들어 버렸다. 


 오늘 문득 감상을 적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불쑥 질투심이 마음 틈을 파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두 도시 이야기> 속,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평화를 차지한 남자, 시드니 카턴에게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느꼈던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턴의 희생을 숭고하게만 느꼈던 걸 생각하면 변덕도 보통의 변덕이 아니다. 그러나 부러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의 희생의 기회가, 누구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마치 구원이라도 얻은 것 같은 얼굴로 마지막에 웃었던 그 남자가 그저 부러웠다.


 고전 속 인물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카턴과는 정반대로 분노를 이끌어낸 인물도 있었다. 

 그 인물의 이름은 파우스트 박사다. 메피스토 펠레스와 함께 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향락을 누리다 결국 구원받은 남자, 파우스트 박사 말이다. 여러 번 읽는 동안 파우스트 박사가 왜 구원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납득할만한 단서를 얻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파우스트 박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왜 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메피스토 펠레스의 정당한 몫을 가로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 

 타락한 인간이, 고작 '애썼다'는 이유 하나로 구원을 받다니.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 도시 이야기> 속 카턴 역시 어떤 의미에서 파우스트 박사와 몹시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신념, 스스로 의미를 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분노나 질투는 이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스스로의 작은 그릇을 들키게 하고 부끄러움을 자처할 뿐인 거다.


혼란과 광기의 시대에 더 빛나는 사랑이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그런 사랑이야기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사랑이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담겨있다.


 19년, 아무런 예고도 징조도 없는 상태에서 사라진 한 의사가 바스티유의 북탑에 갇혀 있던 시간이다. 이야기는 그 의사가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멈추었던 시계가 돌아가듯이, 정체되었던 역사가 나아가듯이, 이 의사의 삶과 맞물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의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성을 잃어버린 듯하던 의사를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들은 찰스 다네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뻔한 전개다 싶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한다. 

 의사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마네트다. 딸 이름은 루시 마네트이다. 마네트 부녀와 찰스 다네이 외에 중요한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한 사람은 자르비스 로리라고 하는 은행의 사무원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시드니 카턴이다.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실패한 인생 정도일까.


 이 이야기는 의사 마네트 씨가 바스티유에서 나와 영국으로 옮겨간 후로부터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를 습격하고, 로베스 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파가 집권하던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기요틴'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붙인 단두대가 가장 왕성한 활약을 벌였던 시절이자, 공포와 혼란의 시대, 광기의 폭풍 속에서 무수한 생명이 흩어지던 시절이었다. 

 마네트 씨의 사위인 찰스 다네이는 본래 프랑스의 후작 가문의 후계자로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해 나가던 남자였다. 그러나 혁명의 광기는 그의 의지나 뜻과 무관하게 그를 '도망자'로 취급해 감옥에 가둬버린다. 감옥에 가뒀을 뿐 아니라 간단히 그 생명을 박탈하려고 일을 꾸며나간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그의 가문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는 언제나 사랑 앞에 완벽히 패배하고 만다. 


 파리의 광기가 극에 치달았을 때의 상황을 보며 문득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올랐다. 그 피리를 불고 다니며 쥐와 아이들을 함께 홀려서 데리고 사라지는 남자 말이다. 이 사나이의 피리 소리는 쥐를 불러서 바다로 뛰어들게 만들 뿐 아니라 아이들을 이끌어 자신을 따라오게 만든다. 아이들의 의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나이가 피리를 부는 대로 따라다닐 것이기에. 

 혁명 당시의 프랑스가 그렇게 보였다. 미워하는 자, 원한이 있는 자는 고발하여 교수대 혹은 단두대로 보낸다. 재판은 공정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오직 피를 부르는 전야제나 다름없는 형식적인 과정으로 전락해버린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자신들까지 그 피의 축제에 말려들까 두려워하며 광기를 흉내 낸다. 모두가 멈추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는 무질서 속의 혼란. 그것이 혁명의 정체처럼 보였다. 

 이런 살풍경이 과거 프랑스만의 일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세계는 어떤가? 

좀 더 이성적인가?

대단히 합법적인가?

특별히 공평한가?

두려워하게 만들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자유로운가?

누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고, 그런 것처럼 보려고 애써왔을 뿐이다. 

엄혹한 현실은 다수의 대중을 침묵시킨다. 소수의 목소리 내는 자를 매장해 버린다. 

어느 시대나 그래 왔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래 왔다. 

 이 시대가 특별히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다르지 않은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아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는 있는 것 같다.

이 시대는 순교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순교자가 태어날 수 없는 불임의 시대인 셈이다. 

희생자는 무수하지만 순교자는 없다는 것은 얼핏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 시대의 특징이다. 

