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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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아멜리 노통의 작품 중 최고다. 나는 '제비 일기' 따위, 그녀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는 문제작까지 읽은 바이므로 이 말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노통의 소설엔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과 순수한 허구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둘 사이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심한 차이가 있는데 주로 전자는 뛰어난 작품이고 후자는 짬뽕 국물을 뒤집어 쓴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흉물스런 이야기 들이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바로 이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채로 노통의 필모그래피를 반짝 반짝 빛내고 있다라고 하는 얘기는 이젠 너무 
구차한데다가 상투적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더 이상 문장을 늘였다간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버릴까봐 찬양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소설의 원제는 '튜브의 형이상학'이다. 노통의 특기, 과장의 미학이 엿보인다. 내용 또한 자신을 신이라 믿는 어린애의 얘기다. 

이 아기는 확실히 다른 아기와는 다르다. 우선 울지 않는다. 울음은 아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그만한 나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이다. 울음의 부재는 곧 관계의 부재고 관계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다. 아기는 고심끝에 결론을 내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신이로구나.


지고의 숭배 대상이자 유일한 신인 아기가 하는 일은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는 일이다. 먹기만 하면 싸는걸 보니 입에서 똥구멍까지 수직의 튜브로 연결되어 있는게 분명하다. 아기는 고심끝에 신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신은 튜브다.

두 살이 넘어갈 즈음, 분노한 아버지가 독생자를 내려 주듯 아기는 힘차게 울며 자신을 낳은 인간들과 소통을 시작한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멜리 노통.

여차저차 인간 세계에 발을 담갔지만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곧바로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머리 속에는 이미 모든 단어가 들어 있었지만 갓 두살이 넘은 아이가 유창하게 불어를 - 노통은 벨기에 사람이고 벨기에 사람은 불어를 쓴다 - 구사하면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서린다. 그래서 밤낮 울기만 했다. 2년 동안 철저히 침묵을 고수한 아이가 입을 열자마자 울음만 쏟아내니 오히려 부모들의 마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신의 뜻을 헤아릴줄 모르는구나.

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한 신의 입으로 친할머니가 공수해온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가자 뚝! 울음을 그쳤다. 그리곤 아직 모든 사람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지만 할머니와 초콜렛에게만큼은 사랑을 약속했다. 신이 내린 첫 번째 구원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인간에게 신의 언어를 허락했다. 생각만큼 발음이 잘 된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엄마, 아빠를 말 할 수 있었다. 노통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오빠 만은 예외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저분하고 교활하고 난폭한 작은 인간. 노통은 오빠를 저주하는 의미에서 결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보모 니쇼상과의 관계는 노통의 신놀음에 불을 붙였다. 니쇼상은 일본인 답게 고용주에 대한 복종을 철저히 실천했다. 그녀는 어린 신을 숭배하는 유일한 신도였으며 니쇼상의 헌신적인 순종으로 이 작은 신은 유일자로서의 자각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곳에 있다. 모든 이의 숭배를 받으며, 왼손에는 꺼지지 않는 생명을 오른손에는 불멸의 영혼을 들고,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친할머니가 죽었다.

두 살 짜리 아기의 머리 속엔 삶만이 유일한 세상이다. 죽음이라는거,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전광석화, 죽음이 깨어나면서 뿌리는 일말의 불안감이 노통의 마음 속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불멸의 믿음'을 끌어내렸다. 존재의 '영원함'은 죽음의 포로가 되었다. '영원함'은 거짓말로 판명되었고 거짓말쟁이 존재는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채 삶 속으로 나아갔다.  

 

 

 <출처: Flickr, Julius Koivistoinen>

 

죽음이란게 있다면, 결국 존재가 그리로 나아가도록 지어진 거라면, 그렇다면 삶의 족적이란, 살아가려는 모든 노력이란 결국 '에둘러 돌아가는 길'에 지나지 않은가. 죽음은 존재의 필연. 나는 내 존재를 구차하게 연명함으로써 죽음에 저항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어린 신은 어느 8월말 오후, 집 앞 마당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진다. 고의였는지 발을 헛디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못 위로, 뒤통수에서 터져나온 새빨간 피를 흘리면서도 노통은 삶을 구걸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카시마상이 서 있었다. 또 다른 보모이자 신의 적대자였던 카시마상.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신을 오로지 침묵으로 마주하며 그 자살에 소리없는 축복을 전하고 있었다. 

니쇼상이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노통을 꺼내들고 물기를 닦으며 도와 달라고 소리친다. 눈 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스믈스믈 삶으로 흡수되더니 어느덧 자취를 감춰 버린다. 

 

 

<출처: Flickr.com, Cape Cod Cyclist> 

 

신과 세상, 실존과 불안의 의미를 어린 아이의 심리 속에서 풀어내는 아멜리 노통의 글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감탄을 했다는 말로 감상을 적는다면 노통에게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나에겐 이 소설을 평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랴 애꿎은 단어로 불필요한 찌꺼기를 남기느니, 오늘은 이대로 마치는 수 밖에... 아무쪼록, 이해해 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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