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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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을 만난 것은 2007년 겨울, 삼성역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였다.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이 황석영의 소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감독이 임상수라는 것도 역시 몰랐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든걸까? 하는 감탄어린 의문이 가슴을 맴돌았다. 마침내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나는 그제서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그런데 정작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사람은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오래된 정원'을 불편해했다. 친구는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불살랐고 - '불사르다'는 말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전쟁같은 데모를 벌여야 했던 청춘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삶을 낭비라고까지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며 사람들로 가득찬 쇼핑몰을 걷고 있었다. 이 세련되고 쿨한 영화가 완전히 망한걸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단지 내 주변의 일 이인에 불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불과 
20년 전만해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 나라였지만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의 소설이다. 나는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오래된 정원'의 소개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전투화발에 몸이 깨지고 목이 쉬어라 자유를 외치던 세대는 이제 근엄한 정치인이 되거나 사교육계의 스타가 되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힘 없고 가난할 때는 몰랐지만 높은 자리에 서서 돈을 좀 벌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 이 세상에 권력과 돈 만큼 강렬한 환각제는 없다. 이런 세상임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낸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 사회의 귀감이 되는게 아닐까? 이런 작가의 소설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소설 속엔 분명 온 몸으로 시대를 이겨낸 진한 삶의 체취가 담겨 있을 테니까.   

 

 

<전두환은 전범 수준의 악당이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그 악마를 잊어 버렸다.>

학생 운동가 오현우는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무기 징역이 선고 된다. 잡히기 전 미술 교사 한윤희와 함께 갈뫼에서, 6개월 동안 꿈같은 평화를 누리는데 갈뫼 이전의 오현우의 삶과 이 갈뫼에서의 6개월 그리고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이 교차로 진행되는 것이 '오래된 정원'의 주된 서술 방식이다.

특히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서울의 삶과 평화롭기 그지 없는 갈뫼 생활의 교차는 7, 80년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잔인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저항-현실에의 안주'라는 오현우의 내적 갈등으로 환원되면서 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에 아슬아슬한 긴장을 불어넣기도 한다. 반면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은 이 두 공간에 대한 비평의 무대로써 소설이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것을 막아주는 중심추 역할을 하는데 이런 절묘한 구성은 세 개의 역사를 모두 경험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일종의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 한다.   

 

 

  <5년 간의 망명 생활, 5년간의 투옥 경험은 오현우의 감옥 생활과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의 리얼리티로 되살아 난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이 갖는 서술의 균형은 갈뫼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갈뫼를 '현실에의 안주'를 위한 공간으로 간주할 경우 그곳은 유토피아라기 보다 현실 세계가 파놓은 함정으로써, 오현우의 혁명 의지를 갉아 먹는 해충 같은 장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갈뫼를 하나의 상징으로만 확정할 수는 없다. 특히 황석영은 갈뫼에서의 삶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아기자기하면서도 소소한 일상 속에 녹아든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갈뫼를 해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드는건 사실이다.

또 갈뫼를 뛰쳐나간 오현우는 결국 감옥에 갇혀 17년간 인생을 낭비했다. 오현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였으며 자유를 쟁취한 듯 보이는 오늘날도 실상 군부독재의 군화발이 자본독재의 구두발로 대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구두발은 더욱 강해지고 은밀해졌지 않은가! '너희들이 한게 뭐 있어!'라고 외치는 윤희의 대사는 그렇기 때문에 가슴을 아리는 비판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갈뫼는 단지 가정을 꾸려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두 주인공의 안식처, 때 묻은 현실과 대립하는 순수한 장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출소 후 갈뫼에서 안식을 찾아가는 오현우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분위기, 한 줌의 승리도 얻지 못한채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한 힘없는 후회가 느껴진다. 갈뫼를 다시 찾아 추억을 더듬으면서 오현우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그 모든 것들은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고백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황석영 만큼은 변하지 않을거라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괴물처럼 변태하는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우뚝 선 거암(巨岩)으로 내 기억속에 남아있기를, 나는 바란다. 하지만 인간이란 결국 

시간이라는 바다 앞에 쌓여 있는 조약돌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모난 것이라도 그 거센 물결에 닳아버려 언젠가는 맨들맨들한 조약돌로 축적되는 것. 만약 이것을 역사라고 부른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오현우도 황석영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 조약돌이 되고마는 현실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영화화가 결정된 후 임상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길지 않은 대화임에도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인터뷰였는데 특히 이런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건(오래된 정원) 감옥에서 나와서 얻은 자유의 공간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 맘놓고 러브스토리도 쓸 수 있게 된 거지. 옛날엔 우리끼리 복장도 서로 단속했어. 이 새끼 왜 이렇게 야하게 입어 이러면서.(웃음) 예전엔 사랑할 자유도 억압됐고, 그러니까 러브스토리를 쓸 자유도 없었던 거지. 망명 기간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한계, 한반도의 한계를 봤으니까.