순교자의 제 1 조건은 목적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해도 그를 순수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마치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혹은 때 묻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카턴과 같은 숭고한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이 소설 속 '두 도시'는 프랑스의 파리와 영국의 런던이다. 

구체적으로 이 두 도시가 18세기 후반 서로의 도시에서 무엇을 꾸몄는지는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다만 비슷한 나이였던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통해 두 도시 모두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것만을 예상해 볼 뿐이다. 


 체제와 주의의 충돌은 언제나 희생을 동반한다. 이상한 것은 이 희생의 대가를 가장 많이 누려야 할 사람들에게 거의 어떤 이익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협조'와 '도움'을 구하며 '양보와 기다림'을 청한다.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들은 언제나 얌전히 기다린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기다림의 대가로 받는 것은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이거나 더 나빠진 생활이다. 


 <두 도시 이야기>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혁명을 일으켜 왕과 귀족을 숙청했던 세력이 반대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키요틴 아래서 무수한 피를 다시 흘리게 된다는 것이다. 민중은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죽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시달렸을 뿐 처음과 다름없는 생활, 혹은 더 나쁜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만 바뀌었을 뿐, 피리 소리는 여전하고 그 피리 소리에 이끌리는 어린 백성들 역시 여전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한 남자의 깊은 사랑과 놀랍도록 숭고한 희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희생은 분명 의미를, 실감할 수 있는 무게감과 살아있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몹시 여리고, 위태로운 것이기에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도시 이야기>는 세 번은 읽어봐야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났으니 말이지만, 내년 봄, 추위가 풀릴 때쯤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오늘도 횡설수설이 그치지 않는걸 보니, 이번엔 제법 중증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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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조제'라는 이름은 이 책에 담긴 아홉 편의 단편 가운데 한 편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동시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자신의 소설 속에서 종종 주인공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조제라는 이름을 쓰는 주인공의 본명은 야마무라 구미코다. 하지만 어느 날 '그냥' 자신의 이름을 바꿔버린다. 

별다른 이유나 설명도 없이 이렇게 말한 게 전부다. 

"이유는 없어. 그냥 조제가 내게 꼭 어울리니까. 구미코라는 내 이름, 이제부터 안 쓸래."

정말 엉뚱한 여자다.


 내게도 이름에 얽힌 짤막한 일화가 있다. 지금의 이름이 아닌 '동만'이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하셨다는 이야기다. 이름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사람들이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유는 '내 이름은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부르고 싶은 사람이 부르기 편한 걸 부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제라는 여자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조제는 자신을 '조제라 부르라'고 했고, 나는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했으니.


 사실 이름이나 호칭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이 좁게는 관계부터 넓게는 존재까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쓰레기'니 '도둑'이니 '악마'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 온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이 그렇게 불렸다고 상상해보자.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이름은 중요하다. 조제가 자신의 이름을 정하고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는 행동에서는 존재에 대한 갈구가 느껴진다. 사회적인 약자이자 흐릿한 존재로 평생을 살아왔다면 언제나 어떤 위기감에 시달려오지 않았을까? 


조제에게는 소아마비가 있어서 하반신을 거의 쓰지 못한다. 그런 조제에게도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진짜 호랑이를 보는 것' 

그의 소원이다. 


 연애가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진짜 사랑'이란 더 모호하고 불분명해졌으며 희귀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시대였기에 몸까지 불편한 조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진짜 호랑이를 보러 가는 것을 꿈으로 간직했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제에게 기적처럼 찾아든 인연이 츠네오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츠네오는 '어쩌다 보니, 그냥, 조제 곁에 머물게 된' 남자다. 물론 조제에 대한 마음의 정체는 분명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다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과 이끌림이 어떻게 다르냐고, 한 번 설명해보라고 해도 솔직히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조제는 이야기의 말미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66쪽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죽은 존재란, 사체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솔직히 이 문장은 마음을 끌기에 눈여겨보기는 했지만 다시 읽어봐도 그 의미를 또렷이 떠올릴 수 없었다. 물고기의 어떤 생태가 '죽음'과 연결되고 그 죽음이 행복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마냥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는 이야기와 이어진 걸까? 

분명한 것은 조제가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호랑이를 보러 가고 수족관에 들러 사람의 얼굴을 닮은 말간 눈을 한 물고기를 보는 것으로 조제의 삶은 풍부해지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라는 말에는 아직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므로, 그 상태가 행복한지 어떤지 살아 있는 인간은 알지 못한다. 조제처럼 물고기에 이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내게는 무리다. 그러나 '곁에 있는 한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영원히 소유하는 것, 그 사랑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행복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이 책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홉 편 담겨 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저마다의 행복과 존재의 의미를 연애, 사랑, 이별 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여성의 입장에서 적은 것이라 쉽사리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통하는 것은 있는 법이다.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


 거창한 행복,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권하면 너무한 처사가 될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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