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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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조 14년, 후금의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조선에 군신지국의 예를 요구했다. 대의의 나라 조선, 기개가 높았으나 말이 더 높아 창검이 아닌 혀로 싸우는 나라. 조선의 임금이 8도에 임전태세를 명해 결전을 다짐하자 후금의 태종은 몸소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한다.  

북방의 칼바람에 단련된 철병에겐 조선의 겨울이 낯을 간지르는 미풍에 불과했었나 보다. 압록강을 넘은지 12일째, 서울이 점령 당했다.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그 길 또한 막혀 있었다. 사대부와 약간의 관군, 도처에서 모여든 향병을 이끌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둥지를 튼다. 개전 14일째,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화친을 거부했다. 임금의 성은은 높았고 야만국의 황제는 비천했다. 각도에 격서를(激書) 보내 분전을 촉구하면 지방 관리들이 관군을 끌어 모아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고 백성들은 
농기구 대신 창검을 들어 임금의 성은에 보답할 것이었다. 

싸움의 길은 생(生)의 길과 포개어져 있고 생의 길은 창검으로 으깨지는 병사들의 시체 위에 있었다. 사직은 백성의 피로 흥건한 그 길을 따라 영원히 계속되야 
할 터였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김상헌이 거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의란 삶 앞에서 무력한 것. 명나라는 운이 다했다. 옹색한 산성에 엉덩이를 비비고 눌러 앉으면 적들은 더욱 조이고 들어와 기어이 사직을 말려 죽일 터였다. 
싸움의 길은 사(死)의 길과 다름 아니고, 사의 길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다. 사직은 그 치욕을 견디고 일어나 끝까지 삶을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치욕과 맞바꾼 땅 위에선 백성들의 생명이 다시 시작될 것이고 무너진 성벽이 새롭게 세워질 것이며 마침내 임금의 성은이 예전처럼 온 나라에 흘러 넘칠 것이었다. 


영의정 김류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의 형식 안에 패배의 내용을 채워 나갔다.' 병사들의 추위를 막기 위해 보급된 광주리를 빼앗아 수성에 필요없는 말을 먹였다. 주린 말들은 그 광주리를 풀어 끓인 
여물을 먹고 죽었다. 죽은 말의 각을 떠 병사들을 먹였다. 목숨을 보전한 병사들이 성첩 위의 칼바람을 맞고 주린 말의 뒤를 따라갔다. 말이 병사를 물고 병사가 말을 씹고, 죽은 말의 영혼이 죽은 병사의 넋을 태우고 달렸다. 

김류의 말은 높디 높은 조선의 말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김류의 말은, 살자는 건지, 죽자는 건지, 성문을 열자는 건지 아니면 닫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출처: Flickr.com, Patrick Houlihan>

 

김상헌과 최명길과 김류의 말은 서로를 밟고 타넘으며 말의 장벽을 세웠다. 편전 위의 보료에서 왕의 시야는 말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장벽 너머에 얼마나 많은 적이 웅크리고 있는지 격서를 받은 장군들이 군사를 이끌고 올라오는지, 삶의 길이 싸움의 길에 있는지 아니면 지키는 길에 있는지, 사는 것이 죽는것과 정녕 다른지, 실상은 그 둘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인지 왕은 알지 못했다. 

눈먼 왕과 충성스런 사대부들이 말로 쌓은 제단 위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동안
, 곡기 없는 뱃가죽은 헛구역질로 터졌고 칼날 같은 겨울 바람이 터진 뱃가죽을 찢었다. 조정이 피난 오기 전, 대장간의 풀무질이 쇠를 달구고 장돌뱅이가 닷새 장을 가득 채우고 동네 개들이 낯선 이들을 향해 짖던 마을,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그 생명의 숨결이 나랏님이 오신 뒤로 잦아 들고 있었다.

