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퀘이크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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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흔히 '뇌'라고 불리는 3.5파운드의 피묻은 해면체에 재치 넘치고 웃음끼 가득한 소설의 생산 공장을 차려놓은 커트 보네거트는 바로 이 소설 '타임 퀘이크'를 마지막으로 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 자신 혹은 그의 팬들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이 모든 상황과 감정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한 마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들어보라. 커트 보네거트 Jr, 흔히 커트 보네거트라 불리는 이 사내는 1922년 11월 11일, 지구가 얼마나 잔인해질지 예상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두 남녀의 종족보존욕구에 따라 10개월의 생산 과정을 거친 뒤 이 세상에 태어났다. 더 들어보라. 그는 대학 생활 중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정찰병으로 적의 척후를 살피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드레스덴 폭격의 신나는 불놀이를 체험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뚫고 '운 나쁘게 살아남은' 커트 보네거트는 언젠가 이 경험을 소설로 옮길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24년이 지나기까지 커트 보네거트는 무명 소설가로 살아가게 된다. 1969년, 마침내 그때의 경험을 배경으로한 대작 소설 제5 도살장이 나왔을 땐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7세 였다.  

타임퀘이크는 47년간 무명으로 살아온 소설가가 75세가 되었을 때 생산한 책이다. 보네거트의 이름을 단 소설은 여기서 대가 끊긴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을 예감했는지 소설은 이 위대한 작가가 살아온 일평생을 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처럼 푸짐하고 밀도 높으며 또 총체적이다.
 

 

 

들어보라. 이 세상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우주적 경련에 의해 시공간이 10년의 시간만큼 수축한 뒤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예외없이, 전 지구의 모든 인간들에게 다시 주어진 이 10년의 시간은 그러나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과거를 바꾼다거나 하는 긍정적 의미의 사태가 결코 아니었다. 보네거트에 따르면 타임퀘이크, 삼류 SF 작가 킬고어 트라우트에 의하면 '자동항법에 맡긴 10년'에 해당하는 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96년 3월 21일에 사소한 말 다툼으로 아내를 쏴 죽인 남자가 있다면 그는 다시 한번 돌아온 1996년 3월 21일에 어김없이 아내를 쏴 죽이고 감옥에 갇혀 종신형을 수행해내야 했다. 버튼 하나로 수 만명을 살해했던 남자는 다시금 버튼을 눌러 수 만명을 살해해야 했다. 끊어진 다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절벽 밑으로 떨어진 고속 열차는 끊어진 다리 끝에서 다시 한번 다이빙 해야 했으며 가난과 싸우다 지쳐 강물 위로 몸을 날린 여자는 어김없이 다가온 그 시간에 차가운 강물과 재회해야 했다. 

그러니까 다시 주어진 10년은 기회가 아니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되는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종의 데쟈뷰를 느끼며 이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자기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은 실제로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존 레논을 죽이라'는 악마의 음성을 듣고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행위와 타임퀘이크 이후에 회사에 출근하고 맥주와 야구를 즐기고 잔디를 깍으며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행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둘 모두 꼭두각시 노릇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타임퀘이크가 일어난 지 정확히 10년 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오랜기간 사고가 마비되었던 탓에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길을 걷던 사람들은 다음 순간 어느 발을 내딛어야 할지 몰라 넘어졌고 달리던 자동차들은 갈 곳을 잃고 보도와 건물로 뛰어들었으며 비행기는 추락했다.

이 와중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평소의 삶을 유지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노숙자들이었다. 그들의 삶에는 애초에 아무런 목적도 없었기에 갑자기 찾아온 자유의지 앞에서도 삶의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단지 누워있었을 뿐이며 앞으로의 10년도 계속해서 누워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무용함이야 말로 타임퀘이크 이후에 가장 유용한 덕목이 될 수 있었을줄은 누가 알았으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노숙자들 중엔 삼류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속해 있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돌아왔음을 알아챘다. 그는 잠들어 있던 노숙자를 깨우고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자유의지야!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돌아왔다고!'

이렇게 해서 지구의 인간들은 다시금 자유의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난장판이 됐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은 무척 많았다.
 

