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피터 케리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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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는 호주 개척 시대의 아일랜드인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네드 켈리,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 이들은 당시 '켈리 갱'으로 불렸지만 알 카포네 같은 마피아를 연상해선 안된다. 이들은 평범한 소몰이꾼 혹은 농부에 불과했지만 몇몇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갱으로 '만들어'진다. 두목 네드 켈리는 자기 없이 자랄 딸을 위해 이야기를 남겼고 그 이야기는 배신자의 손에 넘어가 역사가 된다. 얄궂은 일이지만,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을 관통하는 두 산맥은 호주라는 미지의 대자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선 첫 번째 산맥을 타고 올라보자.


초기 호주 정착민들은 거대한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가능성과 무력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압도적 공백이 전하는 무력함. 억척스러움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내고 울타리를 치고 집을 짓고 마을로 가는 길을 만들고. 이렇게 쟁취한 것들을 누군가가 뺏으려 한다면 잠자코 앉아 대화를 나누기 보단 산탄총을 꺼내 대답을 날리는 게 더 효율적인 법이다. '주둥이 닥치고 내 땅에서 나가. 이 빌이 먹을 xx야.'


네드 켈리의 어머니는 남편을 두 번이나 바꿔가며 끊임없이 자식을 낳는다. 그녀에게 남자는 자신의 제국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런 계획이 한 번도 제대로 돌아간 적은 없다. 감옥에서 돌아온 남편은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고 새로 만난 남자는 헛된 망상에 빠져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처넣는다. 또 다른 남자는 쓸 일도 없는 주제에 바람을 피운다. 어머니는 바람을 핀 남편에게 샷건을 쏘지만 나쁜 놈은 유유히 도망쳐 나간다. 엄마는 목이 잘린 말 위에 앉아 마른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가족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권력이었다. 정부는 이상한 법으로 갈고닦은 땅을 뺏으려 하고 부패한 경찰은 자신의 무능을 숨기기 위해 무고한 자를 감옥에 처넣는다. 지금이나 그때나 공권력은 가난한 자의 친구라기 보단 부자들의 집을 지키는 개새끼 쪽에 가까웠다.


켈리 가족의 몰락은 피츠 페트릭이라는 경찰과의 악연에서 시작한다. 그는 네드 켈리의 여동생 중 하나와 결혼을 하길 원하지만 그에겐 이미 여자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생각을 어떤 어머니가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네드 켈리의 엄마라면? 피츠 페트릭은 네드 켈리의 여동생을 강제로 끌어 안아 무릎에 앉힌 뒤 허리춤에 찬 콜트 권총에 손을 댄다. 네드 켈리가 말한다. '무슨 개수작이야?'. 네드의 엄마가 삽으로 머리를 후려치자 권총을 뽑아 든 경찰의 손목을 네드 켈리가 쏘아 맞춘다. 경찰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 그는 켈리 가족의 용서로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는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일가족을 쫓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낭만이라고는 단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이 소설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머리가 좀 이상한 걸까?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욕설과 문법을 어긴 문장은 이야기에 이상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얼핏 코맥 매카시의 국경 삼부작이 떠오르지만 켈리 갱에게서는 상처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속에 새기는 매카시의 캐릭터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저항이 느껴진다. 매카시의 캐릭터가 침묵을 남기는 장소에서 켈리 갱은 '씨 x'이라고 말한다. 매카시라는 에스프레소에 위트를 두 스푼 넣은 뒤 마르케스라는(백년 동안의 고독) 찻잔에 받쳐 나온 것 같달까? 신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생생한 날숨을 내뿜는다. 두꺼운 밧줄이 목에 걸리는 장면을 목격하는 그 순간에서조차 어쩐지 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현대 호주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태어난 모두를 범죄자로 만들었던 끔찍한 대륙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가 됐다(인종차별이 심하긴 하지만). 네드 켈리의 가족은 오늘의 진보가 결국 과거에 쏟은 피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켈리 갱의 투쟁은, 결국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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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핑거 2020-04-0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쩜, 온갖 예쁜 깃털들을 주어 치장하고 장식한 갈까마귀 같은 글들이네요.