왕은 나라의 뜻을 행하고 나라는 백성의 뜻을 받는 것인데, 백성이 없는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왕은 성문을 열고 황금빛 일산 아래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술 석 잔을 내렸다. 왕은 술 한 잔에 세 번씩, 아홉 번 절을 올렸다.
 

 

 

김훈의 글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소설가를 많이 봐왔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최고의 인간 백정을 꼽으라면 그건 김훈이 되지 않을까. 나는 황석영의 담담함을 좋아하고 박완서의 소소함도 사랑하지만 순수하게 문장만으로 정신을 잃게 되는 경우는 김훈의 소설을 읽을 때 밖에 없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런게 소설인가, 이렇게 써야 소설가가 되는가'하는 생각에 이제 막 잎을 낸 글쟁이의 꿈이 시들고 아득히 멀어보이는 그 길의 처연함에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만다. 


남한 산성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은 역사 소설이다. 생각해 보니 그는 역사 소설만 쓰는 것 같다. 김훈이 기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집요하게 사실을 수집하고 진위를 날카롭게 가려낸 뒤 솜씨 좋게 재단했던, 몸에 깊게 배인 옛 업의 습관은 그를 역사와 소설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을 지도 모른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만을 하고 살 때 가장 밝게 빛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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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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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아멜리 노통의 작품 중 최고다. 나는 '제비 일기' 따위, 그녀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는 문제작까지 읽은 바이므로 이 말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노통의 소설엔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과 순수한 허구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둘 사이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심한 차이가 있는데 주로 전자는 뛰어난 작품이고 후자는 짬뽕 국물을 뒤집어 쓴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흉물스런 이야기 들이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바로 이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채로 노통의 필모그래피를 반짝 반짝 빛내고 있다라고 하는 얘기는 이젠 너무 
구차한데다가 상투적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더 이상 문장을 늘였다간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버릴까봐 찬양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소설의 원제는 '튜브의 형이상학'이다. 노통의 특기, 과장의 미학이 엿보인다. 내용 또한 자신을 신이라 믿는 어린애의 얘기다. 

이 아기는 확실히 다른 아기와는 다르다. 우선 울지 않는다. 울음은 아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그만한 나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이다. 울음의 부재는 곧 관계의 부재고 관계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다. 아기는 고심끝에 결론을 내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신이로구나.


지고의 숭배 대상이자 유일한 신인 아기가 하는 일은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는 일이다. 먹기만 하면 싸는걸 보니 입에서 똥구멍까지 수직의 튜브로 연결되어 있는게 분명하다. 아기는 고심끝에 신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신은 튜브다.

두 살이 넘어갈 즈음, 분노한 아버지가 독생자를 내려 주듯 아기는 힘차게 울며 자신을 낳은 인간들과 소통을 시작한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멜리 노통.

여차저차 인간 세계에 발을 담갔지만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곧바로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머리 속에는 이미 모든 단어가 들어 있었지만 갓 두살이 넘은 아이가 유창하게 불어를 - 노통은 벨기에 사람이고 벨기에 사람은 불어를 쓴다 - 구사하면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서린다. 그래서 밤낮 울기만 했다. 2년 동안 철저히 침묵을 고수한 아이가 입을 열자마자 울음만 쏟아내니 오히려 부모들의 마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신의 뜻을 헤아릴줄 모르는구나.

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한 신의 입으로 친할머니가 공수해온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가자 뚝! 울음을 그쳤다. 그리곤 아직 모든 사람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지만 할머니와 초콜렛에게만큼은 사랑을 약속했다. 신이 내린 첫 번째 구원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인간에게 신의 언어를 허락했다. 생각만큼 발음이 잘 된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엄마, 아빠를 말 할 수 있었다. 노통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오빠 만은 예외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저분하고 교활하고 난폭한 작은 인간. 노통은 오빠를 저주하는 의미에서 결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보모 니쇼상과의 관계는 노통의 신놀음에 불을 붙였다. 니쇼상은 일본인 답게 고용주에 대한 복종을 철저히 실천했다. 그녀는 어린 신을 숭배하는 유일한 신도였으며 니쇼상의 헌신적인 순종으로 이 작은 신은 유일자로서의 자각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곳에 있다. 모든 이의 숭배를 받으며, 왼손에는 꺼지지 않는 생명을 오른손에는 불멸의 영혼을 들고,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친할머니가 죽었다.

