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밀리언셀러 클럽 9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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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었기 때문에, 번역된 그의 소설을 몇 권 더 구매했다. 이 책은 그 중 첫 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라는 제목이 주는 긴박성, 필연성 혹은 불가피성과 같은 느낌을 기대만큼 즐길 수 있었던 소설은 아니었다.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전개, 복선, 치열한 논리적 흐름, 반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추리소설류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이와 같이 판타지(초자연적 소재)가 가미된 장르이다. 예지력이라던가 시간여행, 빙의 같은 기법들은 오히려 추리소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반감시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이 소설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아직도 꾸준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생각/취향이 어쩌면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다.

"네. 숙모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지요. 긴 삶에서 겨우 그것을 알았다고." - 224쪽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
눈썹을 모으고 생각하는 미호에게 관장이 이어서 말했다.
"보통 사람으로 사는 일을 말하는 거겠죠. `평범`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좋다고 생각해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평범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평범한 사람이라서." - 224쪽

지금은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릴 때이다. 시간의 흐름이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보내 줄 것을 믿고 있다. -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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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제작팀 지음 / 해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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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춘

지금의 '청춘'이 갖는 의미는 그 옛날 순진했던 젊음, 해방, 자유, 방황, 갈등, 혼돈 이상의 것이다. 이 모든 불투명한 것과 더불어 '생존'의 의미는 보다 강하게, 희망의 의미는 보다 약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지금의 구조 하에서 청춘들은 무엇 하나 다짐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과 구체적인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2. 대학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오글거리는 수식어는 이미 사라져버린지 오래이다. 대학진학률이 70-80%에 육박하는 현 시점에서 대학은 고등학교의 연장일뿐이며, 졸업을 한다고 해도 별다를 것이 없지만, 안 거쳐가면 불안한 관문이 되어버렸다. 대학이 갖는 의미는 취직이라는 사회진출을 위한 집합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업이 대학을 운영하고, 기업에 맞는 인재를 양성한다면서 커리큘럼을 마음대로 바꾸는 시대다. 이에 맞추어 대학생들은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사회봉사 등 수없는 스펙 경쟁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취직이라도 된다면 다행인 분위기이다. 이런 마당에 과연 우리는 대학에 어떠한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일까.

 

3. 질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니, 다른 것에 눈돌릴 여유가 없다. 그저 주어진 것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기업들이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도구화 하는 반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가 즐거운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유보해야 한다. 그 질문들이 자신의 삶에 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까지는.

 

4. 긍정적인 시도 & 아쉬움

대학을 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생략한 채 입학을 목표로 12년을 살고,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취업을 위해 또 다시 전력질주를 해야 하는 대학생들에게 현재의 생활에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왜'라는 질문을 제시하면서 결국에는 '인재'라는 결론에 맞추어 코칭, 멘토링을 해주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찌되었건 대학의 효용은 인재 양성이라는 것인가. 물론 자존감을 잃어버린 채 좌절해 있는 청춘들을 앞에 두고 이런 아쉬움을 표하는 것 조차도 굉장히 사치스러운 게 현실인지도 모르지만.

인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골드만 삭스, 맥킨지 등 글로벌 인재들의 산실로 불리는 세계적인 기업에서 근무한 일본의 인재 전문가 도쓰카 다카마사는 자신의 저서 <세계 최고의 인재들은 왜 기본에 집중할까>에서 인재는 `기본`에 철저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누구나 알지만 쉽게 지나치는 인간관계, 여유와 배려, 시간 엄수 등이 인재를 만든다고 말했다. - 67, 68쪽

취업하려면 대학생들에게 학점, 대외활동, 영어, 해외연수 등 원하는 게 정말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대중매체에 나와서 `꿈을 가져라` `너만의 길을 가라`고 말해서 학생들은 오히려 혼란스럽다고 했다.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는 `스토리`를 가지라고 말한다. - 69쪽

조벽 교수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차이는 실수한 후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아마추어는 실패 한방에 무너진다. 실패한 사실 때문에 자신에 대한 실망감, 창피함, 굴욕감, 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초조함에 의기소침해진다.
부정적 감정이 꼬리를 물고 더 강한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지면 결국 사람은 절망하고 쉽게 포기한다. 실패 그 자체가 사람을 망치는 게 아니라 실패에 동반되는 부정적 감정이 독이 되고 그 감정에 매몰되었다가 파괴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반면 조벽 교수는 프로 페셔널은 실수하거나 실패하더라고 곧바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평정심을 회복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실수해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람은 경험을 축적한다. 경험이 풍부해지면 위기 상황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성숙하고 중심이 잡힌 사람이 된다. - 88쪽

최성애 박사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설명하며 `화가`의 비유를 들었다. 기업에서는 창의적인 화가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채용할 때는 모작에 뛰어난 상업 화가를 뽑는다는 것이다. 설령 독창적이고 재능이 뛰어난 화가를 뽑았다 해도 그 화가가 창의력을 발휘하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꾸짖는 식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될아가면 생업이 필요한 화가는 어쩔 수 없이 기업의 눈치를 보면서 틀에 박힌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 116쪽