 

 

타임퀘이크는 '되돌린 시간'이라는 SF 소재를 품고 있지만 사실 내용 자체는 전혀 SF적이지 않다. 그저 75세 노작가가 살아온 다양한 삶의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꿰어진 구슬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이어질 뿐이다. 타임퀘이크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우주적 스펙타클이 벌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에 그런건 없다. 타임퀘이크는 멍청할 정도로 잘못을 반복하는 인간 역사의 상징일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타임퀘이크'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른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인간들이 현실 세계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약탈과 전쟁에 대한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볼 수 있는 인간 역사를 돌이켜 보라. 인간은 지난 수천년 동안 엄청난 진보를 한 것처럼 뽐내지만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의 모습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기독교 강도들의 모습이 연상될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거의 예외없이 인간의 역사가 반복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출처는 기억 나지 않지만, 커트 보네거트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인간이 1차 세계대전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거대한 불자지 두 마리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강간한 사실을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아마도 다음 차례는 당신이 잠들어 있는 침대 위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역시, 

타임퀘이크! 

애초에 핵폭탄 같은게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로켓, 아니 엔진, 아니 아니 차라리 도구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대가족을 이루고, 벌거벗은 남녀가 벌판을 뛰어다니며 물에서는 물고기를 땅에서는 짐승의 고기를 얻던 시절을 지켰더라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는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어떤 시인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다. 

혀나 펜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슬픈 말 중에서 가장 슬픈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는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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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ii 2011-03-25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읽은 것중에 최고 수준의 서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딩동댕이네요.

한깨짱 2011-03-25 21:18   좋아요 0 | URL
헛! 다시 읽어 보니 문장들이 너무 길고 어려운 것 같네요. 그래도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창피하네요 ㅋ

jinny1734 2011-08-3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찮게 댓글을 읽고 펑펑 울었네요 스쳐가는 이런 작은 인연들이 있어 전 숨을 쉴 수 있는 거 같아요..
가끔 이런 멋진 내공이 느껴지는 글 앞을 접하게 되면 한없이 작아지면서도 가슴 저 곳에서 밀려오는 감탄이 저를 한동안 행복하게 한답니다.. 처음으로 글 한 줄 남기고 싶어,,아니 실천에 옮겨보는 거 같네요,, 전 늘 모든 일에 항상 생각만 하다 지나치고 마는 별 쓸모없는 습관 탓에 소중한 경험을 할 수있는 걸 스스로 차단하며 산 것 같아요.. 물론 꼭 자의적인 건 아니라해도 ... 후회가 밀려와 당장 이것만 해결되면 다시는 미루지 않고 다 해보리라 함서도 결국엔 다시 .... 참 어리석네요...
암튼 글 한 줄로 가슴에 엉킨 답답한 그 무언가가 조금 풀렸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1-08-31 19:22   좋아요 0 | URL
오늘 생각만 하시던 일을 드디어 실천에 옮기셨다니 축하 드립니다. 오늘을 발판 삼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하나씩 하나씩 조그만 실천을 해나가셨으면 좋겠네요. 부족한 글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저도 많은 힘을 얻습니다. 제 글을 읽고 힘을 얻으신 것처럼 저 또한 가슴 찡한 기쁨에 춤을 추게 됩니다.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이 더욱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외 지음, 정재곤 옮김 / 세상사람들의책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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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방글라데시라고 아는가? 나는 어릴 적,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라고 배웠다. 그리고 당시 선생님께선, 대한민국의 사람 수도 너무 많아 언젠가 방글라데시처럼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은, 그래도 아시아에선 꽤 잘나가는 나라의 초등학교 교사로서, 암울했던 60-70년대의 절대 빈곤을 떠올리며,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어린이들에게 국제 정세의 이해를 통한 반면교사의 진리를 깨우쳐줘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수업 지도 참고서에 이런 말을 곁들이면 좋다고 나와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때.
 

 

 

어쨌든 수 십 년이 지난 오늘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최빈국 이고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꽤 잘나가는 나라로 군림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 같은건 한국이 아닌 방글라데시에서 나오는게 당연하다. 정말?
정말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생각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사실에 입각한, 과장과 거짓이 전혀 덧붙여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겠다.

