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코스모스 - 40억 년에 걸친 미생물의 진화사 김영사 모던&클래식
린 마굴리스 & 도리언 세이건 지음, 홍욱희 옮김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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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개의 생물체들이 한데 합쳐져서 양쪽의 합보다 훨씬 진보된

새로운 한 생물체를 창조했다.” - 158

 

린 마굴리스세포 공생 이론을 알게 된 것은 대략 2년 남짓한 비교적 최근이다. 그것은 이진경과 함께 펴낸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수유너머 104>에서 연구, 강의 중인 최유미박사의 평설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에 인용된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는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 엮임, 즉 세포 융합이 지구 생물 변화의 주요 원동력이었다는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의 운명과 진화의 토대는 경쟁과 적대가 아니라 화합과 공생이라는 의미이다. 이 책은 이렇게 내게 미생물의 우주, 인간을 비롯한 생태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야를 지니도록 다가왔다.

 

진화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몰염치하게 왜곡 사용된 적자생존이란 용어의 남용과 더불어, 진화는 언제나 개체의 이익을 위해 진행된다는 신다윈주의자들의 신앙이 된 믿음의 오류를 입증하였다는 점이다. 언제나도 아니요, 독립된 개체의 이기적 이익도 아니다. 진실은 진화는 서로 다른 개체의 공생적 이익을 위해 진행된다! 생물학의 현대고전이 된 이 책,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발표된 1986년부터 수년간 다윈을 교조로 받드는 자들에 의한 무차별적 비난과 조롱이 쇄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린 마굴리스의 세포 공생, 세포 융합이론은 생물학 교과서의 유전자 교환 이론은 물론 미생물학 세계, 나아가 지구 생태계를 이해하는 주요 이론으로 정착되었다.

 

이 저술은 생물학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게 하였으며, 진화론의 새로운 장을 연 지난한 연구노력의 직접적 결과물이라는 생물학 부문의 위대한 성과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에 더욱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에 대해 다른 관점을 지니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관계의 사유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위계적으로 대단히 견고한 철학적 이론이나 과학 이론을 비판하는 길은 전도와 제거를 동원한 방법뿐이다. 전통적 견해의 역전과 해체!, 그것은 인간을 진화의 사다리 가장 위에 둔 망상적 이해를 뒤집는 것이고, 가장 아래 자리잡고 있는 미소한 생물, 박테리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소위 발달기원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마치 세포가 필요해서 어떤 기능을 갖도록 진화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망상은 인간을 진화의 가장 꼭대기에 선 최고의 진화물이라는 사이비 결과를 만들어낸다.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 등 미생물의 진화는 인간의 출현에 수십억 년 앞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화는 결코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던 적이 없으며, 계획이란 것이 없다.” 인간의 몸은 10,000 ()개의 동물세포와 10만 조의 박테리아 세포를 지니고 있다. 동물세포인 개개의 진핵세포는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들의 융합체일 뿐이며, 바로 이것들의 유기적 연결체의 한 형태가 인간이다. 여전히 이 세계의 생물체들은 박테리아에 기초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즉 린 마굴리스의 이 책은 공생기원설을 선언한다.

 

박테리아에서부터 포유동물로 불리는 생물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의 화학적 유사성은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책은 원시지구의 분자들에서부터 핵산과 세포막이라 부를 만한 것을 통해 원핵세포인 박테리아의 출현, 이들의 공생, 융합을 통한 자가조직화 등 자기보존능력의 보유와 다세포로 발전, 한 개 이상의 출처로부터 유전자를 받아 이를 재조합하는 과정인 성(sex)의 형태 변화들과 번식, 치아와 눈, 근육조직과 뼈의 형성들에 이르는 수십 억 년의 적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세포 공생 이론은 별개의 생물체들이 한데 합쳐져서 양쪽의 합보다 훨씬 진보된 새로운 생물체가 창조되었다는 진화 이론이다. 소위 양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허위의 주장들은 린 마굴리스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고고학적 발견과 실험실 연구들로 입증되어 오랜 동안 인간의 도덕과 종교를 장식했던 오만과 오류를 해체시키고 있다.

