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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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썼다하면 기본적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이 많아 손에 드는게 쉽지않다. 그동안 적지 않은 책을 읽어왔지만 유명하다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초유명한 <총, 균, 쇠>는 아직도 내 서재에 없다. 서점에서 만지작 거리다가 빈 손으로 온 것만해도 수십 번은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람의 책은 막상 읽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역사의 본질이 이야기라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두껍기는 하지만 소설만큼 흥미진진한 대서사시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책상 앞에 정좌를 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출퇴근 전철 안에서 읽어도 무리가 없는 책이다. 손목이 좀 아프기야 하겠지만.


<대변동>은 국가의 위기와 극복 과정을 다룬다. 독특하게도 그는 극복을 위한 12가지 과정을 심리치료사들이 개인의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차용한다. 개인의 방법을 국가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게 가당한가?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을 이용해 저자는 핀란드, 칠레, 일본,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7개국의 위기를 특유의 비교 연구로 해체해 간다. 여기에 한국이 빠진 게 꽤 섭섭하지만(괜한 국뽕이 아니라 20세기에 독립한 신흥 국가 중 군사독재를 성공적으로 청산하고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선택 이유를 알고 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살아봤거나 특수한 관계로 맺어진 국가를(이를테면 아내의 국가) 중심으로 선택했다. 서술 방식도 '나의 친구들에게 ~를 물어보면' 처럼 학술서로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러니까 한 국가의 역사 연구를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묻거나, 내가 살아봤더니, 에 근거하여 일반화하는 것이다. 이 책과 저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비과학적 방식에 비난의 포화를 집중하겠지만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방식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선호한다. 역사는 결국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전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찾아낸다는 게 가능한건지 모르겠다. 강대국과 국경을 마주한 나라가 전쟁에 의해 초토화 된다면 긴 국경은 환란의 이유가 되고, 그 국경을 이용해 활발한 무역을 해 강대국이 되면 긴 국경은 성공의 요인이 된다. 객관적 분석이라 해봤자 결국 사후의 결과를 재구성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판단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주장은 반드시 수치로 증명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나는 저자의 원인 분석이 결과의 재구성이든, 성급한 일반화에 근거한 이야기에 불과하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꽤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내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정도는 아는 분별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분별력이 당신에게도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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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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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로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김언수의 단편집 <잽>이다. 김언수의 소설로는 <설계자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사실 <뜨거운 피>를 이 작가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설계자들>은 좋게 말하면 탈한국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작위적이다. 소지섭 주연의 영화 <회사원>을 봤다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반면 <뜨거운 피>는 그야말로 뜨거운 리얼리즘이 감정 밑바닥에 착 가라앉아 부글부글 끓는 소설이다. 끝이 가까워질 수록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잽>은 이 두 개의 소설들을 다양하게 나눠 담는다. <뜨거운 피>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설계자들>같은 것도 있다. 단편이라 스케일을 기대할 순 없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된다. 책장을 건너뛰며 원하는 대로 골라 읽어도 된다. 편식은 나쁜거지만.


<잽> 중에 최고의 소설은 <잽>이었고 거리는 역시 <뜨거운 피>와 가깝다. 이 소설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로 꿈을 강요하던 시절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어느날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탄성을 지르고 만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불려나와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한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주인공은 처벌을 납득할 수 없었고 반성문 쓰기를 거부한다. 대신 졸업할 때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테니스장과 그 옆 화장실을 청소하라는 노역을 받는다. 이에 분노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광고 포스터를 보고 '권투'를 시작한다. 잽!


김언수 소설에는 성공한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희망은 커녕 전구 불빛 만큼의 밝음도 없다. 완전히 깜깜한 지옥도라기보다는 칙칙한 회색 빛에 짓눌린 느낌이다. 차라리 세상이 끝나면 좋으련만 지긋지긋한 일상이 이유도없이 반복되는 갑갑한 기분. 아무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아무도 반복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눅눅한 공기를 가르며 잽 한 방이 날아온다. 이건 극복에 대한 희망도,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뭐랄까, 일종의 수긍 같은 게 아닌가 싶다.