어떠한 사상이라도 억압과 지배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 순수한 가치를 잃고 만다. 좌우의 이데올로기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의 말대로 어쨌든 시대는 바뀌었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완성을 통해 일종의 숨고르기를 마친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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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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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과 진중권은 모두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잘쓰냐 못쓰냐는 여러가지로 따져 볼 수 있겠지만 특히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글은 후한 평가를 받곤 한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각각 제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 특유의 가독성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 의도는 명백하다. 인터넷의 발달과 복잡한 정치 상황, 대형 스포츠 행사의 개최로 촉발된 다양한 문화 현상의 빅뱅. 이 전례없는 사태에 대한 해석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원하는 스토리 텔링인 것이다.   

 

<대중 문화의 알파와 오메가...?>

그러나 대중 문화 비평이란 전혀 새로운게 아니다. 짧게는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로부터 길게는 그 옛날 고대 벽화에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어'라는 낙서가 등장했을 때 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 바로 이 대중 문화 비평이다. 잔뼈가 굵은 출판 업계가 이런 사실을 모를리 없다.  

그리하여 미학자이자 대중 문화 비평가이자 전직 교수인 진중권과 물리학을 전공했고 이제는 뇌과학을 연구중인 베스트셀러 과학자가 링 위에 올라선다. 인문학 vs 과학!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다. 이제 관객은 두 사람의 주먹이 제대로 충돌해 주기만을 바라며 두근대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펀치는 당연하게도 무척 대중적이다. 스타벅스에서 생수, 레고에서 애플, 셀카에서 개그콘서트까지 의, 식, 주, 락! 생활 세계를 총망라한 다양한 문화 현상들은 미학자가 날리는 잽이 되고 과학자가 휘두르는 훅이 된다.   

 

<우리 시대의 Icon>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경기장은 애초에 미학자에게 유리하게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학(學)을 추구하는 인문학은 그 주제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게다가 진중권은 오랜 기간 동안 대중 문화와 함께하고 그것을 연구해온 사람아닌가. 그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 익숙한 작업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그렇지 못했다. 21개의 소재 중 물리학과 뇌과학의 힘을 빌려 논술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정재승의 글이 현상의 뿌리를 파고드는 논문이 아니라 그저 담백한 에세이가 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주 창조론이나 생명의 기원, 인간 복제와 윤리학의 문제 등 과학과 인간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를 두고 두 사람의 대담이 진행됐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이런 면에서 '크로스'의 기획 의도는 그 자체가 한계이기도 했다.

따라서 웅진지식하우스는 새로운 경기장을 지어야 한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은 - 아니 정재승 쪽으로 살짝 기울어도 괜찮다 - 평평한 경기장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위에서 미학자 vs 과학자의 진정한 종합 격투기가 벌어진다면, 합체도 충돌도 미완성인 이 책의 허물쯤은 적당히 덮어둘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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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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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벡, 해롤드 사쿠이시 작)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기린의 이름은 기린이다 라고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머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서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거의 예상했던 일이 보란듯이 틀어지고 마는 일이 빈번히 나타나곤 한다. 감정 이입이 쉽지 않은 그림임에도 그 글을 읽는데 흠뻑 빠져들고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독서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원작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영화가 주로 이몽학-황처사(혹은 견자)-백지의 피상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를 둔 반면 원작은 견자의 내면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준익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도 바로 견자의 내면. 시대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 '개인'의 애수였을 텐데 이는 이준익의 이야기들이 언제나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시대보단 개인의 정서를 그리는데 공을 들인 전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준익이 '왕의 남자'만큼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원작의 글은 너무나 오묘했고 차분했다. 그것은 푹푹 고아 삶아내는 사골국처럼 차분히 앉아 뜸을 들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시간 남짓의 시간에 압축하기엔 글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고 그 의미는 너무나 거대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무대는 조선의 선조 시대. 바야흐로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고 동서인의 당쟁이 극에 달했으며 정여립이 반란하는 등 유사이래 그보다 더한 폐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시기였다.  

