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도서관 - 세계 오지에 3천 개의 도서관, 백만 권의 희망을 전한 한 사나이 이야기
존 우드 지음, 이명혜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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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도서관,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재미라고 하면 감동, 웃음, 스릴, 공포 따위를 말하는 것일 텐데 당연히도 히말라야 도서관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여지껏 읽은 에세이 중에서는 첫번째로, 모든 책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저로 꼽습니다.

책의 저자 존우드는 한때 자본의 화신이었습니다. 돈으로 만든 배를 타고 지옥으로 항해하는 자본의 왕국 아메리카 출신이며 그 배의 선장이라 할 수 있는 Microsoft의 마케팅 이사이기도 했습니다. 직장을 관두기 직전에는 아시아 지역 마케팅 책임자로 승진해 베이징으로 발령이 났는데 바로 중국 인민들의 배속에 정품 Windows를 쳐넣어 돈을 쥐어짜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존 우드를 악인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단지 Microsoft라는 거대한 조직의 구성원에 불과했으니까요. 인간이 단체에 속하게 되면 사회 현실과 밀고 당기는 윤리적 긴장감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일명 '어쩔 수 없었다'라고나 할까?  

영화 '더 리더'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성당에 갇힌 포로들을 끝까지 지켜 모두를 불타 죽게 만든 것도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그저 포로들을 감시하는 책임자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느슨했던 긴장이 팽팽해지고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이 다시금 눈뜨게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압도적인 현실을 목격하고 난 뒤 부터 입니다. 존 우드가 네팔 여행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이런 것 이었습니다.

존 우드는 네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직장을 때려 칩니다. 그리고 Room to Read라는 근사한 단체를 결성합니다. 가난한 네팔 아이들에게 읽을 책을 보내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존 우드는 MS에서 배운대로 '더 많이 더 빨리 더 열심히'를 외치며 Room to Read를 키워 나갑니다.  
폭넓은 인맥을 활용하여 기부자를 포섭하고 여러 단체, 기관들과 공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자금을 확보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그만 눈 한줌에 불과했던 Room to Read는 몇년 새에 수 많은 사람들이 후원하는 주요한 사회적 기구로 거듭나게 됩니다.

Room to Read가 대단한 것은 빵이 아닌 책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 이 사업은 나중에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으로 확장되는데 이것은 Room to Read가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방법에는 돈, 정치, 기술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이 세계를 뿌리부터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교육이 유일합니다. 

정치와 기술이 진보해 온 세상이 골고루 혜택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하더라도, 보다 더 갖겠다는 욕망이 당연시되고 나눔을 거부하며 자기만 살면 된다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교육이라면 근본적인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나 기술은 이 세상의 겉모습을 바꾸지만 교육은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게다가 그것이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은 실로 엄청난 가능성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도서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참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돈이 없어서, 학교가 없어서, 책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요? 꿈이 있는 어린이들이 생계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야만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을 인간의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강남과 강북의 사교육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 한권, 비를 피할 지붕 한 점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 가지 목표가 생겼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누구든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책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그렇게 누워있는데 문득 회사를 다니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웃는 것도  

모두 모두 모두, 사실은 이 한 가지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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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림 2010-05-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꼭 읽어 봐야겠습니다.

한깨짱 2010-05-27 13:06   좋아요 0 | URL
핫~ 실망하시면 어쩌죠?

pola 2010-05-3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강추합니다~ 너무 감명 깊게 읽었어요!
 
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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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얇은 책이 유행하는 것은 시험 전날 기출문제를 보는 수험생의 마음. 그래, 그런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근거없는 요행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캐치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 또한 이런 욕망을 이겨내지 못했다. 3,300원, 94페이지의 책을 읽고 난 뒤에는 푸코를 전부 알 수 있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두말 안해도 다 아시겠지.

하지만 인상 깊은 사실은 푸코가 말한 '시선의 권력'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 깨달은게 있다는 것이다. 이 짧은 책에서도.  

나는 언제나 조직 사회에 갓 진입한 신입들이 겪는 이유없는 피로감에 대해 궁금해 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신입 사원들 그리고 갓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들은 할 일이라는게 아무것도 없다. 데드라인이 닥친 원고를 마감하는 일도, 2011년 Product Roadmap을 짜는 것도, 대항군에 맞서 봉쇄선을 배치하는 것도 그들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신입사원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료사회 최대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피로는 극심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줄줄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지 않은가?

그럼 왜일까? 바로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치를 본다는 것은 논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건 그냥 감이다. 그럼 왜 이런 감이 드는걸까? 그건 바로 시선. 그들의 평가자가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느낌이 온 신경을 통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I'm Watching You. 진실은 여기에 있었다.