패배가 인생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구질구질한 인생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게 된다. 질줄 알면서도 링에 오르는 이유? 중요한 건 이기고 지는 게 아니다. 지는 건 정해져있으니까.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 가는 것이다. 결국 질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풋워크가 가벼워졌다. 통통, 발 끝이 링 위에 닿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린다. '어깨에 힘을 빼고,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훔쳐오듯', 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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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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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봐도 나쁜 놈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사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인터넷 기사를 읽다보면 법조인과 대중의 온도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들이 넘쳐난다. 최근의 고유정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녀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다 결국 변호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고유정. 그녀를 변호하는 일은 그녀의 범죄 행위를 부인하거나 옹호하는 걸까? 변호사들이 그녀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들은 그저 돈에 눈이 먼 인간 쓰레기인 걸까?


모든 피의자는 재판을 받는 동안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리 범죄 사실이 확실해 보여도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심지어 피의자의 자백이 있어도 아직은 무죄다(과거 한국에는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러한 범죄 행위를 막기 위해 자백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우리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거추장스러운 법적 절차로 보일지 모르지만 형사 사건의 경우 원심의 유죄가 상고심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왜 그럴까?


도진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판사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나쁜 사람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벌 주는 거' 라고 한다. 형사 사건의 경우, 특히 살인이 벌어져 피의자가 극형을 면하기 어려운 경우 판사들은 '합리적 의심'이 추호도 발생하지 않을때까지 증거와 논증을 요구한다. 밤사이 둘만 있었던 것이 확실하고, 인근 마트에서 범행 도구를 구매하는 영상이 찍히고, 피의자가 토막 낸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나타나더라도, 외부의 침입자가 동일한 범죄 도구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순간 피의자는 무죄다. 범죄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건 DNA 정도가 유일하다. 강간 피해자의 몸 안에서 피의자의 정액이 발견되는 수준의 증거 말이다.


사람들은 판사의 '합리적 의심'이 지나치게 편집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난생 처음 방문한 놀이 공원에서 총기 난사가 발생했는데 그 범인이 내 첫사랑일 확률보다도 희박한 가정을 과연 '합리적 의심'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판결이란 결국 증거와 증언을 종합하여 고려한 판사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다. 대단히 부조리해 보이지만 법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오랜 기간 매우 타당한 이유에서 그런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 책에는 대중의 감정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판결이 내려진 형사 사건들이 등장한다. 오랜 기간 판사로 재직했던 도진기 변호사는 판결의 근거를 설명하는 동시에 이제는 조직을 떠난 자유인 답게 사법 체계의 한계와 비판을 덧붙인다. 변호사님의 소설에는 상당히 실망했던 나도 이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흥미로운 형사사건도 사건이지만 도진기 변호사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법과 대중의 괴리를 이토록 훌륭하게 메우는 책이 과거에 또 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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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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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참담함을 느끼는 책이 있다. 시장은 결국 제품의 질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책들. 이런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될까? 내 마음과 눈은 도대체 얼마나 뒤틀려있길래 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걸까? 차라리 눈이 멀고 귀가 닫혀 있었다면...


나같이 골방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토록 엉망인 책을 비판하는데도 오해와 비난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100만부나 책을 판 작가가 아무렴 너보다도 글을 모를까?(물론 100만부 판매는 말의 품격이 아니라 <언어의 온도>다) 그렇게 잘났으면 너도 직접 써봐라. 어떤 사람은 권위자의 반대 주장을 댓글로 남기기도 한다. 내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럴때면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든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일까?


<말의 품격>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0점 이상을 주기 힘든 책이다. 우선 문장. 읽어보면 생동감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과 고루함이 느껴진다. 바로 감각할 수 있는 생어대신 개념화된 '한자어'로 도배를 해놓기 때문이다. '피'라는 단어를 '혈액'으로 고쳐쓰고 '똥'을 '생리현상'으로 바꿔보라. 문장의 힘은 현저히 약해진다. 이런 표현은 신문 기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기자들은 글의 생생함이 자칫 객관성을 흐릴 수 있다는 공포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다. 생어는 글 속에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만 한자어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숨겨준다. 기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에세이에는?