 

개체 이익 진화라는 전통적 다윈주의를 시정하게 하는 테네시대학 동물학 교수인 전광훈박사의 15년에 걸친 아메바 배양 실험은 박테리아에 감염된 아메바가 함께 생존하기 위해 협력의 기작을 작동하고, 둘의 공존 공생적 습관의 형성으로 상호 필수불가결의 존재가 됨을 입증한 전기적인 공생실험으로 인용되고 있다. 결국 진화에는 경쟁과 협동 사이의 뚜렷한 경계가 없으며, 미생물우주인 자연은 개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의 범주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를 넘어서는 진화를 진행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생물의 생활은 어떤 한 생물체가 다른 생물체를 압도해서 승리를 얻는다는 그런 운동 시합같은 것이 아닌 복잡한 넌(non)제로섬(zero-sum) 게임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박테리아는 자신의 유전 물질을 복사하는 대신에 다른 박테리아에게서 빌려오기도 하고 조각난 DNA를 전달하기도 하며 유전자를 혼합, 결합한다. 박테리아에게 성이란 이렇듯 수평적(자기 이웃과 유전자를 나눔)인 아주 유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박테리아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수용의 세계이다. 박테리아에게 바이러스와 DNA의 침입은 일상적이며 이에 적응한다. 진핵세포가 됨으로써 이러한 유동적 융통성을 상실했다. 진핵 생물은 유전자를 수직적(세대를 통해) 전달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간다. 융통성 있는 불멸의 존재에서 죽음과 연결된 것은 이러한 변화, 즉 격리된 막 속에 들어앉은 핵을 지닌 진핵 세포가 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해도 될 것 이다.

 


이것을 극적인 드라마로 보여줄 수도 있다. 조금 큰 원핵세포가 작은 원핵세포를 먹이로 취했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는 아마 10억 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무수히 일어났을 것이다. 이 우연한 실패가 예상치 못한 관계를, 뜻밖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둘은 서로의 기능을 조화롭게 이용한다. 이를테면 태양 빛을 회피하는 이동 능력 없는 원핵세포의 경우 편모를 모터처럼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원핵세포(스피로헤타;spirohetes)와 협동하여 자기 생존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합체함으로써 둘은 훨씬 뛰어난 생존과 번식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화불량의 메타포는 타산적 교환, 적자생존이라는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논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사실 자연은 무자비한 생존 경쟁 장이었던 적이 없다. 물신화된 인간사에 투사하여 왜곡의 도구가 된 발생기원의 진화론이 지닌 그 환상을 부숴버린다.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등 독립된 원핵세포가 세포내 기관으로 정착하여 생명의 주요 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공생, 융합의 여실한 증거들이다. 원핵세포인 스피로헤타가 지닌 구조와 기능은 세포분비, 세포분열, 신경세포 형성에 관여한다. 발달기원주의자들은 인간의 두뇌와 생식세포에 있는 미세소관과 파상족이 필요했기에 스스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스피로헤타는 이러한 구조를 지닌 원핵생물이다. 이것이 여타 세포와 융합하여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가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뇌세포 속에는 미세소관이 풍부하다. 인간의 각종 신경 세포와 뉴런은 스피로헤타성 구조물이다. 그렇다면 뇌세포의 실체는 이러한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던 세포가 목적을 가지고 진화하여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타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의 입증은 불가능한데, 완전 동화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사건이다. 다만 그 구조의 동일성, '9X2'의 미세소관의 동일성을 원시세포의 융합의 증거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성의 수평적 교환에서 수직적 형태로의 변화에서부터 유전물질이 옮겨지는 현상인 성의 개념은 물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염도 성이 된다. 또한 공생도 성이 된다. 성이라는 유전자의 이전과 생식의 개념화로의 변화를 낳게 된 자연의 과정, 성 선택 요소와 배우자 선택 전략의 변경을 가져온 인간의 생활사에 이르기까지 미생물우주의 수십 억 년에 이르는 누적된 적응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미생물우주의 역사를 추적하며 공생의 이론을 확립한 이 저술의 궁극의 취지는 이 세계와 우주는 이질적인 것들,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이 빚어낸 비()지적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생태적 지성, 타자와의 화합과 공생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생태계 내 위치에 대한 각성이다.

 

박테리아는 인류의 진화 훨씬 이전에 이미 양자 회전 모터의 원반 모양을 갖추었고, 발효, 황 호흡, 광합성, 질소 고정의 기능을 발전 시켰다.