주인공은 한견자(犬子)라는 인물로 본명이 한견주(堅柱)요 또 서자 출신이었다. 견자는 뛰어난 침술가요 전설적 검객인 봉사 황정학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의미하는 바가 또 오묘하다.

견자는 신분에 대한 울분으로 사회에 의미없는 분노를 표출할 뿐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다. 반면 봉사임에도 마치 구르미 달을 버서나듯 태생의 저주를 훌훌 털어버린 황정학은 진정한 자유인이요 또 '눈 뜬' 장님이다. 이 눈 뜬 장님 둘이 만나니 비록 '눈 뜬'의 의미는 서로 다를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까지 다르진 않았다.  

황정학은 눈먼 병신으로 천대 받았던 경험을 기억하기에 견자의 울분을 이해하고 견자는 황정학의 초월적 능력을 보고 자신의 깨부셔야 할 것은 부패한 나라, 사회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견자의 성장 만화가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스펙타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만화는 여유가 있다. 명대사들도 견자와 황정학이 나누는 한담 속에 드러나고 그것은 은근히 스며드는 서정시가 되었다가 곧 가슴 전체를 울리는 소리로 퍼져나간다. 영화가 원작을 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고작 팔천원을 내고 감동과 재미와 메시지까지 남겨 가려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한채 조바심 내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대중 예술이란 이렇듯 쉬워 보이면서도 결코 쉽지가 않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삼백원짜리 대여점에서 만나지 않은 건 참 다행이다. 만화가 책장 안에서, 위대한 문학과 나란히 호흡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이 세 권의 만화를 나의 서재에 꽂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보다 글이 좋은 만화, 그래서 더 오롯이 기억되는 작품.

찌는듯 사람을 볶아대는 이 더위가 마치 견자와 황정학을 괴롭혔던 사회의 굴레처럼 느껴지기에 이 밤, 웬지모를 절절함이 가슴 속에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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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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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이 '예수'에 집중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예수의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유산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인물이 존재했던가? 이 질문의 답을 잠시 미뤄둔다 하더라도 이토록 상쾌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관심가져 보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솔직함이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히 다가오는 오늘날에 말이다.  

김규항은 우리 사회의 혁명 실패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영성의 개발이 없는 혁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성의 개발에만 몰두하는 혁명이다. 전자는 냄비에 끓이는 밥과 같다. 밑바닥은 다 타서 늘러 붙는대도 윗 부분은 설익어 먹을 수 없다. 반면 후자는 증기를 내뿜지 않는 압력 밥솥이다. 안으로 꽁꽁 싸매고 들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뚜껑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해답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땐 그냥 '중간'에 두고 에둘러 말해 버리면 의외로 위대한 해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공자도 그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으며 칸트 또한마찬가지였다. 김규항이도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사회 변혁과 내 안의 변혁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탄생한다'. 고로 좌파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김규항이 이번에 '예수'라는 담론을 자신의 필모그라피에 올리기로 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혁명의 초석이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예수전'은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쫓는다. 김규항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복음서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씌였고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은 복음서이다. 

김규항이 마르코 복음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굳이 좌파 기독교도라는 말을 만들어야 할만큼 보수화해버린 오늘날의 교회와 말씀은 김규항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 예수', 진보의 탈을 쓰고 인민을 호도한 짭퉁 지도자들에(바리새인) 대항하고 성전 앞 상인들의 좌판을 뒤 엎으며 분노했고 언제나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이 위대한 '아웃사이더'를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예수전'을 통해 김규항이 말하고자하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정말 무식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한다(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슬람교 심지어 가톨릭까지 싸잡아 사이비 종교쯤으로 말하는걸 보고 있으면 그 무식에 정신이 아연해지기까지 한다.이것은 한국의 종교 교육이 몰이해와 배타성으로 점철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에게 왜 몰이해와 배타성이 필요한 것인가? 그건 이미 거대한 주식회사로 변해버린 한국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모토는 단 하나. 

남보다 더 많이 고객을(신도) 유치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의 종교, 심지어 다른 교파 마저도 찢어 발겨야 한다. 몰이해와 배타성은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 것이다.

