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오토기조시(옛 이야기)는 이례적인 작품이다. 다자이의 필모그라피에 있어서 이 소설만큼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흐르는 작품은 없다. 실패와 우울의 물결로 과잉된 문장들은 이 책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옛 이야기는 번안 소설이다. 일본에 전해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들을 다자이 식으로 옮겨 썼다.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동경에 쏟아지는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앉아 있으면서, '옷차림도 초라하고 용모도 어리숙하게 생겼으나, 원래 허투루 볼 수 없는 사람인' 아버지(다자이)는 불안에 떠는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아비의 마음 속에선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 참을 수 없었다.

다자이의 삶은 어긋나 버렸지만 글쎄, 이 남자도 따뜻한 햇볕 아래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면 작가가 평생을 흠모했던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나 일본의 국민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조차 뛰어 넘어 백편이고 이백편이고 재미있는 소설을 줄줄이 써내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소설의 중기에 해당하는 이 작품엔(비교적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유지한 시기) 작가가 지닌 진정한 능력, 소재를 재해석하는 기발한 착상과 문장을 비트는 천재적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혹부리 영감


혹부리 영감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혹부리 영감이 맞다. 노래 실력이 혹에서 나온다는 깜찍한 할아버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는 술꾼이다. '고독해서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니까 식구들이 싫어하여 자연스레 고독해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머 없는 아들과 타박만 하는 아내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쓸쓸해진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밤늦도록 춤을 췄다. 그러다가 도깨비를 만났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시는바와 같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할아버지다.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에게 혹을 떼주고 왔다는 말을 듣자 이 할아버지도 욕심, 아니 희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밤 깊은 숲 속 오묘한 달빛이 비추는 나무 사이로 들어가 도깨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깨비들이 모여 술판을 벌였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무대 위에 올라 철부채를 펼쳐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췄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은 노래까지 연달아 열창했다. 도깨비들은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 사람은 귀신일지도 몰라.'

그 말은 물론 할아버지의 춤과 노래가 끔찍했다는 얘기겠지.

'아아 지금 가시면 안됩니다. 이 혹이라고요 이 혹에서 춤과 노래가 나옵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그 혹이라면 일전에 맡아둔 게 하나 있지. 그 사람에겐 꽤나 소중한 물건인듯 하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자 가져가게나. 대신 그 춤만은 추질 말어. 술기운이 싹 가신다니까 혹은 내어줄테니 부탁이야 제발 놔 줘.'

참으로 엉뚱한 도깨비다. 그러나 그 엉뚱함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삶에 짐 하나가 늘어 버렸다.

옛날 이야기란 보통 권선징악, 나쁜 사람이 벌을 받기 마련인데 이 이야기에는 나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웃집 할아버지의 삶은 비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게 바로 '삶의 희비극' 이랄까?

할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예의 절박한 사람이 그러듯, 긴장한 탓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한 춤과 갈라진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 뿐이다. 



우라시마 이야기


우라시마 이야기는 - 주인공은 우라시마 타로 - 거북이를 살려준 은혜로 용궁에 놀러갔다 왔더니 세상은 이미 몇 백년이 흐른 뒤여서 가족도 집도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단지 우라시마 타로라는 이름만이 생소한 거겠지. 그러나 이 우라시마 타로는 거북이를 구해줄 만큼 정이 많으며 양 볼엔 쑥쓰러운 웃음이, 이마엔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찼던 따뜻한 남자가 아니다. 다자이의 손에 붙들리자 그는 쩨쩨하고 소심한 남자로 변해 버렸다. 

  


 


우라시마는 동네 아이들에게 푼돈을 쥐어주고는 거북이를 구해냈다. 거북이는 우라시마를 타박한다.

"겨우 5푼이라니. 너무했어 자네의 쩨쩨함엔 두 손 다 들었어. 하지만 그때의 상대가 거북이와 아이가 아니고, 이를테면 우락부락한 어부가 병든 거지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당신은 5푼은커녕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냥 낯을 찡그리며 서둘러 스쳐 지나갔을 게 틀림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는 은혜를 갚으러 올라왔다. 쩨쩨한 인간과는 다르니까. 아무쪼록 믿어 주시게. 그러나 우라시마는 믿지 못한다.  

거북이가 용궁으로 끌고가 인신매매라도 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호쾌한 선의에 혹하면서도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 - 그나마 다행이지 - 나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를 따져보아야 하는 - 이건 참 추악해 - 인간의 슬픈 숙명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이 소설에서 거북이의 힘은 대단하다. 거북이는, 본능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대범한척 하지만 쉽게 남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카치카치산


카치카치산은 너구리가 주인공이다. 심했다. 너구리라니. 더군다나 이 못생긴 너구리가 앙증맞은 토끼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참으로 역겹군. 손사래를 치며 책을 덮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언젠가 너구리가 산 기슭에 살고 있는 늙은 부부의 손에 잡힌 적이 있었다. 할멈은 너구리탕을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너구리는 가마솥으로 끌고 가는 할머니의 손을 카칵 할켜 버리곤 도망쳤다. 너구리로선 당연한 일 아닌가. 상대가 할머니고 부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로부터 온 힘을 다해 탈출하지 않는 다면 그걸 제대로된 너구리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토끼의 생각은 달랐다. 공교롭게도 토끼는 할머니의 친구였다.