그들은 고도로 사회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지방분권적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125

 

지구의 대기 기체 중 산소의 농도는 21%가 줄곧 유지되고 있다. 인간이 대기의 산소 비율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는 망상처럼 터무니없는 발상도 없을 것이다. 박테리아 등 원핵생물은 그네들의 유전자 교환의 난삽(難澁), 즉 타자에 대한 자유로운 일상적 수용이 만들어 낸 전()지구적 네트워크로 인한 자동 조절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린 마굴리스의 미생물우주에 대한 이 글들은 결국 지구라는 한정된 생태계의 진정한 점유자는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사(NASA)의 대기(大氣)화학자인 제임스 러브록가이아 이론은 대기권의 온도와 기체 조성이 미생물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조절되고 있다는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화성 탐사에 앞서 자신의 가이아 이론을 토대로 한 실험에서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단언했다. 즉 미생물에 의한 대기의 통제 흔적이 없다는 확신이었다. NASA는 이 말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이제 모든 지구인이 알고 있듯 화성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오직 변화와 번성하는 존재만 있을 뿐이다.

 

계통파충류로부터 적응방사라는 진화학적 발전을 이룬 현존 생물의 하나인 우리 인간은 미생물에서 기원한, 미생물의 물질대사 변혁물의 하나일 뿐이다. 이 공생 세포 이론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며 폄훼하였던 발생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조롱이 지금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몸체란  유전자의 운반체라는 개념만큼은 린 마굴리스의 진핵세포들로 연결된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몸체와 상통한다. 오늘날 공생 세포 이론은 주류 이론이 되었다.

 

이 사려깊고 철학적인 자연과학의 역작을 이제라도 읽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고등 기술을 독점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확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인 우리 인간은 기어코 미생물우주의 신비를 벗겨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분명 새로운 생물의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DNA와 인간과 기계를 기본으로 하는 실체가 됨으로써 진화의 가속화를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능을 지닌 기계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으며, 다가 올 초우주 시대의 생명의 미래를 가정하는 책의 마지막 장 미래의 초우주는 생명과 새로운 행성 세계의 창조를 위한 탁월한 지적 상상력을 북돋아 준다.

 

진화생물학의 위대한 업적이자 생명의 진실, 인간의 위상을 숙고하게 해주는 고귀한 열정에 진심으로 머리 숙이게 된다. 이 자연과학의 엄청난 성취는 여느 철학적 사유를 훌쩍 넘어선다. 그야말로 지구라는 생명의 대서사시이며, 최유미 박사의 말처럼 감흥의 생태학이고, 마주침의 유물론이다. 서로 밀려들어가고 융합,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존재조건임을 이 책을 통해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고귀한 지성을 만나 아름답다는 말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름다운 지성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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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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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가로질러 서로를 발견하려는 인간들의 드라마가 

거리에서 끊임없이 펼쳐진다.”   - 52쪽


어쩌면 자기 내면의 풍경 속에 갇혀 사는 우리들이 이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외부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환상을 쫓는 분열적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위의 문장이야말로 오늘날 강화된 복잡성의 상징인 도시에 발 붙이고 사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고닉이 우리 몸의 감수성을 무너뜨리는 외부 세계인 거대 도시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인간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환상, 외로움을 묻어두고 그로부터 벗어나 타자에 대한 허기와 호기심과 고독을 살펴보려는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이저벨 볼튼의 소설 속 여자가 인생과 흥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사랑할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닉의 이해도 이러한 인간을 향한 친밀감과 정다움이라는 특정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나는 도시라는 공간이 야기하는 단절에 포획된 삶, 감각적 수동성이라는 현대적 징후에 갇혀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닉은  번잡한 도시의 아름다운 단절이라고 쓰고 있다. 고닉은 현대 도시의 공간이 빚어내는 단절, 그 고립, 혼자됨을 사랑할 수 있을만큼 자기 내면에 미치는 불가피한 영향들, 그 자신을 빚어놓은 것들을 그대로 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들이 다 끝장난 뒤 인생의 궁극이란 것은 없다는 깨달음, 욕망의 주체가 되는 데 골몰하는 사람임의 자각, 남자들에 대한 환상이 걷히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놓인 극복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얇은 막과 굳이 화해하지 않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갈등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지혜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활기와 여유로운 솔직함으로 펼쳐낸다. 그것은 인생의 곡절을 모두 이해한 체 하는 자의 여유가 아니라 갈등과 괴리, 환상과 정서로 짜인 자기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과의 친구 됨이다.