두 살 짜리 아기의 머리 속엔 삶만이 유일한 세상이다. 죽음이라는거,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전광석화, 죽음이 깨어나면서 뿌리는 일말의 불안감이 노통의 마음 속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불멸의 믿음'을 끌어내렸다. 존재의 '영원함'은 죽음의 포로가 되었다. '영원함'은 거짓말로 판명되었고 거짓말쟁이 존재는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채 삶 속으로 나아갔다.  

 

 

 <출처: Flickr, Julius Koivistoinen>

 

죽음이란게 있다면, 결국 존재가 그리로 나아가도록 지어진 거라면, 그렇다면 삶의 족적이란, 살아가려는 모든 노력이란 결국 '에둘러 돌아가는 길'에 지나지 않은가. 죽음은 존재의 필연. 나는 내 존재를 구차하게 연명함으로써 죽음에 저항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어린 신은 어느 8월말 오후, 집 앞 마당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진다. 고의였는지 발을 헛디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못 위로, 뒤통수에서 터져나온 새빨간 피를 흘리면서도 노통은 삶을 구걸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카시마상이 서 있었다. 또 다른 보모이자 신의 적대자였던 카시마상.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신을 오로지 침묵으로 마주하며 그 자살에 소리없는 축복을 전하고 있었다. 

니쇼상이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노통을 꺼내들고 물기를 닦으며 도와 달라고 소리친다. 눈 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스믈스믈 삶으로 흡수되더니 어느덧 자취를 감춰 버린다. 

 

 

<출처: Flickr.com, Cape Cod Cyclist> 

 

신과 세상, 실존과 불안의 의미를 어린 아이의 심리 속에서 풀어내는 아멜리 노통의 글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감탄을 했다는 말로 감상을 적는다면 노통에게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나에겐 이 소설을 평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랴 애꿎은 단어로 불필요한 찌꺼기를 남기느니, 오늘은 이대로 마치는 수 밖에... 아무쪼록, 이해해 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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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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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유명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책을 사봤다. 필사를 할 생각 이었다. 나에게 글쓰기와 생계의 길은 다르지 않아, 하나로 포개져 있으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의 책을 베껴 문장의 힘을 키우고 나아가 생활의 방편을 마련해 볼까 해서였다.

서문을 읽었다. 기가 막히더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읽던 책을 관두고 이것부터 집어 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맛있는 음식은 제일 나중에 먹어야 희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을 읽고는 실망했다.  

스티븐 킹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 상'은 489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일까? 단편집 치고는 다소 묵직한 감이 있다. 그러나 책의 재미는 두께에 반비례한다는 명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떠올리고 이 책으로 증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을 읽어도 남은 페이지 수가 줄지 않아 자주 뒤 쪽을 들쑤셨다. 왜 이야기가 끝나지 않지? 책을 읽는 동안 솟아오르는 질문과 싸우느라 문장을 파헤치고 재미를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장바구니에서 '하'권을 삭제했다.

이 책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안개'처럼 200 페이지가 넘는 대작도 있고 '카인의 부활', '호랑이가 있다'처럼 아주 짧은 소품도 있다. 특이하게는 '편집증에 관한 노래'같은 긴 시도 있지만 사실 다 고만고만한 중편들이다.

