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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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7세가 된 존 르 카레가 자신의 24번째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놨다. 냉전시대에 태어난 이 스파이는 21세기도 5분의 1이나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필드에서 암약 중이다. 50년 전 그의 적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었고,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해부터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그의 적이 돼야 할까? 오사마 빈 라덴은 CIA가 암살한 지 오래고 기세를 떨치던 IS는 궤멸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부활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평화의 시대. 여왕 폐하의 쇠락한 정보부는 칼끝을 잃고 방황한다.


<스파이의 유산>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속편이고 그 말은 우리의 스마일리와 피터 길럼과 짐 프리도와 코니 삭스와 리머스와 그리고 더러운 두더쥐 빌 헤이든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했던 피터 길럼은 이제 보청기에 지팡이를 짚는 노인이 됐다. 그는 평화로운 은퇴 생활을 즐기다 런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정보부 요원은 은퇴한 뒤에도 정보부가 원하면 어느 때든지 정보부를 위해 복무할 의무가 있다. 피터 길럼은 반역자가 아니었고 정보부의 부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연금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존 르 카레가 위대한 점은 그가 전직 스파이였기 때문도, 진짜같은 스파이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도 아니다. 존 르 카레를 위대한 소설가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특유의 리듬이다. 그의 문장은 천천히 걸으면서도 뚜렷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풀숲에 몸을 웅크린 채 숨죽여 먹이를 노려보는 사자처럼, 존 르 카레의 침묵은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과 언어가 된다.


런던에서 편지를 받은 뒤 피터 길럼은 과수원을 뛰노는 아내와 딸, 그리고 염소, 귀가 먹은 일꾼을 좇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안식의 장면과는 달리 머리 속은 이미 전쟁을 시작한다. 노련한 스파이는 런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한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오랫동안 진실을 덮어뒀던 검은 장막을 들춰낼 것 같다. 그 안에서 조지 스마일리와 피터 길럼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숨겨둔 과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정보부는 과거를 부정할 것이고 구더기가 들끓는 진실을 오롯이 피터 길럼의 손 위에 올려둘 것이다. 늙은 피터의 영혼과 육체를 적의 먹이로 내어주고, 정보부는 유유히 어둠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때는 피터에게도 그런 희생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대의를 위해 죽어나간 동료들이 어디 그 뿐이었겠는가? 하지만 사라지는 동료의 수만큼 커져가는 회의가 그를 괴롭힌다. 그 어떤 대의도 그토록 수많은 희생을 정당화할 자격은 없다. 아니, 그들이 믿었던 대의는 사실 단 한 명의 목숨도 감당하기 어려운 껍데기에 불과했다. 존 르 카레는 늙은 스파이들을 소환함으로써 그 대의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거래는 등가교환. 보청기 없이는 듣는 것도 어려운 노인을 건네준 대가로 지킬 수 있는 가치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스파이의 유산>은 존 르 카레가 그의 신도들에게 내려주는 마지막 축복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스파이들에게 최후를 고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늙은 스파이가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이 엮은 세계에 매듭을 짓는다. 다시는 이들을 못 본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이 책을 곱씹고 곱씹으며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되돌려 다시 추운 나라로 돌아갈 수 있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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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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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소설은 시간을 거스를수록 단맛이 강하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2019년에 재간한 것으로 실제론 그녀가 스물여섯에서 일곱 언저리에 쓴 소설이다. 무려 10년 전 이야기. 전설의 다케이코 이노우에도 슬램덩크 1권과 26권에선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정도 감안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쓰고 뭔가 묘한 불안감이 들어 다시 책을 펴보니 내가 <덧니가 보고 싶어>를 <지구에서 한아뿐>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위의 문장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유효하다는 게 놀랍다. 그녀의 10년 전 장편 소설 두 개는 이제 막 마법의 가루를 쓰기 시작한 초보 요리사처럼 같은 맛이 난다. 제육볶음과 뚝불을 먹었는데도 두 맛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정세랑은 <지구에서 한아뿐>의 지면을 빌려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p.224)를 다시는 쓸 수 없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이제서야 그렇다는 얘기고 당시에는 이런 걸 엄청나게 많이 쓴 게 분명하다. 정세랑은 현재의 인기 덕에 과거가 발굴되는 소설가다. 같은 시기에 쓴 두 개의 장편이 이토록 비슷한 걸 보면 당시 그녀의 인생을 솜사탕 같은 연애감정이 사로잡은 게 분명하다. 정세랑은 누구보다도 자기 생활을 소설에 눌러 넣는 걸 잘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연애를 해서라기 보다는, 현실에선 전혀 이루지 못한 연애의 환상들이 단맛으로 응축되어 이야기에 발라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현재로 소환된 과거는 늘 이런 위험에 처해 있다. 내 친구 중에도 25세 이전의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로 한 놈이 하나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우리는 현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처럼 정세랑의 시간을 거스르고 있는 사람들에겐 눈 앞에 펼쳐지는 과거의 민망함에 표연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녀의 소설을 고를 땐 반드시 '시간'을 따져봐야 한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정세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여자 주인공 재화와 그녀의 전남친 용기가 운명적 재결합을 하는 소설인데, 작중 소설가이기도 한 그녀의 문장들이 용기의 몸 구석구석에 나타나는 게 계기가 된다. 주인공은 모든 소설에 용기의 일부를 반영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반드시 그 인물을 죽인다. 지금껏 아홉 번이나. 딱히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자기도 모르게 소설만 쓰면 그런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재화는 세상의 남자를 딱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엄두는 나지 않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하루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다. 재화에게 용기는 후자에 속한다. 한편 용기는 재화를 정말 이상했던 여친으로 기억한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손을 잡아도 잡은 것 같지 않은 여친.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그녀의 '덧니'가 떠오른다. '안개 같은 얼굴을 뚫고 단단하게 올라오는, 보석 같은 덧니(p.50)'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인터넷에서 정세랑의 사진을 모조리 검색해 그녀에게 덧니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실패했다.