마윈은 자신의 성공 철학을 역발상에서 찾는다. 뒤집어보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 열에 아홉이 찬성하는 아이디어를 채택하지만 그는 이런 아이디어는 버렸다고 한다. 90퍼센트가 찬성하는 아이디어는 어디선가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미 뺏긴 기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업의 논리를 벗어난 그의 역발상은 15년 후 알리바바를 중국 최대의 전자 상거래 기업으로 만들었다. - 117쪽

재능 많고 실력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힘들어하고 절망하는 이유를 조벽 교수는 자기의 중심이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심이 바깥에 있다는 것은 성공과 행복의 잣대가 외부의 인정에 의해 정해진다는 의미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이 외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스스로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다. 순간적인 행복이나 성공은 얻을 수 있어도 오래 가지 않는다. 명문대에 들어가도 대기업에 들어가도 외부의 요인에 의해 흔들려 뿌리 없는 나무처럼 혼란스러워 한다. - 131, 132쪽

"걷기 한 시간, 아니면 뛰기 30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일주일에 다섯 번 하라`, 그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조벽 교수의 말처럼 인재는 살아가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타고난 머리가 좋다고 인재가 되는 건 아니다.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인재인지를 말해 준다. 과거에 내가 인재가 아니었다고 해서 앞으로 인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재의 내가 인재가 아니라는 말도 현재의 살아가는 방식이 인재의 방식이 아니라는 의미 이상은 아니다. - 137, 138쪽

우리는 과거에 대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바로 과거 자신의 잘못을 부각해 스스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 것인지, 좋은 점을 찾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인지 둘 중 하나다. 무엇이 나의 피와 살이 될 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 171쪽

하브루타 교육의 장점을 예시바 대학생 케빈 포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다 보면 사고가 명확해지고 자신이 배우는 걸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혼자 생각할 때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막상 말로 표현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때가 많다는 뜻이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 논리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실제로 내가 아는 지식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경우 막상 남에게는 설명하지 못하기 쉬운데 사실상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브루타 방식은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좀더 명확히 생각하고 지식을 체계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252, 253쪽

중요한 것은 대학에서 일어나는 배움의 과정에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느냐이다. 유학생에게 좋은 배움이란 토론과 질문 등 이질적인 수업 문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어휘력 이상으로 중요한데도, 한국 유학생들은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유학생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또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을 디렌데 교수는 질문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정리했다.
유럽 학생들은 답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말하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말을 하려는 시도부터 한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거나 답이라는 확신이 들 때라야 답을 하는 한국 유학생들과는 다르다. - 262, 263쪽

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거기에 답하려고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교수가 개입하면 그 욕구를 자제하려고 한다. 결국 학생들은 질문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가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교수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 분위기는 달라진다. 강의실의 주인은 학생이 된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교수의 생각도 궁금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생각을 남한테 전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함께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의 생각이 어떠한지도 궁금해한다. 그 호기심이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호기심이나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려고 한다. 그건 남이 지시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학생이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고, 교수는 그 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격려하고, 최종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해 주면 된다. - 277쪽

경쟁이 아니라 도전을 시작하세요. 아픔이 찾아오면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보길 권합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아 살아가지만 진짜 삶은 질문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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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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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나의 화두는 그야말로 `버티는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도무지 여유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분주함이나, 본격적인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면서 가중되는 육체의 피곤함이나, 그나마 아주 약간 남아 있는 애정조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인간 관계의 피로로 얽힌 직장 생활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단어는 `버티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생각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버텨야 했기에, 버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동사`라는 형태로 내게 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오늘도 그럭저럭 버텼다`는 안스러운 위로가,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나 뿌듯함보다는 버티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다가왔기에 내심 조금 더 힘들거나 괴로웠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내용의 제목이 있는 책을 발견했다.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버텨가는 삶은 오직 나뿐만은 아닐테니.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살아가는 데 있어 버티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이제는 더 많이 절망하지도 않고, 더 크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채, 딱 어제만큼만 버텨내면서, 또 그렇게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 만큼 삶에 대한 내 `맷집`도 조금은 좋아졌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해주어도 괜찮은 걸까.