 

보이지 않는 속박, 내면을 구속하는 갈망과 환상에서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고닉의 어머니처럼 마춤맞은 것, 이상화된 무엇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견고한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다가가는 것이 대단한 철학적 사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고닉은 일상의 마주침들, 흔한 도시의 군상들과의 일화에서 유쾌하게 불러낸다. 시내버스 안에서 쩌렁하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인간과의 말다툼에서  인생의 무작위성이란 게 다 그런 법이라는 해학적 진실을 길어 올리고, 사랑의 법칙엔 기대가 수반된다는 생각이 순전히 헛다리짚은 감상이었음을 고백하며, 우리 인간은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횡단하다 이따금 국경에서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임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환상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처럼  자기인식이라는 교정을 필요로 한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한 어린 시절 뉴욕의 변두리 동네 브롱크스의 남자 친구와 침대에 뛰어들어 상상도 못했던 강렬하고 달콤한 행복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감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욕구들이 쾌락을 침범하며 자신을 빚어놓은 것의 정체가 불안임을 발견하기도 하고, 엄마가 너는  내 울분을 조제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이 무정한 것아!’”라고 외치게 했던 왜곡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파먹고 살아왔던 자신의 오류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도시에 몰려든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 사람들 개별에 주의깊은 시선과 이해를 지니고, 그 인물들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 그것은 타자로부터 언뜻언뜻 발견하게 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무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회하는 동료가 지닌 거리감의 성격으로부터 내면의 유리(遊離)를 발견하며, 자신 안에서 그 위험한 단절의 작동을 느끼는 것도 인간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친밀한 우애의 감각일 것이다.

 

내게 이 도시라는 공간은 그저 뚫고 지나가기에 급급한 하나의 통로였을 뿐, 지나는 길의 도시와 사람들의 풍경을 시야에 담지 못했다. 도시의 공간과 그 속의 인간들과 단절감을 강화시키는 이러한 일상은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정작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 단절을 고립 자체로 이해했음이다. 그래서 이 도시가 뿌려대는 거대함의 대량 소비에 그저 노출되어 무너지는 감각적 민감함에 분노하며 불화했다.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에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215

 

나는 이 고립과 도시와 인간이라는 타자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외로움에 수장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원하지 않은 고독이 쓸모있는 고독일 리가 없었다. 잃어버린 고독의 아름다움,  도시를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족적을 남기며, 허기로 디디고 선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주는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며, 넉넉한 양분이 되어 내 영혼을 정련해주는 친구 레너드 같은 우정을 경험할 그런 애착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면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유동적이고 불안정함에 매몰되어 이 변화의 인식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닉의 말처럼 심각한 도덕적 혼란을 예고하는 도시의 불온한 공기에 대한 나의 냉담함과 적대는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멜랑콜리, 도시에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 말이다. 그런데 나는 고닉에게서 배운다.   후회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있음을 응시하고 선 자기를 지각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노스탤지어의 부재, 그 차갑고 고요한 순수한 응시를 할 줄 몰랐던 내 고독의 실체를.

 