둘 모두 헤어짐이 대단치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켠엔 빠지지 않은 조각 하나가 남아있었다는, 그래서 우리는 사실 다시 만날 운명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세상에 운명 같은 사랑 얘기가 많은 이유는 사실은 그런 게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달달한 게 땡길 때도 있고 먹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단 걸 먹을 땐 언제나 이빨이 썩는 걸 조심해야 한다.


추신.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체로 정세랑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나는 '작가의 말'에 담긴 그녀의 생각을 존경한다.

'여전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간절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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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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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은 임씨 성을 가진 계장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임계장 이야기>는 공기업을 정년퇴직한 뒤 임계장으로 살아야 했던 60대 남자의 근무일지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이었지만 38년을 근무한 뒤에도 손에 남은 건 거의 없었다. 퇴직금은 오래전에 중간 정산해 집을 마련하는데 썼고 딸의 결혼 자금으로 저축한 돈 대부분이 들어갔다. 연금은 아직 '젊은' 탓에 미리 수령할 경우 금액의 손해가 컸다. 남아있는 주택담보대출과 *자녀들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저자는 임계장의 삶을 시작한다.


임계장의 삶은 고속터미널 배차원에서 시작해 아파트, 빌딩, 터미널 경비를 전전하다 과로사의 위기를 맞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는 중병을 얻고 나서야 그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는데, 서글픈 건 몸이 좀 괜찮아지자마자 스스로 그 지옥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임계장은 '치열하게 살다 보면 병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믿'으며(p.51) 다시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임계장의 육체를 무너뜨리는 게 열악한 근무 환경과 격무라면 정신을 무너뜨리는 건 부당 해고와 인격 모독이었다. 고속터미널 배차원에서 짤린 건 근무상 재해를 당해 '병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땐 꽃밭에 물을 주라는 자치회장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게 문제였다. 임계장은 호스가 고장 나 양동이로 물을 퍼 날랐는데, 그 모습이 자치회장의 눈에 반항과 태업으로 보였던 것이다. 빌딩 경비 시절엔 입주 회사 본부장의 사모에게 '호루라기를 불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교육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수준이 크게 다를 것 없는 동일 계층 안에서도 신분의 고하를 나누려는 독특한 잔임함을 보인다. 주민들이 엉터리로 해놓은 분리수거를 딸을 흘리며 다시 하는 임계장의 옆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는 주민이 '공부 안 하면 너도 커서 저렇게 된다'는 말을 꽂는다. 문 앞에 매일 쓰레기 더미를 쌓아놓는 주민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하니 '그런 건 경비가 알아서 치우라며 종량제 봉투 값을 눈 앞에 뿌리'고 사라진다. 이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위안을 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암으로 죽는 그 순간에도 우리 몸에는 암세포보다 정상 세포가 절대적으로 많다. 세상을 망가뜨리는 건 늘 소수의 악마들이다. 저자 조정진 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책에 실린 경험담은 대다수의 경비원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일만을 선별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끔찍한 일을 겪은 적도 많지만 그건 자신만이 경험한 '특수한 사례'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의 수 많은 노인들이 임계장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임계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임계장이 임계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열악한 근무 환경에 격무와 박봉, 인권 유린과 모독을 버무려 바퀴벌레도 물고 가지 않을 일자리를 만든다. 노인이란 세상의 하이라이트에서 벗어난 존재라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삶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간혹 이런 노인들의 비극이 미디어의 관심을 받지만 우리가 보이는 감정은 '공감'이 아니라 '연민'이다. '남의 일'을 구경하면서 비롯되는 감정인 것이다.