우선 '안개'에 대해 말하자면, 작품이 너무 길다. 특히 도입부는 대하 역사 소설을 뺨칠 정도로 길다. 정체 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뒤덮어 사람들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인데 이 안개가 아주 기어온다. 마을을 뒤덮기 까지 수십 시간이 걸리는 듯 하다. 당연히 안개가 조장하는 불길한 서스펜스가 아주 천천히 전해진다. 주인공 일행이 대형 마트에 고립되고 난 뒤부터는 다행히 긴장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이 또 엉성하다.   

 

<B급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 

 

'토드 부인의 지름길'이나 '뗏목'같은 경우는 소재에 있어서는 참신한 맛이 있지만 긴장과 서스펜스, 염통이 쫄깃해지는 박력과는 거리가 멀다.

'원숭이'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진부한 소재를 택하고 있고 '카인의 부활'도 컬럼바인이나 버지아텍 총기 난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오늘날에는 쇼킹한 맛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소설도 마찬가지, 느슨한 플롯의 연속으로 지루함이 범람하고 졸음이 몰아친다. 

머리 끝까지 빨려 들 것 같은 정체불명의 흡입력. 독자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환각제. 킹의 소설에선 이런걸 기대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M.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같은 치밀함이 이 소설엔 없었다.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 보니 그 해답이 나온다. 이 소설가는 플롯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상황에서 출발하는데 특정한 상황 속에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몰아 넣고 스스로 행동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이 쓰기의 전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은 애초에 완벽한 사기를 설계해 놓고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구라꾼이 아니라 입심 좋은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출처: Flickr.com, geoftheref>
 

소설에 대한 판단은 직접 읽어보고 내려야할 일이지만 꼭 집어 추천하자면 글쎄, 그럴만한 작품은 없다. 혹자는 일 방문자 8명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남자가 3억부의 사나이를 평가하는 것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이 그런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냉철한 논리라도 아무리 높은 이름값이라도 '어쩔 수 없는 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중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지구 위에 어쩔 수 없어 하는 또다른 인간들이 3억권이 넘는 소설을 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웬지모를 안심이 된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소설가 한 명이 어두운 다락방 위에서 쥐와 거미를 위해 글을 써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혹평만 쏟아냈으니 다른 얘기를 몇 개 더 해야겠다. 킹은 성공한 소설가지만 에세이를 썼더라도 크게 성공했을 사람이다. '유혹하는 글쓰기'나 그의 서문을 읽어 보면 이 사람이 글쓰기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킹은 기본적으로 센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머 감각도 풍부할 거고 아마 말도 엄청 잘할 거다. 그건 대화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소설가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독특한 소재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이 소재와 상황들은 명왕성의 당근이나 마그마 속의 우동처럼 인위적인 독특함이 아니다. 그의 공포는 우리 삶의 아주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낡은 인형, 매일 아침 보는 안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 날락하는 화장실. 그것들이 순간 낯선 것으로 변하며 그 안에서 공포가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덧 나의 집이 그리고 나의 장난감이 스믈스믈 본모습을 드러내며 그 섬뜩한 입김을 무방비의 살갗위로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대중 소설의 시비는 판매 부수가 내려주는 것이다. 대중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문학성과 주제와 플롯에 앞서 '대중을 거스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티븐 킹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소설은 길이 길이 인세를 벌어 들여 출판사와 후손들과 어딘가에서 꿈을 키우고 있을 어린 소설가를 살 찌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남자,

역시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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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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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3억 부 이상의 책을 팔았다. 빗자루를 타고 나타나 코끼리가 건초를 먹어 치우듯 팔아치운 '해리포터'만 없었다면 스티븐 킹은 말 그대로 '킹'이 됐을 거다. 비록 일등의 자리는 호그와트의 마법사 도련님에게 빼앗겼지만 공포, 스릴러 분야에선 역시 이 남자가 '킹'이다. 피와 시체가 꽃처럼 장식되고 으깨진 두개골이 카펫으로 깔리는 세상에선 이 남자가 먹어준다는 말이다.  

