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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콘
맥스 배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평점 :
말 한마디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얼핏 SF처럼 느껴진다. '너희들은 나를 왕으로 섬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왕이 된다. '너희들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부자가 된다. 유아적 상상력의 전형. 이런 일이 정말로 가능할까?
하지만 신화 시대에 '말'은 생각보다 하찮은 게 아니었다. 유대의 신은 모든 창조를 손이 아닌 '말'로 해냈다. '빛이여 있으라.' 신을 똑같이 본떠 만든 우리에게도 그런 '말의 힘'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그 믿음은 많이 퇴색됐지만 말은 여전히 마법과 과학 사이에서 줄타기를 이어간다. 어떤 식물학자는 과일에게 '예쁜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당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 다수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넌 할 수 있어!' 라는 마법의 단어를 외쳤음을 고백한다.
곰곰히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나? 말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말로 면접관을 설득한다. 정치인은 공개 연설과 TV토론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훔친다. 그 똑똑하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독일인을 모조리 똥멍청이로 만든건 다름아닌 해질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히틀러의 '말'이었다. <렉시콘>은 이런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소설이다.
'시인'들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온 말의 비밀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성향을 기민하게 파악해 그들이 어떤 말에 반응할지 판단하고 정확히 그 말을 던짐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룬다. 인간은 특정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문화로 정착시켜 세대를 넘어 유지하는데, 그 변화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이뤄진다. 하지만 사상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그 기간을 마법적으로 단축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들은 모두 이렇게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시간을 더 짧게 줄이면? 정말 말 한마디로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시인'들은 오랜 시간 그 방법을 갈고 닦아 완성시킨 사람들이다.
힘을 가진 단체가 언제나 선을 유지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꿈같은 일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을 기획했고 그 결과 호주의 한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실험에 사용된건 바벨탑이 붕괴하기 전, 그러니까 모든 인류가 유일하게 사용하던 단 하나의 언어였다. 그 언어로 만들어진 단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힘이 더 강력했고, '시인'들의 힘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동작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렉시콘>은 마법사같은 '시인'들을 내세워 판타지 액션 스릴러를 연출하지만 그 행위가 상징하는 바를 떠올리면 갑자기 섬뜩한 리얼리즘이 느껴진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아는 컴퓨터 알고리즘에 둘러쌓여 있다. 전세계를 사로잡은 가짜뉴스는 어떤가? 정론을 대표하는 언론과 미디어는? 당신은 당신의 선택이 온전히 당신의 마음 속에서 발현된 독창적 욕망의 결과라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는 수 많은 기업과 아티스트, 정치인, 언론인, 소설가, 인문학자들이 사실은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엔터테인먼트와 언론과 광고와 SNS, 책, 검색 및 데이터 분석 기술을 발전시켜 사람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욕망이 없다면 직접 창조해 우리 마음 속에 넣어둔다. 그들은 공감가는 말과 글, 호소력 짙은 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제품을 만들어 우리를 '설득'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다보면 <렉시콘>의 '시인'이 더이상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