인간 서로간 경험의 반향인 도시와 사람들, 자기 분열과 자기 지각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매일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이 책의 유쾌하고 지적인 도시와 인간의 우정에 대한 포착은 번잡한 대도시의 단절 속에 비친 현대인의 삶으로부터 그 고립을 어떻게 아름다운 단절로 수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닉의 동네 치과의사 빅터가 위로하듯,  사랑이 넘쳐요. 다들 마음을 쓴다고요. 다 흘려보내자 구요.”라며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느낌을 여과없이 서술해주며, 누군가의 대화에 반응해주고 그 반향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고닉에게서 이 도시와 사람들을 친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그 경험의 지혜를 배운다. 불경스러운 불만이 끝없이 가로막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 도시와 인간들이 강박적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징징대는 나를 보았다면 괜찮은 수확이리라. 혼자됨의 사랑, 지적인 진솔함에서 우러나온 생기 넘치는 대화들, 그리고 이로부터 연원하는 무한한 자기 지각의 이야기들에 매료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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긋닛 3호 : 노동과 우리 긋닛 3
이상헌 외 지음 / 이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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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간지 형식을 지닌 소설집 긋닛의 존재를 3호가 발간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게재되는 소설들의 주제를 포괄하는 발문격인 에세이 한 편과 세 편의 단편 소설로 엮인 문학지다. 아마도 노동과 우리라는 3호의 주제어가 내 시선에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책은 푸른 못, 마르지 않는 눈물이라는 에세이로 시작되는데, 이 제목은 소설가 강경애가 1934년에 쓴 장편소설 인간문제의 제재인 원소라는 이름을 갖게 된 어느 마을의 연못에 서린 전설에서 길어 온 것이다. 본디 메마른 땅이었던 곳이 기만당하고, 억압받으며, 배제된 이들의 설움의 눈물이 뿌려져 생긴 못이다. 그것이 얼마나 깊었는지 푸른색을 띨 정도이니 가해진 폭력과 착취의 강도와 빈도를 말해서 무엇하리요.

 

예나 지금이나 저 원소의 물은 푸르고 푸르다.

흰 옷감을 보면 물들이고 싶게 그렇게 푸르다.”   -강경애 ,인간문제에서

 

그런데 이 푸른 못은 취약한 자들의 한()을 누적시킨 인간 악()의 상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식인풍습에 포박된 노동자들이 찾아가 물의 주체였던 수많은 넋을 위로하고 위로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90년 전 식민지 한국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던 문제는 21세기 바로 지금도 변화없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동일한 질서체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수록된 세 편의 소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쳐야겠다.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 뭔가 흘러 내렸어. 피가 흐르는 것 같다,...”

민병훈 작, 그들이 하지 않은 일들에서

 

민병훈 작가의 그들이 하지 않은 일들은 비행기 이착륙 시 활주로 및 항로 인근 영역에 날아드는 조류를 퇴치하여 항공 운항의 안전을 도모하는 조류 퇴치작업자의 이야기다. 공포탄을 쏘아 새들을 항공영역에서 몰아내는 반복되는 노동이다. 주인공은 이 직업에 자기 인생을 거는 일에 회의적이다. 기숙 생활을 하며 공항에 매여지내며 같은 노동을 반복하고, 몸의 고통이 늘어만 가는 삶. 자본의 속성이 무엇이라 했던가. 자기 축적이다. 효율성, 즉 이윤이 주도하는 질서다. 최저임금으로 무한 노동을 이용하며, 투입 노동력 가치에 훨씬 밑도는 임금도 아까운 것이다. 자본의 자기충동은 갈 데까지 가려고 한다. 새들의 천적을 닮은 로봇 새, 팔콘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퇴치반원들의 줄어 든 노동시간만큼 임금 삭감의 통보를 받는다.

 

소설은 이로인해 야기되는 퇴치반원들이 부딪치는 사회적 문제들을 보여준다.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의 이른 귀가와 미래에 드리워진 암울함, 세상의 변화를 단지 치열해진 경쟁과 생존투쟁의 장이라는 추상적 변화로만 인지하는 부모세대와 그 변화의 구체성을 현실로 마주하는 청년세대의 불통의 문제, 그리고는 인간의 기계에 대한 질투라는 단순 논리로 이해하는 자본이라는 세상이 갖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의 무지를 짚어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이해를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것 같다. 인간의 소망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강제되는 양상이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음에도 그 영역들이 취약한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다보니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도 어디선가 이러한 추이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라는 실험용 유리컵(beaker)을 알콜 램프가 데우고 있다. 우리가 그 점진적인 열기를 체감할 때에는 이미 세계에 모든 일이 벌어진 후일 것이다.

 


천현우 작가의 임자는 무식한 꼰대, 그야말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조금도 지니지 못한 치명적 결점을 지닌 인간이 등장한다. 종업원 14명의 주물공장 운영주인 쉰다섯 살 차봉필은 단 한 번도 출근한 적 없는 자신의 딸을 직원으로 올리고 임금과 상여금을 지급하지만, 직원들에게는 철저하게 인색한 인물이다. 사건은 1년 남짓 근무했던 직원이 출근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어느 날들을 얘기한다.