킹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어린 시절 부터였다. 재밌게 본 만화책을 베껴 최초의 소설을 썼다. 엄마가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전말을 알게 되자 다음 부터는 창작 소설을 쓰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킹은 그 후로 꼬박 꼬박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글을 읽었고, 환호했고, 지갑에서 푼돈을 꺼내 킹에게 주었다. 칭찬이 킹을 춤추게 했다.   

 

 

미국의 하류층으로 태어나 홀 어머니 밑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킹은 영리했다. 주립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그 곳에서 아내를 만난다. 공부도 했겠지만 건진건 사랑이었다. -  글을 쓰는 사람에게 둘 중에 뭐가 나은지는 나중에 가 봐야 안다. -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세탁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썩은 식탁보와 음식물 쓰레기, 피와 병균이 우글거리는 병원 빨래와 싸웠다. 기진맥진한 몸을 임대용 트레일러 위에 뉘였고 그 안 구석, 작은 세탁실에 쭈구려 앉아 소설을 썼다. 삶의 무게가 감당키 힘들어 교직을 구했다.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시간은 반대였다. 수업을 하고 시험을 보고 집으로 시험지를 들고와 빨간펜으로 이리 저리 채점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날 땐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서랍 속에는 쓰다 만 원고가 너댓개 있었으나 완성은 무지개 너머 머나먼 정글이다.

글쓰기는 시간이다. 멋진 글을 쓰고 싶으면 일단 엉덩이를 붙이는 방법부터 익혀야 한다. 3억부의 사나이 킹도 그걸 깨달았다. 그는 정해놓은 시간에 적합한 장소에 앉아 - 그게 변기 위가 됐든 한적한 커피숍이 됐든 - 정해진 분량을 쓰고야 마는 인내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야 편집자가 보내오는 '거절 편지'에 친필 메모가 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꿈 꾸는 자가 태어나면 다른 곳에는 비웃는 자가 태어난다. 이것 저것 지어낸 이야기를 신이나 떠들고 있으면 '참 기발한 생각이네'라고 적당히 대꾸한 뒤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어렵게 꺼낸 말 속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면 '열심히 해보라'는 말과 함께 '언제 철들래'하는 표정이 기습을 한다.

주변 사람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꼬깃 꼬깃 접어온 종이에 개발새발 그려 놓은 글을 보고 있으면 그 곳에 정말 길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읽기와 쓰기는 정말 더디게 성장한다. 싹이 돋는걸 봐서는 도무지 언제 꽃이 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글쟁이에게는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킹의 아내 태비처럼, 구겨 버린 초고 속에서도 글을 이어갈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말이다.   

"나는 폰드 스트리트의 셋집 현관이나 허먼의 클래트 로드에 있던 임대용 트레일러의 세탁실에서 소설을 썼는데, 만약 아내가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면 나는 용기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비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놓고 당연시할 수 있는 요소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에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중략)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9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설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사람이다.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꿈은 이어진다.

킹은 이 밖에도 단어를 연마하고, 초고에서 10%를 삭제하고, 대화문을 생생하게 쓰고, 부사를 쓰지 말고, 창작 잡지를 구독하고, 저작권 대리인을 알아보고, 출판 시장을 조사하여 자신에게 어울리는 출판사에 투고할 것을 충고하지만 중요한 얘기는 이미 앞에서 다했다.

사람들은 쓰기 전에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 소설가의 작법서는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도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글을 쓰기 전이었고 한 번은 쓰기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책은 쓰기 전에 읽는게 아니다. 쓰고 난 뒤에 읽어야 한다. 행동이 나가지 않으면 생각은 구름 위에 노닐뿐 종이 위로 내려와 글이 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는 필사적으로 따라온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그걸 깨달았다. 

  
 
   
<출처: Flickr.com, joshjanssen> 
 
 
글을 쓴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나는 안다. 나와 당신이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꿈을 향해 전력을 다하고 싶어도 우리의 인생은 좀처럼 여유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내가 특별히 뭔가를 잘못했거나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달려드는 사람일 수록 고통과 좌절, 멸시와 비난의 철벽에 겹겹이 둘러 쌓여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기어이 그 꿈을 포기하게 만든다.