들어보라. 무하마드 유누스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이다.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1971년 내전을 통해 감동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국호를 바꾸는데, 그 이름을 방글라데시라 하였다.

더 들어보라. 이 방글라데시가 아직은 파키스탄은 커녕 인도로 불리던 1940년, 무하마드 유누스는 태어났다. 그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가 된 5년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이를 살펴보던 북유럽의 한 사설 단체는 그의 행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타 등등의 인간들과 매우 구분된다 하여 2006년, 상장과 일정의 상금을 전달했다. 나는 이 상금이 다이너마이트를 판 돈으로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가 외친다. 

'인간이 달에까지 도달하는 세상에 왜 아직도 가난은 존재하는가?'

내가 대답한다.

'짹짹?'

요새 실감하는 일인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질 수 밖에 없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누가 나한테 전세집 하나만 준다면, 아니 전세 대출을 신용등급에 상관 없이 저리로 빌려준다면 나는 하나님과 알라와 부처에게 각각 10만원 씩, 국가와 민족을 위해 10만원 씩, 심지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까지 10만원 씩 기부를 하고도 우리은행 대출계에 따박따박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가난할 예정이다.

스케일은 작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다를 바 없다. 물론 상황은 더 끔찍하다. 이 사람들은 150달러가 없어 고통 받는다. 그 돈이 있으면 집을 짓고 가축을 사서 이자와 원금을 갚고 나아가 저축을 만들어 가축 한 마리를 더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서 초고리의 사금융으로 대나무를 사온다. 그 대나무로 하루종일 의자를 만든다. 사채업자에게 의자를 갖다주면 하루 200원을 받는다. 하루종일 일해도 먹고 살기가 빠듯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일을 해야 한다. 학교에는 가지 못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죄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죄로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사온다. 가난이 대물림 된다.

돈을 빌리지 말고 직접 재료를 사서 시장에 내다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텐데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지 마라. 아무렴 이 사람들이 그 정도로 멍청할까. 딱 한번,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평생 저렇게 산다. 차라리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다.  

 

 

1976년 방글라데시에 최악의 기근이 덮쳤을 때,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 무하마드 유누스는 대학의 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구입하는 그 사람들을 봤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마흔 두 사람에게 첫 번째 대출을 제공했다. 대출을 받은 주민들은 목숨을 구원 받았다. 이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무려' 27달러였다.

그 해 무하마드 유누스는 직접 은행을 설립한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복잡한 대출 신청 서류를 요구하고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담보를 요구하는 은행들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은행을 '그라민 은행'(마을 은행)이라 불렀다.
그라민 은행이 유니세프, 사랑의 열매, 사랑의 빵, 사랑의 떡볶이, 사랑의 짜장면, 사랑의 탕수육 기타 등등 빈민 구제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바로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능력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편견과 맞서 싸웠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 원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을 영원한 가난 속으로 쳐 넣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하마드 유누스는 자선 단체가 아닌 은행을 세웠고 적선이 아닌 대출을 시작했다. 그것도 결코 낮지 않은 이자를 받아가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재료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자를 내고 원금을 갚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액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그라민 은행의 채무자들은 집을 짓고 소를 샀으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대출금을 갚았고 가난의 그림자를 무지개 색으로 칠해 나갔다. 아이들은 다시금 학교에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Wikipedia에 따르면 현재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전국에 1,175개의 지점을 갖고 있으며 총 3조 6천억원의 대출을 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원금 상환율은, 현재 98%에 달한다.
 

 

 

대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니까 가난같은거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라. 가난은 도처에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선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라고 말했다. 가난은 분명 구조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 주위에 가난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당신 자신 또한 가난의 가해자다. 거창한 일을 벌여보자는 게 아니다. 그저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아 보자는 얘기다. 나는 적어도 50년 동안은 우리 지구인들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주는 가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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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읊조리듯한 담백한 글투가 좋네요 :D