 

한 명이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작업 공정에 차질이 발생하고, 주문 물량을 납기에 맞추어 생산하는 데 지장을 받을 만큼 노동밀도가 높은 공장이다. 며칠 째 출근하지 않던 직원이 나타나 사직서를 제출한다. 작가노트에 언급되고 있듯이 한국 사회의 대다수 영세 공장주들의 인식이란 대개 엇비슷하다. 자신들은 중산층의 삶을 살면서 민주화 시대 이전의 인식에 머물러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 변화된 세계에 대한 인식능력이 그들 젊은 시절의 영화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법적 준수는 이들에겐 자유의 억압이고, 노동자의 연차 요구나 정당한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놈은 후레자식이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모든 것은 공산주의자가 대통령이 된 까닭이다. 소설가 강경애가 말한 인간 문제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일하는 자와 부리는 자의 앙상한 관계‘, 이 불변의 인식이 존재하는 한 이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을 수가 없다. 차봉필의 자유는 검찰정치를 하는 현 정권의 우두머리의 자유와 닮았다. 자신을 위한 자유,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자유, 자기 편익과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유. 이 반동적 자유가 이 사회의 저변에 넓게 깔려있다.

 

연속되는 근무시간에서 중간에 휴식시간으로 빼냄으로써 편법으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는 곳이 즐비하다. 이것이 오늘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이를 지켜보던 한 노동자는 마음을 다진다. 역시 기계는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서 못 쓰는 법. 올해는 반드시 사직서를 내고 말리라.” 차봉필, 자신이 저지르는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깡그리 적으로 돌리는 인간, 꺼져, 너 말고도 일할 놈 많아!”, 이 사회가 썩은 내 풀풀 풍기는 이러한 관성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평등한 존엄이라는 정의를 토대로 한 민주화된 국가의 도달은 아마 요원할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한유주 작가의 커뮤니티는 한 동네의 풍경을 미시적으로 관찰하며, 그 속에서 삶을 연기하는 인간들의 자기연민, 이기적 욕망, 소유의 허기, 피해망상적인 불신의 세계, 신산한 노동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인간들의 그 소소한 일상들에 배어있는 정형화된 모습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가련하고 외로운 군상들, 그럼에도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행위를 베풀기에는 왠지 아깝게 느껴진다. 대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게 하는 것일까? 이 사회가, 이 세계가 우리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는 불온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인간 삶의 진보를 저해하고, 이 시대의 불의를 촉발하는 요인들을 압축적으로 사유하도록 이끄는 글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다. 비대면, 기후위기에 이은 노동, 아마 다음 이슈는 지방문제와 부채()의 얘기가 될 것 같다.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학을 읽으며 현재의 우리들을 돌아보게 하는 맞춤의 문집(文集)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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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세계사 보급판 세트 (블루 커버 에디션) - 전3권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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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되어 사건 속의 주체가 되면 그것의 외연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게 되고, 실체의 윤곽을 보다 실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훼손을 가하려는 어떤 세력이 있다고 여겨지면 그 반대 집단에 대한 적의로 이익훼손 행위의 이면이나 관련된 사항들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만일 드러나지 않은 것에 보다 크고 장기적이며 궁극적인 이해의 부분들이 있다면, 결국 당위적 행동을 불러일으킨 훼손된 이익이라는 사건에 대한 적대적 반응은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처지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책은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이것들을 보게 한다.

 

이 책은 이처럼 관점을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서술된 세계사의 오만과 그로인한 잘못된 역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세계의 역사가 자신(유럽)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기만과 착각은 그 당사자라는 좁은 시선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문제를 유발하는 주체로, 세계사의 반동적 존재임을 입증하게 될 뿐이라는 의미이다. 실크로드(Silk road)세계사라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세계사를 비단길이라는 고대(B.C. 119)에 처음 열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물질과 문명, 사상과 종교가 어우러지는 교역로라는 의미의 수식어가 붙은 세계의 역사인 이유이다.

 

또한 이 어휘는 고대에 놓인 이 단일한 특정 지리를 연결하는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의 주요 자원의 중심 연결지대를 뜻하는 보다 확장된 개념을 지닌다. 인간의 접근을 가로막는 타클라마칸과 카라쿰 사막, 텐산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 파미르 고원지대를 넘어서 동과 서의 육상로를 잇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며, 이 동서를 연결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해상로로 확장되기도 하며, 세계의 패권을 확보하게 하는 세계 권력 지배의 루트(route)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크로드는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과 함께 새로운 자원 확보의 길이 생성되기도 한다.