임계장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공기업에서 38년이나 근무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임계장이 됐다. 그가 임계장이 된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이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도 언젠가 임계장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임계장을 법률로 보호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아파트 관리비와 세금이 오르는 걸 아까워 해선 안된다. 사실상 그건 우리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전 직장에서는 아들과 딸, 두 자녀의 대학 학자금 대출금을 갚으라며 그러지 못하면 집을 압류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애초 학자금 지원은 감독관청을 의식해서 형식상 '대출'이라 했지만 그 실질은 회사 복지 기금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감사 과정에서 대학 학자금 무상 지원은 공기업의 과도한 복지에 해당해 부당하므로 모두 회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 담당자의 설명이었다(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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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양자 공부 - 완전히 새로운 현대 물리학 입문
김상욱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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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모두 원자로 구성되고, 원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 양자 역학이므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양자 역학을 알아야 한다.


<김상욱의 양자 공부>가 여타 다른 책과 비교해 돋보이는 점은 단연 난이도다. 어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그 학문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복잡한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쇄가 가능하다. 하지만 역사만 아는 걸로는, 어디 가서 얘기하기는 참 좋지만 그 분야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곁가지만 만졌다는 기분이 들면서 갈증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양자 역학의 역사와 핵심 이론을 잘 섞어 놨다. 내용은 크게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양자 역학의 태동에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사이를 훑으며 양자 중첩, 도약, 얽힘 등의 핵심 개념을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과학자들, 그들이 진행한 실험, 그리고 자기들끼리 벌인 유명한 논쟁들을 풀어놓는다. 2부는 현대 양자 역학에서 흥미롭게 다뤄지는 상세 분야들, 예컨대 양자 역학과 카오스 이론, 양자 컴퓨터, 양자 다중 우주, 마지막으로 생명체의 양자적 해석 같은 개념들을 소개한다. 이중 생명체의 양자적 해석은 다른 차원의 일로만 느껴지는 양자의 세계를 삶의 코앞까지 끌어당김으로써 어떤 전율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양자 역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개별 원자와 그 집합체의 행동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 원리는 우리가 음식을 먹고, 숨을 쉬고 에너지를 대사 하는 과정을 설명할 시동을 걸고 있다.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우리의 과학 교과서는 송두리째 바뀌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짜임새로만 본다면 1부가 압도적이긴 하다. 사실 1부와 2부는 양자 도약 수준의 괴리를 보여준다. 1부가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 이야기를 만든다면 2부는 한번 도약한 양자가 지속적으로 점프하며 각 장을 넘어다니는 느낌이다. 서로 연관성이 없고, 현대 양자 역학의 이슈를 가장 흥미로운 순으로 나열한 것 같다. 1부가 본격적인 양자 역학 공부를 위한 수련 과정이라면 2부는 심화 학습을 위한 양자 역학 카탈로그랄까? 1부에서 핵심 개념을 모두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제 2부의 주제 중 하나를 골라 퀀텀 점프를 하면 된다.