토끼가 너구리를 증오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우선 냄새가났다. '족제비 똥으로 버무린 지렁이 마카로니'를 먹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 또 어지간히 못난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동네 마트를 다니는 건 꿈도 꿀 수 없어. 생긴것도 어지간해야 참고 살아보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너구리는 가진게 없었다. 천애고아. 무일푼.  

안타깝다, 못생기고 배 나온 위인이라도 번쩍 번쩍 금화 한 자루라면 토끼 아니라 그 이상가는 미인이라도 문제 없을 텐데. 그러나 너구리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답답할 정도로 둔했다. 그러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너구리야 이렇게 웃고 있으면 곤란해>  

그리하여 토끼는 너구리의 몸에 불을 질러 보기도 하고 화상으로 드러난 맨살에 고춧가루를 발라 보았다. 그래도 너구리는 죽지 않았다. 손을 휘둘러 쫓아낼 수록 더욱 집요하게 달라 붙는 파리떼처럼 토끼를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토끼는 호수로 놀러가자고 너구리를 꾀어 낸 뒤 진흙배에 태워 너구리를 침몰 시킨다. 그제서야 눈치챈 우리의 너구리.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발악해 보지만 토끼의 노가 너구리의 머리를 때린다. 따악, 따악! '그러더니 쏘옥 가라앉아 잠잠.'

잘못한건 너구리야. 적어도 아파트와 자동차 정도는 있어야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어. 못됐다. 양심이 있어야지. 야야 이러지 말자, 당신이 인간 세상에 환생한 너구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거야? 너구리를 그렇게 몰아 세운다면 젠장...

'반한것도 잘못이냐?'

 

혀 잘린 참새


참새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다. - 이 책엔 할아버지가 참 많이도 나와. 어쨌든 이 참새는 당돌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참새. 할아버지가 책을 보고 있으면 책상 위로 폴짝, 겁도 없이 뛰어 올라 고독한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준다.

그런데 부부가 문제다. 남자는 책만 보고 사는 한량. 여자는 '할아버지의 생가에서 부리던 몸종이었으나, 병든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떠 맡았다가 어느 틈에 그 생애를 떠맡게 되고 말았다. 배우지 못했다'.

글 깨나 읽는 남자는 예상 외로 무능력하다. 그런 주제에 거드름은 빼놓지 않는다.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한다. 할머니는 처음엔 약간 경외하는 마음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을 거다. 그러나 10년, 20년 초가집은 스러져 가고 젊은 여자는 생활에 시들어 이제 할머니가 됐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공자~왈이다.

이 할아버지, 사는 동안 할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걸어줬을리 만무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묘령의 여인(참새)과 희희낙락 수작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도대체 누구랑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냐! 여자가 분명하다. 어디다 숨겨 뒀느냐.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할머니의 신세한탄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 할아버지, 누구긴 누구야. 이 참새와 얘기 중이라네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 뿐이다. 드디어 할머니의 뚜껑이 열렸다. 할머니는 성큼성큼 다가가 참새의 입을 열고 혀를 뽑아 버렸다. 아기 참새는 깜짝 놀라 대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다음 날 부터 할아버지는 참새를 찾아 눈 덮인 대나무 숲을 헤맨다. 하루는 나뭇 가지에서 떨어진 눈 덩이에 맞아 잠깐 실신했는데 눈을 떠보니 참새의 나라였다. 그 곳에서 아기 참새와 애닳은 재회를 한다. 참새는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남자, 짐짓 모른채 하고 값 비싼 물건 한 두개 가지고 나왔음 할머니도 그리고 자기도 형편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을텐데 기어이 빈 손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보다 못한 참새가 비녀를 뽑아 할아버지에게 건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아버지는 눈 밭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벼이삭이 쥐어져 있다. 이 겨울에 벼이삭이라니. 할아버지는 기이하게 여겨 붓꽂이에 꽂아 두었다.  

이 벼이삭이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불쌍한 할머니 또 다시 남자를 추궁하네. 하지만 참새 나라 그리고 새의 선물, 기가막혀 말도 나오지 않아.

"그렇담 내가 직접 대나무 숲으로 가보겠어요."

"아무래도 선물이 탐나는 모양이군."

할아버지가 비수를 꽂는다. 말이 나온 김에 할머니는 눈 덮인 대나무 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뒤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쓸쓸한 엔딩이다. 코 끝이 쌩해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듯한... 아니아니 집어치자 이런 얘기 먹혀들지 않아. 나로선 도저히 이 느낌을 표현할 능력이 없어. 그러니 바로 여기에 본문을 옮겨 본다.

'해질녘, 무겁고 큼직한 옷고리짝을 짊어지고 눈 위에 엎드린 채, 할머니는 싸늘해져 있었다. 옷고리짝이 하도 무거워 몸을 일으키지 못해, 그대로 얼어죽은 듯하다.

옷고리짝 속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다. 이 금화 덕분인지 어떤지, 할아버지는 그 후 머잖아 관리가 되어 이윽고 한 나라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참새 의원님이라 부르고, 이 출세 또한 그가 예전에 참새한테 보여 준 애정의 결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어렴풋이 쓴웃음 지으며,

"아니, 마누라 덕분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고생만 무지 시켰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한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모자라고 서투른, 아무래도 '사랑받는다'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 들이다. 내가 만약 이 리뷰의 끝, 바로 이 문장에 '혹부리 영감과 우라시마 타로와 너구리와 그리고 눈 밭에 쓰러져 죽은 할머니가 누구냐,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라고 쓴다면, 아... 참으로 재미없는 리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이 글에서 색깔을 달리한 부분은 모두 소설의 문구를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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