직장인이라면 한 두번 느껴봤을 것이다. 퇴근 시간 이후 모두가 떠나간 사무실에서야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을. 외근을 나가게 되면 넉넉히 점심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을. 이 모든 것들이 시선으로 부터 해방된 인간의 본성이다.

사장의 자리가 빌딩의 꼭대기 층인 것도 임원들이 독립된 방을 갖는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시선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딜레마가 있다. 관료 사회의 권력 구조를 살펴 볼까? 여기 사무실에 굴러 들어온 호박을 나누기 위해 구성된 태스크포스 팀이 있다고 가정하자. 팀원들은 공평한 분배를 위해 밤새도록 토론한 결과 몇개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팀장이 반대한다. 그러더니 보완을 한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자신의 의견을 보태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팀의 의사결정으로 간주되고 잠시 후 모든 구성원들에게 전파된다. 이런 상황에서 팀원들은 팀장의 의견을 뒤집을 수 있을까? 절대 없다.  

현대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을 살펴보면 합리적인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채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의사결정권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독재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구성원들이 모두 각자의 표(일인당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문제는 팀장이 10,000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팀장 10명을 거느리고 있는 실장은 어떨까? 10,000 X 10 = 100,000 표를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실장은 백만표 이상을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조직 사회에서 하위 구성원들의 권력 총합은 결코 상위 구성원 1인의 권력보다 클 수 없음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료 사회를 피라미드에 비유하지만 실제 권력 분포는 그 반대인 역피라미드 구조인 것이다.

자, 이제 권력자들의 딜레마가 확실해진다. 높이 올라간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전달되는 시선으로 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실상은 더 강하고 커다란, 불가항력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시야에 포착되는 것이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셈이랄까?

어쨌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애환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단장은 군단장한테 까이고 군단장은 군사령관한테 까이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이런걸 느끼라고 쓴 책은 아닐텐데 어머! 난 또다시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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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
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이정환 옮김 / 안그라픽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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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관련 책은 제목부터 간지가 나야한다'라는 것이 안그라픽스, 소위 한국 디자인 시리즈의 대부인 이 출판사의 철학인 듯 하다.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라는 제목도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의미가 '보통 사람의 생각위를 넘어 다니는 디자이너의 사유법'을 말하는 것인지 '복잡해져버린 세상사, 그 생각의 쓰레기장을 유유자적, 유아독존 거칠 것 없이 홀로 치닫는 디자이너의 오만과 자신'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튼 알쏭달쏭 그러나 그 '간지'만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낙점된 것이 아닐까. 거기다 책 용지를 보면 재생용지인 갱지. 나가오카 겐메이가 재생 가구, 잡화 사업과 연관이 있음을 감안할 때 오히려 그 '싼 맛'이 자연스런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니 이로써 '간지의 완성'을 이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가오카 겐메이가 D&Department라는 디자인 잡화점을 운영하는 동안 써내려간 일기다.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 하던 여자 아이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던 흥분과 스릴. 옆 자리 친구의 일기를 훔쳐봐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나가오카 겐메이라니 디자인계의 스타라 부를 수 있는 이 사람의 일기라면 분명 짜릿한 사건들로 가득차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 챕터를 다 읽어 내려가기도 전에 종종 집중력을 잃고 내용을 놓치게 되는 이유도 이것이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개요를 짜놓고 일기를 쓰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 짧아 아쉬운, 아니면 주저리주저리 반복되는 혼잣말을 듣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책의 매력이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채 뜨끈뜨끈, 고조된 감정이 토해놓은 순도 높은 생각의 덩어리. 이 책에서는 그런 살아있는 생각의 펄떡임을 느낄 수가 있다.

짧은 이야기는 기록을 해두고 싶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는 것이요 반복되는 이야기는 그만큼 자주 겪는 일이라는 것일테니 어쩌면 이것들이 그 세계를 살아가는, 나아가 우리네 인생을 설명하는 힌트가 아닐까? 디자인 관련자가 아니어도 쉽게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는데는 아마도 나가오카 겐메이라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 겪는 보편적 감상이 디자인으로 이름을 바꿔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두께는 상당하지만 대부분이 여백과 제목이니 두려워할 것 없다. '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는 이 봄 한가하게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다 졸기도 하는, 그런 여유와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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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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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엔 성(性)이 없었나 보다. 나자렛에서 태어났기에 그저 '나자렛 예수'라 불렀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두 가지 사실이 숨어 있다.   