1, 2부가 모두 1부와 같은 짜임새를 갖췄다면 더 좋은 개론서가 될 수 있었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짧은 책 한권에 녹여내려는 취지는 이해가 된다. 후기를 보니 책은 다양한 지면에 소개한 칼럼들을 편집해서 탄생한 것이라고 하니, 애초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 쉽고 재밌다. 어쩌면 한국 과학자가 한국말로 쓴 양자 역학 교양서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환영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번역서가 아닌 양자 역학 책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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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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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처럼 빨갱이 공포증이 심한 나라에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치를 떨며 종북주의자들을 심판하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 앞에서는 물음표를 떠올린다. 어디선가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누구지? 적어도 한국에서 오독의 대상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공산주의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능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지배 아래 노동과 생산, 개인의 자유가 통제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꿈꾼 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제 개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사회였다(p.18)'. 혁명을 하려면 공산주의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2) 공산주의의 영어 단어 communism은 '공동체', '공유', '공공'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했다. 번역하면 '공동체 주의' 정도가 적당했겠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 학문이 다 그렇듯 어느 일본 사람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공산주의'가 됐다. 공동생산. 끔찍한 기숙사식 공장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이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살펴보자.


(4)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원가 1만원짜리 상품을 시장에서 1.5만 원에 팔았을 때 생산자는 '5천 원의 이윤이 났다'라고 말한다(p.32)'. 바꿔 말하면 이 말은 소비자가 5천 원을 손해 봤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법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가 무한정 반복되며 사회 전체의 이득은 0으로 수렴한다. 이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하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산과 소비 활동이 늘 일대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됐다가도 곧바로 다시 늘어난다는 가정은 가능하다. 예컨대 노트북을 한대 샀다고 하자. 구매 가격은 생산원가의 1.5배인 150만 원. 프리랜서인 나는 이제 노트북을 구매한 회사의 일을 하청 받는다. 비용은 실제 노동 가치의 1.5배인 150만 원. 하지만 이 비용이 지급되기 전까지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아니다. 비용이 입금되는 순간 0이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새로운 일을 맡게 돼 나는 영상 편집용 노트북을 한대 추가 구매한다. 이처럼 총 이득은 0으로 수렴했다가도 곧바로 늘어난다. 이 가정이 맞다면 부는 굉장히 역동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부는 늘 특정 집단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미루어보아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5)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생산과정'에서 나온다는 뜻이다(p.34)'. 생산자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원료, 기계 설비, 토지, 사무실 같은 것들이고 또 하나는 노동력이다. 전자는 그 가치가 정해져 있어 스스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소한다. 간혹 지대나 건물(사무실)의 가치가 상승해 이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통상적 영업 행위는 아니다. 실제로 그런 가치 상승만으로 경영을 지속하는 회사는 없다. 그렇다면 경영 지속을 위한 잉여가치는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밝혀낸 비밀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이 노동자가 노동으로 만들어낸 가치보다 작다'는 데 있다(p.35).'


(6) 8시간 노동 중 4시간은 우리 자신을 위한 '필요노동'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 '잉여노동'이다. 이것이 착취처럼 보인다면 심각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착취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착취 그 자체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착취가 절대적으로 '합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피착취자가 된다. 올해 연봉계약서에 동의를한 건 누구였지?


<김규항의 혁명노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해독, 그리고 재해석을 광범위하게 다루지만 생각의 편린들을 위에서처럼 짧은 호흡으로 쏟아낸다. 기승전결을 갖춘 긴 글을 원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김규항은 늘 혁명을 꿈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혁명을 실천해 온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달려 나가는 속도를 보면 그 꿈이 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 자본주의가 문제일까? 나는 '계층'이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쏟아질 오해가 두렵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 현실이므로 솔직하게 말해보려 한다. 하루하루가 치명적인 빈곤계층에게 내 말은 배부른 돼지의 역겨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계층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돌릴 핑계인 경우가 많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자아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개 실현해야 할 자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숨 막히는 경쟁 사회의 안개를 걷고 나면 우리는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온 여유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오랜 연습과 습관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없는 일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덜 쓰고 덜 입고 덜 마시고 덜 가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쓰고 더 입고 더 마시고 더 가지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거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망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욕망이 자본주의를 만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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