 

책에는 총 9개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세계의 지배적 욕망이 되는 자원 -이것이 인간 혹은 물질이 되었든, 사상이나 종교가 되었든 무엇이건 - 의 변화된 지리적 루트를 보여준다. 기원 후 2000년의 역사시대에서 인류가 무엇에 현혹되고, 그 현혹을 지배하기 위해 어떠한 걸음을 걸었는지, 그것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였는지,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는지, 혹은 부정적이었는지, 21세기 오늘에 생성된 새로운 실크로드는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인류는 이러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어떤 행위가 요구되는지를 헤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변화의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 낸 계기와 그 기회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깃든 이야기들이며, 그것이 바로 지배력이라는 힘의 생성이다. 이 힘은 자원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로 이어지며, 그것은 위협과 폭력, 전쟁을 동반한 우월적 지배력의 행사의 동력이다. 이 원시적 야만성의 동력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 질서의 점유에서 어떻게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는 가에 대한 사유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원 후 8세기의 이슬람 제국들의 풍요와 그 번영이 야기한 주변부의 양상들은 흥미로운 중세 유럽의 상황들을 보여준다. 당대에 루시로 불리던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지역인 바이킹들이 번영의 중심인 페르시아에 노예를 팔아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동로마를 위협하던 튀르크 종족의 하나인 하자르 족의 아시아 북부 스텝지역의 교역 거점 확보를 통한 지위 확보의 행태 등은 명맥을 유지하던 동로마 콘스탄티노플로 대변되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문명적, 군사적 취약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만 한 내용인데,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몽골의 세계 등뼈지대의 침탈이 가져온 사건이 세계 지배권을 오히려 유럽으로 전환시켰다는 아이러니이다. 몽골의 서진(西進)이 몰고 온 것은 중국과 중서부 아시아의 선진 문물의 유럽 전수와 같이 유익함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페스트를 몰고 온 경로이기도 했으니 이 질병은 당시 유럽인의 인구수를 3분의 1로 줄여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아이러니는 이 참혹한 죽음의 무도가 끝난 후, 유럽 세계는 페스트가 불러일으킨 공포와 달리 줄어 든 인구로 인해 자원 배분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 구조 작동방식의 전면적인 재구성을 낳고, 사회의 부가 이들 유럽 사회에 고르게 배분되는 효과로 이어졌으며, 이는 소득의 여유가 되어 그들 산업의 투자 가속화로 인해 산업 발전을 자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 사회의 급속한 기술의 발전의 동력이 되었으며, 시민 의회가 등장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몽고의 세계 지배권을 확장시킨 서진이 시작된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200년간이 오히려 주변부 유럽이 동방으로부터 오는 물질과 사상의 교역 거점을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세계의 변방이었던 유럽이 중심부로 얼굴을 드러내는 세계사적 전환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한 세상의 심원한 우발성을 목격하게 한다. 아마 이 극적인 세계사의 분수령적 시기가 세계사가 유럽 중심사로 다시 조작되어 쓰여지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 빈번한 이웃들과의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다져진 전쟁 도구의 발전은 정말 우스꽝스런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신감은 동방이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성지의 탈환이라는 환상적 야욕으로 분출된다는 점이다. 성지를 탈환함으로써 거룩한 신앙의 회복을 이루겠다는 노골적이고 거짓투성이의 명분을 내걸고 영토 확보를 위한 출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콜롬부스라는 인간 또한 이러한 사기술에 편승해 거짓 명분을 내걸고,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 대서양으로 출항하는 것인데, 이는 인도아대륙의 풍부한 자원과 문명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루트를 찾아내기 위한 은폐된 야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은 배제된 채 서인도제도, 즉 중앙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한 창의적 탐험가로 배우고 있다. 인도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 독점함으로써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동방과의 교역 거점을 이미 점유하고 있는 경쟁 도시국가들의 방해 없이 자원을 지배하고자하는 욕심의 행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콜롬부스가 도착한 곳은 인도의 서쪽 해안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문명적 물질도 보지 못했다. 그는 거짓 보고를 통해 풍부한 금과 은, 무진장한 보물이 있었다고 선전한다. 그의 오판과 실패야 어쨌든 이 서쪽 대서양으로의 탐험은 새 영토에 대한 환상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코르테스의 아즈텍 문명의 잔혹한 침탈과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주변부에 불과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얻는 기회로 이어졌으니 기록될만한 역사적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을 비롯한 자원은 약탈품, 그러니까 공짜로 얻은 부다. 이 넘쳐나는 부는 항상 노예를 부른다는 것을, 다시 말해 한 부분에서 다른 곳으로 부가 집중된다는 것은 빼앗긴 곳의 속박과 함께한다는 불변의 철칙을 보여준다. 부와 속박은 함께한다. 기적에 가까운 부의 증가는 에스파냐를 유럽의 강자로 만들어주고, 또한 노예무역의 지배적 위치로 인하여 쌓은 부는 교황을 조종하며 종교적 권위를 두른 맹주로 군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데,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유럽이란 얼마나 혹세무민하고 위선적 명분으로 종교를 뒤집어 쓸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입증한다.