  첫째, 예수가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의 말구유가 아니라 나자렛의 목수 요한의 집이라는 사실.  

  둘째, 예수는 결코 날 때부터 '그리스도'는 아니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줬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보다는 그가 앉은뱅이를 춤추게하고 장님을 눈뜨게 했으며 다섯 조각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장정을 먹인 기적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적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언자를, 유대의 왕을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신이 된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고뇌와 고통이 감추어진 십자가를 메고 예수는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죽기위해 태어났고 너희는 보기위해 살아왔노라' 바야흐로 예수의 십자가가 언덕 꼭대기에 곧추서고 그의 손발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클라이막스를 알린다. 예수는 다음 씬을 지루하게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하나님의 '액션' 소리가 떨어지자 최후의 힘을 짜내 마지막 대사를 시작한다. '앨리 앨리 라마 사박타니' 사람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길 명대사를 내뱉고 예수는 드디어 눈을 감는다.  

  '캇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바로 여기에서 중지를 외친다. 예수가 신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그것은 세계를 향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한 명의 배우. 주어진 역할에 로봇처럼 임하는 꼭두각시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는 시뻘건 피를 흘렸다. 내 몸에서 흐르는 것과 똑같은 색깔의 피.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한 명의 인간으로, 너무나 나약하고 외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하여 이런 소설이 탄생하게 되었다.  

  '길고 긴 골고다 언덕을 나 홀로 걸어가는 구나. 나를 메시아라 부르던 이들은 어디 갔느냐. 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질 사람이 한 명도 없구나. 베드로야, 그래 이 간사한 녀석아. 수제자로 불리던 너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내 가슴에 못질을 했지. 힘세고 듬직한 야고보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 사이로 그 큰 몸을 숨기는 구나. 요한 나의 순종하는 어린 양 요한아. 너는 어두운 뒷골목에 머리를 쳐박고 눈물이나 질질 흘리는 것으로 선택받은 사도의 책임을 다하는구나. 아아, 막달라의 여인이여. 나는 왜 당신과 함께 인간의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가. 하느님의 축복아래. 수 많은 아들 딸들을 낳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이 때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유대의 왕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아 인간적으로, 너무나 고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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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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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리뷰다. 물론 앞에 것 2개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리뷰가 아니지. 왜냐하면 노벨문학상을 받기로 마음먹기 전에 쓴 것이니까. 한 마디로 나는 올해부터 다시 태어났다 이말씀.  

 그런데 웬걸 점심 먹고 큰맘 먹고 눈치까지 먹으며 쓴 리뷰 약 11.2줄 332자의 글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스토리텔링의 비밀 첫번째, 당신이 지금 내 글을 읽으며 쓰고 있던 글의 저장 버튼을 눌렀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공감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 만약 당신이 구글 크롬의 윈도우 창을 닫고 다시 하던 일을 재개했다면 글쎄, 노벨문학상은 아직도 멀구나.  

보통 사람들이 리뷰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그건 바로 이 책이 돈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 결론부터 말해주면 나의 경우는 좀 당한 것 같다.  

나는 How To에 대한 지침서를 경멸한다. How To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시간이 없을 때, 깊이를 원하지 않을 때, 사람들을 혹하게 만들고 싶을 때 혹은 돈을 벌고 싶을 때 우리는 책 제목에 '비밀'이라는 단어를 넣는다. -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제목에 '습관'을 넣는다 - 그런데 이 책은 살짝 요령을 부렸다. 비밀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붙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낚인 곳도 바로 여기 '아리스토텔레스'니 마냥 허접한 책이라고 보기엔 그래도 뒤끝이 있다 하겠다.  

누군가는 이 책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 '시학'을 보라고 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시학'의 내용이 원체 짧은데다 그 핵심만을 인용해 책 전반을 구성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에 두 가지 미덕이 있다면 하나는 '시학'을 비교적 읽기 쉽게 번역,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고 하나는 맺음말을 꽤 진실되게 쓴 점이다. 이 책을 사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맺음말만 보라. 그 안에 글쓰기의 해답이 들어있다. 결국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한 마디만 해주면 그만이다.  

바로 '너 자신의 이야기를 써라'라는 것.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가 자신의 책에서 서머싯 몸의 단편 소설을 운운하며 '모르는 것은 쓸 수 없다'라고 했을 때 그녀의 글쟁이로서의 무능력과 또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용기에 조소와 연민을 품었드랬다.  

하지만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모르는 것은 정녕 '쓸수 없다.'  

이것은 어느 초보 작가 아니 아마추어 아니 아니 어느 무지랭이의, 고해성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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