타인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나보다 덜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정하며 어느 한 편에만 서면 명쾌해질 것이라 착각하지 말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우리의 지상 과제는 성공이나 이기는 것이 아닌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버티고 버텨서 다음 세대에게 후하고 창피하지 않은 우리가 됩시다. 버티고 버텨서 앞선 세대에게 손을 내밀고 관용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 남 보기에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맙시다. - 8쪽

나는 그날 이후로 영영 달라졌다. 힘들 때마다 내 비굴한 웃음을 기계적으로 떠올리며, 그날의 나를 해명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웃음을 떠올리면 아무리 나쁜 것도 마냥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고, 제아무리 아름답다는 것도 마냥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 17, 18쪽

뉴스를 보다보면 세상의 속살이 드러나 그 추잡함과 헐거움, 촌스러움에 치를 떨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서로 앞다투어 멋지고 잘났고 괜찮고 근사하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 투성이라 초래된 세상이라고 본다. 그것이 체계 안의 인간이기 때문이든, 태생적 한계이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흠결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자신의 흠결을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고쳐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아가 남의 흠결을 공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별로라고 말하고 다닌다. 너도 사실 별로라고 말하려고. - 21, 22쪽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 33, 34쪽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47쪽

사실 냉소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비관과 냉소는 대개의 경우 피폐한 자들의 가장 쉽고 편한 도피처다. 나는 냉소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가 제일 아늑하고 좋다. 글쓰는 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객관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뜨겁고 충만할 때보다 냉소적일 때 했던 말과 글이 더 오랜 시간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곧잘 타인의 진심을 무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진정성을 주장하는 말들을 무시한다.
실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호소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 101쪽

모든 노인이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은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늘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혜로운 노인이 늘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그 모든 아비규환과 부정과 폭력과 살인과 슬픔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노인의 주름은 알고 있는 듯했다. - 110쪽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 155쪽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 155쪽

도대체 내가 좌파여선 왜 안되나. 좌파라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너는 좌파라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잡음과 논란은 많을수록 좋다. 가져선 안 될 신념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말의 힘이고 마법이다. - 175쪽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185쪽

그렇게 한국의 디즈니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십 수 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공고해졌다. 지금 한국 문화계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시장주의자들의 핵심 논점은 변함없이 ‘한국에는 왜 아무개가 없느냐’는 것이다. 저 수많은 문화계 지원정책의 핵심 키워드 또한, 여전히 ‘한국의 아무개를 육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무개를 찾는 말들에는 당연한 오류가 있다. 그 아무개가 한국이라는 환경 아래에서도 그 놀라운 시장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냐는 문제다. - 211, 212쪽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 234쪽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개,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 288쪽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지금의 체계와 규칙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아프니까 청춘이고 밖은 추우니까 열차는 달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물려준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 310쪽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잠깐 후회하고 금세 망각하고 다시 되풀이 된다. 나와 나의 행동을 분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열함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부모와 형제자매를 개별적인 인격체로 객관화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317, 318쪽

<레 미제라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벌이는 신념의 대결, 장발장과 코제트-마리우스의 마지막 해후는 무엇을 의미하나.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에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뿐이라는 사실이다.
고작 상대 진영과 특정 세대에 책임을 돌리는 증오의 해법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만큼은 힐링을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이 숭고한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 이전에 앙졸라가 아닌 장발장의 염려를 껴안아야만 한다. 장발장이 숲속에서 코제트를 만난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골몰했던 바로 그것.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 351쪽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연애든, 고용이든, 혈연이든 마찬가지이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 357쪽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록키 발보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언제나 록키 발보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었다. 마지막이다.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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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분 공부법 - 토익, 자격증, 취업을 거머쥐는 마법의 시간 관리
야먀모토 노리아키, 김정환 / 길벗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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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해를 맞이 하며 다짐하게 되는 것들 중 하나로 자격증, 어학점수와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뾰족한 해결방법을 찾는 이들은 인터넷이나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를 어슬렁 거리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꽤 괜찮은 이름을 가진 책들을 하나쯤은 구입하게 되는데, <60분 공부법>도 이런 류의 책들 중 하나이다.

 

책을 찾는 이들의 수요는 매우 다양한데 비해 저자의 경험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자격증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즉, 이 책은 60분 동안 어떻게 공부를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는 못한다(그건 너무 허황되지 않은가?). 대신, 60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격증을 따는 것의 이점부터 시작해서, 직장인들의 경우 일을 하면서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60분 공부시간의 확보를 위하여 아침형 공부습관을 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시간이 충분할 것만 같은 저녁보다는 한정적으로 느껴지는 아침시간을 활용하여 정말 한정적으로 집중하는 공부를 통하여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구체적인 진행방법으로는 수험서, 기본서를 먼저 보기보다는 기출문제를 풀어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인식한 후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하여 문제와 시험시간에 적응할 것을 권하고 있다. 스톱워치를 이용하여 초조해지는 연습을 한다든지,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푸는 습관을 기른다든지,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방법이지만 그 구체화를 위해서는 저자의 방법을 일독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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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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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하는 '롤리타 컴플렉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승(이적요)의 아우라를 절대 넘보지 못할 유약한 제자(서지우)와 그런 제자를 무시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스승, 이 두사람의 애증에 관한 이야기가 '본질'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은교는 이적요와 서지우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임과 동시에 기존의 힘의 관계(이적요>서지우)에 반전을 주는 갈등의 요소이기도 하다. 은교는, 이적요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그러나 서지우에게는 여전한 젊음에 대한 이적요의 욕망과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구도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것을...

 

 

그동안 박범신 씨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그의 필력에 새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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