한깨짱 2011-02-11 21:30   좋아요 0 | URL
제가 약간 자폐 성향이 있습니다. 혼잣말을 많이하고 멍하니 있을 땐 머리 속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합니다. 그런 성향이 문장에 드러나나 보네요. 참 신기합니다.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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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은 워낙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이라 인터뷰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책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쌍방향 소통. 묻고 답하기. 때때로 말대꾸와 반박. 이런건 일반 저술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저자와 직접 이메일을 주고 받을 수도 있지만 좋은 답변에는 언제나 좋은 질문이 선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말대꾸와 질문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지승호다.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전문 인터뷰어라고 한다. 여기다가 장하준의 후배 윤미선 박사와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빈재익 박사가 더해졌다. 네 사람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담소하듯,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깐다. 뒷담화만큼 재밌는 일은 참 드물다. 

 

 

 

신자유주의의 나쁜 점이라면 수 백만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특히 우리 나라 재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건 '자본 시장의 전면 개방'이다. 그럼 자본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외국의 거대 자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우리 자본 시장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얼핏보면 자본의 유동성이란 당연한거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 시장의 개방은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나라같은 빈국이(貧國) 자본 시장을 개방하게 되면 곧바로 막대한 규모의 다국적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 쉽게 말해 SK와 삼성전자의 주인이 외국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국내 재벌 꼴보기 싫으니까 외국 자본이 혼내주면 쌤통 아니냐고? 하지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이 주인이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 된다.

우선 투기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인재 육성이나 장기 투자 같은건 절대 악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팔든 당장의 이익만 뽑아내면 그만인데 뭐하러 골치 아픈 미래 비전을 구상하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국익과 사회 기여에 대한 의무가 전혀 없다. 그래서 기업을 인수 한 뒤 임금 동결, 대규모 구조 조정, 미래 사업 정리 등으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익금은 바로 배당금으로 직행한다. 거기다 플러스 알파로, '사상 최대 이익'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진 주가가 상한가를 칠 때 막대한 시세 차익을 실현하고 빠져버린다. 흔히 말하는 먹튀가 바로 이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오히려 투기 자본이 일정 비율의 지분을 차지한 뒤 재벌들의 경영권을 압박할 때 발생한다. 이런 일은 IMF 시절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일련의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제도들은 국내 기업의 지배 구조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대다수가 외국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도입된 제도를 살펴보면, 소수(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M&A 규정 완하 등이다. 투기 자본은 이러한 제도를 이용해 공략 기업의 주식을 일정 지분 확보, 강화된 소수(소액)주주의 권한을 이용해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이사를 선임하거나 CEO의 퇴진을 요구) 막대한 배당을 요구 또는 M&A 의사를 밝히는 등 본격적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압박하게 된다.
이때 기업의 주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만큼 투기 자본의 공략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막대한 배당금을 지급해 주가를 방어한다. 

 

 

 

그럼 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금은 재벌의 주머니에서 나오느냐? 아니다. 그 돈은 전부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영업 이익이다. 영업이익이란 기업이 순수하게 생산 활동을 통해 얻은 잉여금으로 미래 사업에 투자하거나 직원들 복리후생 챙겨주고 오갈데 없는 졸업자들 일자리를 마련해줄때 가장 빛나는 돈이다. 이런 돈이 엄한데 가서 힘을 빼고 있으니 그 폐해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더 처참한건 이 뒤 부터다. 기업이 투자를 못했으니 장기적으로 영업 이익이 줄어드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업 이익이 줄다 보니 주식 시장에 불안감 조성되고 배당이 줄어드니까 주주들이 난리가 난다. 생산성, 기술 발전 속도는 일정하니 갑자기 이익이 늘어날 수는 없는거고 그러다 보니 남은 방법은 임금 깍고 하청업체 쥐어짜서 영업 이익 만드는 거다.

외국놈들이 이런다면야 언론이고 여론이고 다 들고 일어나 난리를 치겠지만 대한민국 재벌들이 이런짓을 하면 어디가서 하소연 할데도 없다. 언론과 재벌은 일치단결. 임금 좀 올려보겠다고 파업하면 조중동 3사에서 '고액 연봉자 염치 없는 파업 러쉬', '파업에 멍드는 우리 기업, 외국 자본의 먹잇감 된다' 한 마디씩 해주면 사람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며 애꿎은 놈한테 손가락질이다. 자기 자식이 배를 곯아도 정신 못차릴 사람들이다. 