1973년 스티븐 킹은 연봉 6,400달러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그 해 장편 '캐리'를 2,500달러의 선인세로 계약했다. 몇달 뒤 '캐리'의 보급판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리자 킹은 할 말을 잃었고 태비는 낡아빠진 트레일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캐리의 성공엔 분명 운이 따랐다. 그러나 그 운은 캐리 이전에 소멸한 수 많은 원고를 밟고 왔다. 그걸 모른다면, 우리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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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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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토기조시(옛 이야기)는 이례적인 작품이다. 다자이의 필모그라피에 있어서 이 소설만큼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흐르는 작품은 없다. 실패와 우울의 물결로 과잉된 문장들은 이 책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옛 이야기는 번안 소설이다. 일본에 전해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들을 다자이 식으로 옮겨 썼다.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동경에 쏟아지는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앉아 있으면서, '옷차림도 초라하고 용모도 어리숙하게 생겼으나, 원래 허투루 볼 수 없는 사람인' 아버지(다자이)는 불안에 떠는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아비의 마음 속에선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 참을 수 없었다.

다자이의 삶은 어긋나 버렸지만 글쎄, 이 남자도 따뜻한 햇볕 아래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면 작가가 평생을 흠모했던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나 일본의 국민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조차 뛰어 넘어 백편이고 이백편이고 재미있는 소설을 줄줄이 써내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소설의 중기에 해당하는 이 작품엔(비교적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유지한 시기) 작가가 지닌 진정한 능력, 소재를 재해석하는 기발한 착상과 문장을 비트는 천재적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혹부리 영감


혹부리 영감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혹부리 영감이 맞다. 노래 실력이 혹에서 나온다는 깜찍한 할아버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는 술꾼이다. '고독해서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니까 식구들이 싫어하여 자연스레 고독해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머 없는 아들과 타박만 하는 아내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쓸쓸해진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밤늦도록 춤을 췄다. 그러다가 도깨비를 만났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시는바와 같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할아버지다.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에게 혹을 떼주고 왔다는 말을 듣자 이 할아버지도 욕심, 아니 희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밤 깊은 숲 속 오묘한 달빛이 비추는 나무 사이로 들어가 도깨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깨비들이 모여 술판을 벌였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무대 위에 올라 철부채를 펼쳐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췄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은 노래까지 연달아 열창했다. 도깨비들은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 사람은 귀신일지도 몰라.'

그 말은 물론 할아버지의 춤과 노래가 끔찍했다는 얘기겠지.

'아아 지금 가시면 안됩니다. 이 혹이라고요 이 혹에서 춤과 노래가 나옵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그 혹이라면 일전에 맡아둔 게 하나 있지. 그 사람에겐 꽤나 소중한 물건인듯 하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자 가져가게나. 대신 그 춤만은 추질 말어. 술기운이 싹 가신다니까 혹은 내어줄테니 부탁이야 제발 놔 줘.'

참으로 엉뚱한 도깨비다. 그러나 그 엉뚱함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삶에 짐 하나가 늘어 버렸다.

옛날 이야기란 보통 권선징악, 나쁜 사람이 벌을 받기 마련인데 이 이야기에는 나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웃집 할아버지의 삶은 비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게 바로 '삶의 희비극' 이랄까?

할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예의 절박한 사람이 그러듯, 긴장한 탓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한 춤과 갈라진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 뿐이다. 



우라시마 이야기


우라시마 이야기는 - 주인공은 우라시마 타로 - 거북이를 살려준 은혜로 용궁에 놀러갔다 왔더니 세상은 이미 몇 백년이 흐른 뒤여서 가족도 집도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단지 우라시마 타로라는 이름만이 생소한 거겠지. 그러나 이 우라시마 타로는 거북이를 구해줄 만큼 정이 많으며 양 볼엔 쑥쓰러운 웃음이, 이마엔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찼던 따뜻한 남자가 아니다. 다자이의 손에 붙들리자 그는 쩨쩨하고 소심한 남자로 변해 버렸다. 