한깨짱 2020-04-02 12:38   좋아요 0 | URL
까악~ 까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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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다. 마치 음률과 뉘앙스가 완전히 망가진 번역된 시를 읽는 것 같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만만해 보이지만 어지간한 집중력으로는 이해는커녕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물리량이다. 시간 여행은 SF의 단골 소재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패러독스와 평행우주는 우리를 온갖 상상력과 가능성의 바다에 던져 넣는다. 미국의 유명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여기에 온 인생을 뺏겨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와 <테넌트>를 만들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유일한 사실은 시간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우리는 동일한 시간을 경험하지 않는다. 시간이 중력과 속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구와 오늘 오후 3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치자. 당신은 이미 도착해 극장 앞 벤치에 앉아 있다. 세시가 다 돼갈 때쯤 저 멀리서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시계는 이미 3시를 넘어 3시 1초, 2초를 가리킨다. 지각을 했으니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당신은 당당히 팝콘을 요구하지만, 세상에 친구의 시계는 정확히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시간은 속도가 빠를수록, 중력이 강할수록 느리게 간다. 친구가 빛의 속도로 달린 순간 이미 그의 시간 변화량은 0이 되었다. 그 속도를 유지하는 한 친구는 절대 늦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비유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친구와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동일한 속도와 중력을 경험해야만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더 확장해 나가면 엄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엄마가 할머니의 뱃속에,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의 뱃속에... 설령 빅뱅 이후 완전히 동일한 조건에서 탄생한 원자들이 완전히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신과 당신의 친구를 구성해 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이상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맞춘 시간도 결국 당신과 당신 친구 사이의 '특수한' 경험에 불과하다. 다른 위치에서 다른 중력과 속도를 경험하는 사람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늦었거나 제시간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빅뱅 이후 지금까지 우주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시간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신과 나는 하나의 시간, 하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의 특수한 역사를 경험한다. 시간은 수조개의 거미줄을 겹쳐 놓은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두 번째 진실은 시간도 양자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나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해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시간은 부드러운 비단 같이 매끈한 연속이 아니라 더이상 쪼갤 수 없는 특정한 물리량으로(플랑크 단위) 점점이 흩어져 있다. 시간도 양자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수많은 물리 서적에서 확인한 그 기이한 양자적 특성을 시간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양자 역학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자의 위치가 전자구름 내의 확률로만 기술될 뿐 정확한 위치는 우리의 관측을 통해서만 확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1초에서 2초로 매끈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자(시간)에서 다른 양자로 점프를 한다. 마치 첫 번째 관측에서 전자가 좌상단에 두 번째 관측에선 우하단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자의 위치를 확정하는 상호작용이 우리의 관측이라면 시간을 확정하는 것은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만물과 만물 사이의 '사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극장 앞에서 만난 친구와 지각을 했냐 안 했냐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자. 이 싸움은 두 사람이 싸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마치 전자의 위치가 확률로만 기술될 수 있듯 과거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싸우기로 결정한 순간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확률은 붕괴하고 만난 이후에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미래) 확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양자화 되는 순간 이처럼 미래와 과거 사이의 차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엇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떠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산다면 우리의 시간은 멈출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은 이미 내부 기관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건의 보고다. 뿐만아니라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서조차 우리는 '곳', 즉 장소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공간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또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물리적 실체(양자)의 집합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바꿔야 하는데, 이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시간의 특성이다. 읽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지만 매우 흥분된다는 사실은 감출 수가 없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혹자는 신과 같은 창조자의 존재를 전제해야 할 것 같은 강력한 유혹에 시달릴 수도 있다.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일관적인 논리에 의해 세상이 구성될 수 있냐는 것이다.


창조자의 역할을 이 판을 만든 존재, 그러니까 양자화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눈 종이를 만든 존재로 한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양자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연의 집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 다른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모두 붕괴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엔 보이는 건 단 하나의 실제이고, 그래서 마치 그것이 필연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 필연은 없다. 모두가 우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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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콘
맥스 배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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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얼핏 SF처럼 느껴진다. '너희들은 나를 왕으로 섬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왕이 된다. '너희들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부자가 된다. 유아적 상상력의 전형. 이런 일이 정말로 가능할까?


하지만 신화 시대에 '말'은 생각보다 하찮은 게 아니었다. 유대의 신은 모든 창조를 손이 아닌 '말'로 해냈다. '빛이여 있으라.' 신을 똑같이 본떠 만든 우리에게도 그런 '말의 힘'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그 믿음은 많이 퇴색됐지만 말은 여전히 마법과 과학 사이에서 줄타기를 이어간다. 어떤 식물학자는 과일에게 '예쁜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당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 다수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넌 할 수 있어!' 라는 마법의 단어를 외쳤음을 고백한다.


곰곰히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나? 말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말로 면접관을 설득한다. 정치인은 공개 연설과 TV토론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훔친다. 그 똑똑하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독일인을 모조리 똥멍청이로 만든건 다름아닌 해질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히틀러의 '말'이었다. <렉시콘>은 이런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소설이다.