 

 

 

장하준은 언제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치우침없는 중용을 주장하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함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못해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세가지 특성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함은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님에도 나는 그를 읽을 때 마다 언제나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1963년생 아직 마흔 일곱. 그야말로 귀추가 주목되는 요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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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때는 몇 권의 책들보다 잘 짜여진 인터뷰집이 좋지요 ㅎㅎ

한깨짱 2011-02-11 21:2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장하준님의 신간도 읽어봐야 하는데 원래 신간은 묵혀뒀다 보는 성미인지라 내리 1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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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백하건대, 코맥 매카시 이후로 이렇게 빠져든 소설가는 처음이다.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고 재벌과 국가 지도층을 강도높게 풍자하는, 이른바 진보 주의적 사상이 나의 코드와 높은 싱크로율을 이룬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아주 웃기고 또 짧다는 사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애써 숨기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나는 '제 5도살장'을 거쳐 '마더 나이트'로,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를 경유한 뒤 마침내 이 소설 '고양이 요람'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양이 요람'은 커트 보네거트의 전매특허인 허무를 메인 디너로, 반전과 반기독교를 사이드 디쉬로 한 블랙 코미디다. 그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극단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캐릭터들인데,  

보라, 여기에도 어김 없이 정신병자가 등장한다.

펠릭스 호니커 박사.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되어 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지은 이 천재 과학자는 원폭 실험을 지켜보던 동료가 '이제 드디어 과학이 죄를 알게 되었군'이라고 하자 '죄가 뭐죠?'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펠릭스 호니커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 전혀 없는 셈인데 이것은 '마더 나이트'에 등장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아이히만'을 연상케 한다.

펠릭스 호니커는 전쟁이 끝난 뒤 2만 6천 달러의 연봉을 받는 제네럴 단주조회사의 연구원으로 돌아간다.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의 손에는 노벨 물리학상이 들려 있었다. 가스실이나 시체 매립장 따위의 시설 투자 없이도 수 십만의 사람들을 눈 깜짝할 새에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제 과학계의 전설이 된 물리학자는 차기 연구 과제로 '아이스 나인(아이스-9)'을 발명하게 된다. 아이스-9은 수분과 반응할 경우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물체였는데 펠릭스 호니커는 이것을 제조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빙결되고 이를 발견한 천재 과학자의 세 자식들은 아이스-9을 나눠 가진 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다.  

 

 

 

이들이 다시 모인 곳은 산 로렌조 공화국. 그곳은 세상에 대한 지독한 허무와 냉소를 표현하며 자기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는 보코논교의 원산지였다.

보코논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의 발바닥을 문질러 정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 산 로렌조 공화국의 국민들은, 펠릭스 호니커가 낳은 악마의 씨앗들이 자신의 땅을 밟는 것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철저한 보코논식 환영법이었는데 보코논교에 따르면 그들의 방문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지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 형제 - 큰 누나와 남동생 둘 -의 실수로 아이스-9이 바다에 빠지고 이로인해 온 지구가 얼어 붙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처럼 행동했고, 자연스레 아이스-9 한 조각을 각자의 입속에 넣었다. 

 

 

 

커트 보네거트가 자신의 문학을 통해 줄기차게 던지고 있는 문제 의식 즉,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이라는 통찰은 '고양이 요람'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원자탄으로 14만명을 소멸시킨 펠릭스 호니커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의 공통점은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관심은 결코 악의적인 무관심이 아니다. 마치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처럼 그들은 선악을 구분할 줄 몰랐고 심지어 선과 악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핵폭탄의 트림으로 불타오를 14만의 영혼 앞에서, 펠릭스 호니커는 이렇게 묻는다. '죄가 뭐죠?'

'짹짹?'

버튼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절단된 사지와 불에 타는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전쟁은 모니터에만 존재할 뿐 그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말을 바꿔서 해볼까?

말 한마디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절단된 시민의 꿈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정치는 선거 기간에만 존재할 뿐 국민의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 정몽준이 서민 물가가 치솟는 것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그가 특별히 나쁜 정치인이거나 새디스트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버스요금이 70원 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보코논은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한 말을 이렇게 바꾼다.