신도가 돈으로 보이는 교회에서 어떻게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예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예수가 재림하여 부와 권력에 맛들인 목사들을 향해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놓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누가 과연 예수를 따를 것인가? 그들은 또 한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당신이 꼬박꼬박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헌납하며 좋은 배우자와 직장, 높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한 기도를 올리기 전에 진짜 예수의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자. 그리하여 내 안의 진정한 변혁부터 이뤄내자. 그럼 총력전도주일에 가짜 신도의 이름을 적어내지 않아도, 전철역 앞에서 싸구려 커피믹스를 타주지 않아도 복음은 제발로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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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스 Veritas 10 - 완결
윤준식 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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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간만에 볼만한 무협 만화가 나왔구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Oh! Great(오구레 이토)씨의 일본만화 '천상천하의 카피 버전이네'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만화는 '천상천하'에 빚진 것이 많아 보인다. 우선 둘다 학원물이라는 점. 게다가 갈등의 주체가 {(학생회vs비학생회) vs (어른들로 구성된 외부세계)}라는 점 등 세세히 따지고 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베리타스'가 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만화는 꽤 훌륭했다. 특히 그림이 좋았고 '천상천하'처럼 웬지 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없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열 권에서 끝이란다. 아무래도 10권이 늦는다 싶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였다. 한 달에 2페이지라도 계속 연재해 주면 안될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도 5년에 한권 씩 나오는데. 원래 대작이란 독자의 간절한 기다림을 도도히 외면하며 유유히 살아가는거 아닌가.

아직 10권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 봐도 뻔하다. 9권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권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0권이 한 1,000페이지 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은 가능하겠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설마 '협객 붉은매'처럼 2부를 염두에 둔건 아닐테지. (다행히 300 쪽이 넘는 분량이기는 하다)

이 만화의 강점은 한국 전통 문화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해석이었다. 예를 들면 남사당 패의 꼭두쇠, 곰뱅이쇠 등이 가진 버나, 살판 등의 기술이 사실은 무술에서 시작한 것으로 백성들이 무기를
소지하거나 무술을 익히는 것을 금했던 지배층의 억압을 피해 교묘히 '놀이'로 탈바꿈 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접신을 시도하여 액땜을 막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살풀이는 '강신술사'로 남사당 패의 후예는 각자의 기예에 맞는 전통 무예로 되살아 난다.

물론 주류 무공은 이런 전통 무예 보다는 여주인공 '베라'를 중심으로 한 '리 유니온'계 무공이다.  

   

<베라>

'리 유니온'이란 인공 '기(氣)'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거대 기업의 무술 연구소다. 이 연구소가 설립한 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뽑혀온 무술 인재들이 다니고 있는데 여기서 무술 인재란 무술을 익힐 재능을 갖춘 자와 이미 전통 무예를 전수 받은 전승자까지 포함된다.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금기를 수 천년 동안 지켜왔지만 인공 기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전통 무예 전승자들은 무공의 비전을 리 유니온에 공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전통 무예는 리 유니온의 손에서 혼합되고 보완되어 '리 유니온계'라는 다양한 무공을 탄생시킨다. 물론 이 무공은 리 유니온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얼핏 봐도 전통 무예 전승자와 리 유니온계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예상되지 않는가? 예상대로 이 만화의 축은 전통과 현대의 대결이자 지식의 독점과 공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의 특성상 이런 쟁점이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야 다양하겠지만 역시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주인공 마강룡과 아이들이 '베라'의 학생회와 격돌하는 장면이다. 특히 '신암행어사', '아일랜드'의 양경일, '니나 잘해'의 조운학의 문하생을 포함하여 도합 7년을 수련했다는 김동훈의 작화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마강룡> 

삼국지, 수호지를 읽으며 등장인물을 줄줄이 외우고 장비가 무슨 무기를 썼는지 노지심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리타스'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수호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즐기는 사람에게 다양한 인물과 기술의 등장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베리타스와 삼국지와 수호지는 그런 면에서 쌍둥이다.

만약 작가에게 건강과 시간 그리고 여유가 좀 더 주어졌더라면 '베리타스'는 한국 무협 만화의 고전이 됐을 수도 있다. 겨우 10권으로 마무리된 이 만화에 깊은 애착과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제 무슨 만화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이제 우리 나라의 무협 만화라면 이미 백만년 전에 성장을 멈춰버린 열혈강호 말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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