  


 


우라시마는 동네 아이들에게 푼돈을 쥐어주고는 거북이를 구해냈다. 거북이는 우라시마를 타박한다.

"겨우 5푼이라니. 너무했어 자네의 쩨쩨함엔 두 손 다 들었어. 하지만 그때의 상대가 거북이와 아이가 아니고, 이를테면 우락부락한 어부가 병든 거지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당신은 5푼은커녕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냥 낯을 찡그리며 서둘러 스쳐 지나갔을 게 틀림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는 은혜를 갚으러 올라왔다. 쩨쩨한 인간과는 다르니까. 아무쪼록 믿어 주시게. 그러나 우라시마는 믿지 못한다.  

거북이가 용궁으로 끌고가 인신매매라도 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호쾌한 선의에 혹하면서도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 - 그나마 다행이지 - 나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를 따져보아야 하는 - 이건 참 추악해 - 인간의 슬픈 숙명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이 소설에서 거북이의 힘은 대단하다. 거북이는, 본능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대범한척 하지만 쉽게 남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카치카치산


카치카치산은 너구리가 주인공이다. 심했다. 너구리라니. 더군다나 이 못생긴 너구리가 앙증맞은 토끼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참으로 역겹군. 손사래를 치며 책을 덮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언젠가 너구리가 산 기슭에 살고 있는 늙은 부부의 손에 잡힌 적이 있었다. 할멈은 너구리탕을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너구리는 가마솥으로 끌고 가는 할머니의 손을 카칵 할켜 버리곤 도망쳤다. 너구리로선 당연한 일 아닌가. 상대가 할머니고 부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로부터 온 힘을 다해 탈출하지 않는 다면 그걸 제대로된 너구리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토끼의 생각은 달랐다. 공교롭게도 토끼는 할머니의 친구였다.

토끼가 너구리를 증오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우선 냄새가났다. '족제비 똥으로 버무린 지렁이 마카로니'를 먹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 또 어지간히 못난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동네 마트를 다니는 건 꿈도 꿀 수 없어. 생긴것도 어지간해야 참고 살아보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너구리는 가진게 없었다. 천애고아. 무일푼.  

안타깝다, 못생기고 배 나온 위인이라도 번쩍 번쩍 금화 한 자루라면 토끼 아니라 그 이상가는 미인이라도 문제 없을 텐데. 그러나 너구리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답답할 정도로 둔했다. 그러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너구리야 이렇게 웃고 있으면 곤란해>  

그리하여 토끼는 너구리의 몸에 불을 질러 보기도 하고 화상으로 드러난 맨살에 고춧가루를 발라 보았다. 그래도 너구리는 죽지 않았다. 손을 휘둘러 쫓아낼 수록 더욱 집요하게 달라 붙는 파리떼처럼 토끼를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토끼는 호수로 놀러가자고 너구리를 꾀어 낸 뒤 진흙배에 태워 너구리를 침몰 시킨다. 그제서야 눈치챈 우리의 너구리.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발악해 보지만 토끼의 노가 너구리의 머리를 때린다. 따악, 따악! '그러더니 쏘옥 가라앉아 잠잠.'

잘못한건 너구리야. 적어도 아파트와 자동차 정도는 있어야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어. 못됐다. 양심이 있어야지. 야야 이러지 말자, 당신이 인간 세상에 환생한 너구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거야? 너구리를 그렇게 몰아 세운다면 젠장...

'반한것도 잘못이냐?'