'시인'들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온 말의 비밀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성향을 기민하게 파악해 그들이 어떤 말에 반응할지 판단하고 정확히 그 말을 던짐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룬다. 인간은 특정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문화로 정착시켜 세대를 넘어 유지하는데, 그 변화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이뤄진다. 하지만 사상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그 기간을 마법적으로 단축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들은 모두 이렇게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시간을 더 짧게 줄이면? 정말 말 한마디로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시인'들은 오랜 시간 그 방법을 갈고 닦아 완성시킨 사람들이다.


힘을 가진 단체가 언제나 선을 유지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꿈같은 일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을 기획했고 그 결과 호주의 한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실험에 사용된건 바벨탑이 붕괴하기 전, 그러니까 모든 인류가 유일하게 사용하던 단 하나의 언어였다. 그 언어로 만들어진 단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힘이 더 강력했고, '시인'들의 힘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동작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렉시콘>은 마법사같은 '시인'들을 내세워 판타지 액션 스릴러를 연출하지만 그 행위가 상징하는 바를 떠올리면 갑자기 섬뜩한 리얼리즘이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아는 컴퓨터 알고리즘에 둘러쌓여 있다. 전세계를 사로잡은 가짜뉴스는 어떤가? 정론을 대표하는 언론과 미디어는? 당신은 당신의 선택이 온전히 당신의 마음 속에서 발현된 독창적 욕망의 결과라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는 수 많은 기업과 아티스트, 정치인, 언론인, 소설가, 인문학자들이 사실은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엔터테인먼트와 언론과 광고와 SNS, 책, 검색 및 데이터 분석 기술을 발전시켜 사람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욕망이 없다면 직접 창조해 우리 마음 속에 넣어둔다. 그들은 공감가는 말과 글, 호소력 짙은 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제품을 만들어 우리를 '설득'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다보면 <렉시콘>의 '시인'이 더이상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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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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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과 호란 사이에 고작 38년의 시간차가 있었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10살에 왜란을 맞아 17세에 드디어 전쟁의 끝을 맛본 사람은 50살이 채 되지 않아 다시 호란을 맞아야 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끔찍했던 두 전쟁을 한 인생으로 맞은 것이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워낙 악몽 같던 시절이라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달리느라 그런 걸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두 전쟁엔 리더의 무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조와 인조는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도망가기 바빴다. 텅 빈 한양을 보며 백성들은 통곡했다. 왕이시여 왜 백성을 버리나이까. 겁이 많은 두 임금은 깊숙이 숨어 나오길 꺼렸고 분조를(위기시에 임시 조정을 만드는 것. 주로 세자가 이끌었다) 구성해 백성과 군사를 독려하게 했다. 역사엔 광해군으로 추락한 엉터리 왕이 왜란 당시에는 오히려 선조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명나라는 그런 선조를 은근히 꾸짖고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조선에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 무능한 임금의 권력욕은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는 권력욕이 많았다. 사실 욕심보다는 집착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은데, 확실히 두 사람은 옥좌를 뺏길까봐 두려워했다. 웃기지 않은가? 그 위에 누구도 없는 왕이다. 모든 권력을 쥔 사람에게 어떻게 권력을 뺏어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조선의 역사를 보면 왕권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며 신하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왕은 명예와 상징을 갖고 실권은 신하가 쥐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역대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본사의 허락 없이 계열사의 사장이 될 수는 없는 법. 명나라는 존재하는 내내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재가를 볼모로 원군을 요청하는가 하면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군사의 보급을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막대한 국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정통성 문제는 안 그래도 취약한 권력에 불을 붙이는 기름이 된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적자가 아닌 왕이었다. 여염집의 말을 그대로 쓴다면 서자가 유산을 물려받은 건데, 적장자의 권위만을 인정하던 당시의 세태 속에서 그 무시가 오죽했겠는가. 선조는 늘 이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기보다 인기를 얻는 장수나 신하가 있으면 시기하고 미워하다 죽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미워해 광해군을 폐세자 하고 뒤늦게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웃긴 건 그럴수록 명에 대한 사대는 심해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권위를 세울 힘이 없으니 외부의 큰 세력을 통해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대국의 황제가 인정한 사람이다. 믿을 구석은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때를 계기로 관념적이었던 사대가 실질적이며, 동시에 맹목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인조는 이보다 더한 경우였다. 애초에 왕이 될 수 없던 사람이 몇몇 사대부들과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다. 말이 반정이지(정의를 되돌린다) 엄연한 쿠데타다. 신하의 입장에선 자신이 세운 왕이니 자기가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신하들을 계속 곁에 두려면 부정부패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 나라의 곳간은 비고 백성의 고혈은 쭉쭉 뽑혀나간다. 그나마 인물이 남아있던(류성룡, 이항복, 이순신, 곽재우 기타 등등!) 왜란 때와는 달리 호란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팔도의 군사들은 남한산성 근처에 주둔하며 몸을 사렸다. 그들은 어쩌면 인조가 전쟁통에 그냥 죽어버리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왜란 때와는 달리 별다른 의병 활동도 없었던 것을 보면 백성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던 것 같다. 여진의 왕이든 조선의 왕이든 그놈이 그 놈이다.


