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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인 - 대한민국 사춘기 심리학
허태균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개인적으로 '헬조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우선 이 표현은 지나치게 '가볍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건이나 현상, 심지어는 시대까지를 단순화시키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것 같다.
'헬조선'이라는 표현 역시 입에 맞도록, 부르기 쉽도록, 마치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의 거리를 두도록 만드는 단순화의 산물인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조상님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이웃집 아저씨?
아니다. 이 문제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건 우리 모두다.
노인에서부터 아이까지, 국민 모두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함께 하고 있는 거다.
"누구 탓이냐?"고?
누구 하나의 탓이 아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누구'를 찾아서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내도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누구 탓이냐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하는 건 우리 모두 함께다.
<어쩌다 한국인>은 <가끔은 제정신>을 통해 알게된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의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에 관한 저서다.
이 여섯 가지 심리가 정확하다거나 틀림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접근과 해석 방식이 흥미롭다.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가 뭔지 궁금한가?
그럼 일단 그 이름만 적어보기로 한다.
1. 주체성
부제 : '내가 한 턱 쏜다'에 숨겨진 본심
2. 가족확장성
부제 : 한국형 국가 모델 : 큰아버지와 조카?
3. 관계주의
부제 : '저희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
4. 심정중심주의
부제 : 한국인의 진심 확인법
5. 복합유연성
부제 : 한국인이 유독 포기를 싫어하는 이유
6. 불확실성의 회피
안 보일까봐 불안한 사람들
각각의 주제만 봐도 적잖이 흥미가 일어날 거다. 사실 내용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다. 그럴 것이 한국인의 민감한 심리를 들추는 것이다보니 지금도 거의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책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태도, 떨쳐내지 못하는 학연과 지연, 폭탄주와 인재상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거의 모든 '현상'에 숨겨진 한국인의 심리를 파헤친다. 저자는 흔히 '헬조선'이라고 하는 현재의 한국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거나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 등 여러 방면이 성숙의 시간에 들어갔다고 본다. 그런 모습이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사춘기와 같다고 해서 대한민국은 사춘기다라고 선언하는 거다.
본문에서 저자는 한국인이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가치와 제도가 이제는 변화를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다른 나라와 역사적 흐름을 들어 주장한다. 주장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대와 세상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꼽은 한국인의 여섯 가지 심리는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버려야 하거나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음을 꼬집는다.
특별히 마음이 끌렸던 몇 부분을 적어보기로 한다.
220쪽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니, 남들이 하는 걸 그냥 따라한다. 매도 같이 맞으면 덜 아프니까. |
처음에는 '인고의 착각'이 인과의 착각의 잘못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고의 착각은 인고의 착각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의 표현이었다. 인고의 착각은 간단히 말하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아 고생을 사서 했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마치 미덕처럼 일컬어 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행위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키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일이 적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권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을 뿐이고, 허울뿐인 권위를 미워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쓸 데 없이 고생해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발, 무의미한 고생을 사서 하지도, 시키지도 말자.
253쪽 결핍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다만 한국인들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낄 뿐이다. 이제는 결핍의 사회에서 성숙의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
오래 전 일이다. 해외 유학파 출신의 대학생이 유명 목사인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 범죄가 뉴스에 보도됐다. 그런데 이 범죄의 이유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유흥비를 주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해서 놀랐다기보다 그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놀랐었다. 그 이후에도 수십 만원의 카드 값을 갚으려고 강도가 되어 살인에까지 이른 사건이나 명품을 갖고 싶어, 상습 절도범이 된 사건 등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이제는 거의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없을만큼 너무나 '흔한' 현상이 되어버린 거다.
"얼마나 가져야 행복한가?"라는 물음이 있다. 사람에게 얼마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생계'는 어느 정도 수준이면 되는 걸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배웠다. 앞을 보며 나아가면서 발 밑에 짓밟히는 것들은 무시하라고 했다. 나아가려다 보면 누군가를 상처입히거나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말고 더 위를 바라보라고 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 진 것이 지금의 불행한 세대다. 얼마를 가져야 행복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나 '남보다 많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은 끊임 없이 샘 솟는다. 충분하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독하게 욕심을 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목말라하다 죽어갈 게 분명하다.
393쪽 인문학은 결코 교양도, 수단도 아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불편했다. 그 열풍을 이어가기 위해 나왔다는 책들을 읽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구분이 모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문서에서조차 '무엇무엇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수 없이 봐왔다. 인문학까지도 '학습'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도를 따라가다가 '별 것 아니구만'하며 내려놓는 걸 보았다.
쉬운 인문학.
가벼운 인문학.
친근한 인문학.
모두 좋다. 하지만 인문학이 단순히 역사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의 '상식'이나 '지식'을 쌓고 채우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이상 인문학 책을 읽지 않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의 정의'가 바뀐 것만 같다.
누가 그랬는가?
모두가 그랬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을 누군가가 제시해주는 지식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문학은 수단이 아니다. 본질이다. 그 속에 담긴 생각과 고민이 우리의 삶에 옮겨져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이 인문학이다. 무슨 철학자의 말을 외우고, 무슨 이론을 읊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쩌다 한국인이 된 걸까?
누구도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다. 이중국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의 부모의 선택일 뿐 태어난 자의 의지는 아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원망만 하고 있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 고민할 때다. 지금까지의 이론과 상식, 법칙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곧 온다. 이미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개개인을 살려내고 구원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스스로 나아가자.
사실 이 책에 담긴 한국인의 대표적인 여섯가지 심리 따위 아무 의미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 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보고,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앎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 그 방향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마음껏 이용하면 된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