이러한 습관은 작가의 이력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가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에는 저 유명한 유교 성인들의 말씀이 가득하다. 마치 대중 계몽을 위해 국가가 편찬한 지침서같이, 무엇이 '품격'인지를 일일이 정해놓는다. 물론 자기 책이고 자기 생각이니 이것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다. 내가 따지고 싶은 건 이런 글이 어떻게 '팔릴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두 번째. 책에 소개된 사연들이 전부 지어낸 이야기 같다. 작가가 실제 경험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본인이 가르치고 싶은 바를 전달하기 위해 가짜로 지어냈다는 느낌이다. 억지 감동과 억지 교훈. 사연을 읽고 있으면 어디선가 플라스틱 냄새가 진동을 한다. 공장에서 갓 뽑아온 공업용 사연들. 작가는 원래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니까 이런 비판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내가 따지고 싶은 건 이런 글이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는가' 이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이런 사연에서도 정말로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있을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그들을 비하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작가가 80세를 넘긴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문장과 내용이 모두 고루했는데, 사실 '고루' 라는 단어에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고루' 가 이 책을 읽고나면 나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세상을 살아왔기에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꽤 젊은 축에 속한 작가였다. 어떻게 이리 다른 세계를 살 수 있을까? 계속해서 말하지만 나는 작가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생각이 요즘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궁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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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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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테드창의 소설은 정말 지루하다. 놀라운 소재가 등장하지만 서사보다는 언제나 설명에 치우친다는 느낌이다. 문장은 설명의 도구일 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테드 창의 소설엔 밑줄을 그을 만한 문장이 거의 없다. 소설 전체를 도려해 갈피해 둘 필요는 있을지언정.


이는 그의 소설이 고도로 추상화된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곱씹어야 하는 소설은 거의 없다. 여기서 내용이란 속뜻, 즉 메타포가 아니라 정말로 내용 그 자체다. 원서로된 전공 서적을 읽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고작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이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니, 왠지 수지가 안 맞는 장사 같고, 소설을 손에 든 목적과도 어긋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숨>이 출간되자마자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를 괴롭힐까? 이번에도 망치로 머리를 맞는 것 같은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서사는 여전히 지루하고 시속 130cm의 달팽이처럼 기어가지만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이론을 훑으며 그 노력에 상응하는 지적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SF의 특징이 아니라 테드 창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경험을 얻기 위해 서점의 SF 서가를 기웃거린다면 대부분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험한 분류를 감행한다면, <라마와의 랑데뷰>가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대척점에는 로저 젤라즈니가 서 있다. 철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선 어슐러 르귄이 떠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르귄의 소설이 인간의 모순과 사회 문제의 메타포라면 테드 창의 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에 훨씬 더 선명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관계를 온전히 설명하기엔 미천하기 짝이 없는 내 SF 독서 경력이 한스러울 뿐이다.


나는 지금 막 일독을 마쳤지만 조만간 다시 한번 이 책을 꺼내들고 조목 조목 따져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시간 여행과 평행우주의 패러독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등 테드 창이 소재로 삼은 이론들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내 지적 능력의 한계가 뻔히 들여다보이지만, 완전한 이해만이 언제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온전히 몰입하여 주변을 잊는 것만으로도, 나는 대단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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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묘 2019-06-30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테드 창과 같은 분위기라면 같은 하드SF 작가인 그렉 이건 추천합니다. 번역된 게 고작 장편 하나에 단편 몇 개이지만 테드 창의 하드코어 버전같은 느낌이죠. 테드 창도 그렉 이건을 좋아한다네요.

한깨짱 2019-07-01 13:51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는 테드 창도 버벅이는데 그 보다 더한 하드코어라면 아찔하네요. 수련 좀 더 하고 옮겨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