정통성을 상실한 권력은 늘 이렇다. 이것은 비단 조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둘러보자. 해방 직후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를 받던 김구를 암살했다. 부정선거와 부패는 끝 모르게 이어졌고 결국 4.19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희망은 잠깐.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독재는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극을 낳았다. 권력을 찬탈한 사람들은 그 대가로 뭔가를 버려야 했다. 국민의 자유, 국민의 안전, 민족의 통일.


2020년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된 지 34년이 되는 해다. 누가 나에게, 이제는 우리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통의 권력을 가졌다 라고 자신에 차 외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선이 겪은 비극은 현대에도 만만치 않다. 수백 년 전의 악몽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걸 보면 이걸 숙명이라고 봐야 하나, 결국은 아무도 극복할 수 없는 흉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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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1, 2권 합본 리커버 에디션) -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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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곰탕을 끓이기 위해 미래에서 온 남자가 있다. 이름은 이우환. 고아였고, 부모의 존재는 전혀 모른다. 성년이 되어 고아원을 떠나올 때 원장이 딱 두 개의 이름만을 알려줬다. 이순희, 유강희. 우환의 부모였다.


이우환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까지 한 식당의 주방 보조를 했다. 배경은 2060년쯤의 부산이다. 세상은 대규모 해일로 초토화 되었고 부자들은 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이사 갔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바닷물이 빠진 소금 땅 위에 집을 짓고 산다. 해일은 두 번, 세 번 살만해지면 다시 돌아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잃었다. 그리고 소금 땅 위에 다시 집을 지었다.


가축은 사라진지 오래라 미래엔 쥐의 유전자를 조작한 괴물을 먹고 산다. 그걸로 곰탕 비슷한 걸 끓여 팔지만 아무리 해도 예전의 그 맛이 나지는 않는다. 우환의 가게 주인은 한때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곰탕집의 국물 맛을 떠올린다. 죽기 전에 그걸 한 번 재현해 보고 싶다. 주인이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어느 순간 우한의 모습이 그 추억과 겹쳐진다.


잦은 해일 이후 바닷물은 저 멀리까지 빠진 상태였고 그 한가운데에 정체불명의 씽크홀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걸 블루홀이라 불렀는데, 누가, 언제부터 그 구멍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걸 알아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힘 있는 자들의 부탁을 받아 과거로 향하기 시작한다. 주인은 우환에게 곰탕을 끓이는 법을 배운 뒤 재료를 사 가지고 돌아오면 식당 하나를 내 주기로 약속한다. 시간 여행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환은 주인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렇게 살다 죽나 거기로 가다 죽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착한 과거에서 시간이 꿈틀거린다. 주방 보조에 불과했던 이우환에게 미래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사건들이 차례로 도착한다. 그 중에는 이순희, 유강희와의 만남도 포함되어 있다. 우환은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지도 모른 채 두 사람의 사랑을 막으려 한다. 그 사랑의 결과가 고아 이우환이라는 불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부모의 삶에 엉켜버린 나이 든 자식의 시간. 끈질기게 방해를 해보지만 세상 일은 과거나 미래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철든 자식은 매일 새벽 어린 부모에게 곰탕을 내놓는다. 그들이 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는 걸 바라본다. 우환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몰려온다. 철없는 두 아이들은 우환의 젊은 부모,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곰탕 수업은 끝났고 아롱사태와 양지머리도 구해놨다. 이제 다시 가족 하나 남지 않은 미래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환의 흔들리는 마음이 새로운 톱니바퀴를 돌린다. 세 사람의 시간은 대격변을 향해 나아간다.


<곰탕>은 시간 여행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범상을 넘어선다. 제목답게 한국적인 맛을 추가해, 볼품없고 작은 개인이 거대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50년 전통의 원조 곰탕집처럼 푹 삶아 고아낸다. 별거 아닌 이야기에 깊은 맛을 추가했다. 읽는 내내 '새롭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카카오 페이지에서 연재한 탓인지 기승전결이 1회분에 맞춰 움직일뿐 큰 이야기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답답함은 단점이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은 곁가지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한데 꼬아 거대한 줄거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2부가 넘어가는 시점부턴 확실히 이야기에 속도가 붙는다. 지루함이 느껴질 때면 이 말을 기억하며 인내하기 바란다.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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