 

혀 잘린 참새


참새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다. - 이 책엔 할아버지가 참 많이도 나와. 어쨌든 이 참새는 당돌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참새. 할아버지가 책을 보고 있으면 책상 위로 폴짝, 겁도 없이 뛰어 올라 고독한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준다.

그런데 부부가 문제다. 남자는 책만 보고 사는 한량. 여자는 '할아버지의 생가에서 부리던 몸종이었으나, 병든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떠 맡았다가 어느 틈에 그 생애를 떠맡게 되고 말았다. 배우지 못했다'.

글 깨나 읽는 남자는 예상 외로 무능력하다. 그런 주제에 거드름은 빼놓지 않는다.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한다. 할머니는 처음엔 약간 경외하는 마음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을 거다. 그러나 10년, 20년 초가집은 스러져 가고 젊은 여자는 생활에 시들어 이제 할머니가 됐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공자~왈이다.

이 할아버지, 사는 동안 할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걸어줬을리 만무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묘령의 여인(참새)과 희희낙락 수작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도대체 누구랑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냐! 여자가 분명하다. 어디다 숨겨 뒀느냐.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할머니의 신세한탄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 할아버지, 누구긴 누구야. 이 참새와 얘기 중이라네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 뿐이다. 드디어 할머니의 뚜껑이 열렸다. 할머니는 성큼성큼 다가가 참새의 입을 열고 혀를 뽑아 버렸다. 아기 참새는 깜짝 놀라 대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다음 날 부터 할아버지는 참새를 찾아 눈 덮인 대나무 숲을 헤맨다. 하루는 나뭇 가지에서 떨어진 눈 덩이에 맞아 잠깐 실신했는데 눈을 떠보니 참새의 나라였다. 그 곳에서 아기 참새와 애닳은 재회를 한다. 참새는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남자, 짐짓 모른채 하고 값 비싼 물건 한 두개 가지고 나왔음 할머니도 그리고 자기도 형편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을텐데 기어이 빈 손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보다 못한 참새가 비녀를 뽑아 할아버지에게 건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아버지는 눈 밭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벼이삭이 쥐어져 있다. 이 겨울에 벼이삭이라니. 할아버지는 기이하게 여겨 붓꽂이에 꽂아 두었다.  

이 벼이삭이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불쌍한 할머니 또 다시 남자를 추궁하네. 하지만 참새 나라 그리고 새의 선물, 기가막혀 말도 나오지 않아.

"그렇담 내가 직접 대나무 숲으로 가보겠어요."

"아무래도 선물이 탐나는 모양이군."

할아버지가 비수를 꽂는다. 말이 나온 김에 할머니는 눈 덮인 대나무 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뒤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쓸쓸한 엔딩이다. 코 끝이 쌩해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듯한... 아니아니 집어치자 이런 얘기 먹혀들지 않아. 나로선 도저히 이 느낌을 표현할 능력이 없어. 그러니 바로 여기에 본문을 옮겨 본다.

'해질녘, 무겁고 큼직한 옷고리짝을 짊어지고 눈 위에 엎드린 채, 할머니는 싸늘해져 있었다. 옷고리짝이 하도 무거워 몸을 일으키지 못해, 그대로 얼어죽은 듯하다.

옷고리짝 속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다. 이 금화 덕분인지 어떤지, 할아버지는 그 후 머잖아 관리가 되어 이윽고 한 나라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참새 의원님이라 부르고, 이 출세 또한 그가 예전에 참새한테 보여 준 애정의 결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어렴풋이 쓴웃음 지으며,

"아니, 마누라 덕분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고생만 무지 시켰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한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모자라고 서투른, 아무래도 '사랑받는다'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 들이다. 내가 만약 이 리뷰의 끝, 바로 이 문장에 '혹부리 영감과 우라시마 타로와 너구리와 그리고 눈 밭에 쓰러져 죽은 할머니가 누구냐,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라고 쓴다면, 아... 참으로 재미없는 리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이 글에서 색깔을 달리한 부분은 모두 소설의 문구를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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