'카이사르는 신경 쓸 것 없다. 카이사르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일도 어김없이 무관심과 무지로 이 세상을 다스릴 모든 통치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고양이 요람 100권 씩을 택배로 보내려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wired.husky@gmail.com으로 연락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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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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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말은 언제나 사람들을 광분케 한다. 광분하는 사람들은 흔히 세 종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온건파 기독교인이고 두 번째는 한국 기독교의 난잡한 번식을 비웃고 그 거대화를 맹렬히 비난하는 반기독교파이며 세 번째 부류는 종교적 체험은 오로지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으므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믿는 중도파다.

만약 술자리라면 주로 반기독교파 친구가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고 온건파 기독교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며 마지막으로 중도파가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며 건배를 제안하는 장면이 목격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대단히 점잖은 케이스고 좀 더 흔하게는 고성이 욕설로, 욕설이 주먹다짐으로 번지고 마는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지고야 만다.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케이스가 갖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둘 모두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버틀란드 러셀의 글 모음이다. 책 자체는 기독교를 비롯하여 아동, 대학 교육, 성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제목은 이 책의 첫 꼭지에 해당하는 기고문의 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반 기독교 정서를 이용하려는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러셀이 기독교 교리를 위와 같은 사회 문제의 근본적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러셀은 니체 이후 가장 확고한 안티 크리스트 철학자이며 철저한 합리주의로 이 세상의 모든 비이성에 - 권력과 종교 그리고 둘의 결합 - 철퇴를 날린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장로님께서 대통령이 되는 판국에 무슨 얘기냐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기독교는 부패와 독선의 상징이 된지 오래다. 왜 교회를 다니냐는 말에는 애매모호한 대답이 돌아오지만 왜 교회를 증오하느냐는 질문에는 수 백만개의 논리적 답변이 돌아오는 것만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건 우리가 기독교를 부정하는 수 백만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이 존재하느냐 안하느냐에 대한 근거는 될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사형을 언도 받았다고 치자. 우리는 그의 행위를 조목 조목 밝혀 죗값을 치르게 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범죄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행위는, 그 잊혀지지 않는 악행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날카롭게 박혀 심지어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그 행위를 유발한 존재를 강력히 증거하는 사실일뿐 결코 행위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기독교 비판도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고대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온 제1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을 차례로 반박하는 것으로 그 포문을 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러셀의 철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철학자들은 직업상의 이유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로 증명하려 하는데 이런 태도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규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말로 설명될 수 있고 언어로 증명되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거라면 우리가 명백히 느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 즉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정서적, 심리적, 초자연적 경험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러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시한 단 한 가지 이유만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였다면 결코 이 세상을 폭력과 전쟁, 강간과 살인이 만연하는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논리적이진 않지만 - 신은 선이며 질서를 추구한다는,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 대단히 쉽다. 신이라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절대자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해지도록 놔두는 걸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신은 이 지구와 인간을 살려 두는 걸까?

누군가는 세상에 만연하는 이 모든 악들이 사실은 심판의 징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가 핵전쟁으로 멸망하든 기상이변으로 멸망하든 그건 지나친 군비 확장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설령 지구가 아주 뜬금없이 행성 충돌에 의해 폭멸한다 할지라도 그걸 신의 심판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오늘날의 과학은 그것이 지구와 운석의 만유인력이 일으킨 얄궂은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유효한 증거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아뿔싸, 그는 당신만큼 악하다! 

 

 

 

나는 신에대한 논쟁을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사실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집착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예비해 둔 것이라 믿는가?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의 탄생은 필연이라고 믿고 싶은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바다에 떨어진 벼락 한 줄기가 이 모든 것이 시작이었을 지도 모른다.

우연을 믿으면 이 세상은 훨씬 쉽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우린 그저 우연히 태어났고 그래, 결국 땅에 묻혀 똥이 되는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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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결론이 최고ㅋㅋㅋ

한깨짱 2011-02-11 21: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댓글을 이리 많이 달아주시니 힘이 됩니다.

hiskin 2012-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2-01-15 14:49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