 

아마 주변부중의 주변부였던 여전히 별 볼일 없던 섬나라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와 벌이는 전쟁의 결과처럼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될 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튀르크에 의한 함락으로 동로마라는 고대와 중세 유럽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유럽, 잉글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잉글랜드의 부상(浮上)은 어쩌면 인류사의 비극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유럽의 역사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부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약탈적 종족들이었다는 것이 옳은 해독일 것이다.

 

이웃 도시들과의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을 통한 약탈, 지배권의 독점을 위한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으며, 그것은 이들의 행태 저변을 이루는 탐욕스런 야만성이다. 이들 착취 문명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라 부르며 마치 옛 영화가 있었던 주인공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세계사의 주변부였던 유럽은 이 때 비로소 처음으로 세계의 중심에 낯을 들이민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표현처럼 그냥 네상스(Naissance;탄생)’라 부르는 것이 진실한 언어일 것이다.

 

16세기 이후 이 책의 역사 기술은 더욱 신랄한 언어들로 바뀐다. 잉글랜드가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함에 따라 세계사는 약탈 이데올로기에 의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도둑놈 눈에는 모든 것이 도둑질의 대상이요, 타인 모두가 도둑놈으로만 보이는 것이라고 하는 말처럼, 잉글랜드의 관점에서는 자신 외의 모든 국가는 약탈의 대상이요, 적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 말은 상상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이들이 저지른 모든 역사의 증거가 그렇다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의 시기에 이르는 이 책의 서술은 잉글랜드를 비롯한 후진 유럽 국가들의 세계를 향한 탐욕과 약탈의 역사이다. 서로 증오하고 배신하며 죽이는 역사, 타인과 타지역을 유린하고 수탈하며 기만하는 배신의 역사, 이로 인해 골 깊은 불신에 매몰되어 불안을 지우기 위해 폭력과 전쟁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역사를 보여준다. 동방의 자원 거점지역과 산유국들의 독차지를 위한 양차대전의 은폐된 동기들, 믿지 못해 영혼 없는 동맹을 맺고,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불신의 불안으로 뒤통수를 치고 상대를 향해 침략을 서슴지 않는 영국을 비롯한 독일, 러시아 등 이들 유럽국의 행태는 식민지 수탈과 제국주의의 혐오스러운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오늘에 이어지는 세계 질서의 뿌리에 도사린 속성을 보여준다.

 

왜 이슬람 국가들이 모여있는 서아시아와 발칸, 크림 반도에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 혼돈에 허우적대는지 그들에게 쌓인 세계에 대한 불신의 근원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영국, 러시아, 미국, 세 강국이 2차 대전 중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필로 죽죽 그어 댄 남의 나라 영토의 분할과 지배권 할양이 초래한 불의한 힘의 남용이다. 주인있는 남의 나라 자원을 마치 무주공산의 자원처럼 수탈하는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의 행태나,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저항하면 위협과 폭력, 전쟁을 불사하고, 해당 산유국들의 군주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영합하면서 그들 국가와 인민들을 빈곤의 나락에서 신음하게 하는 것은 이들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이 대외 명분으로 내세우는 민주화 및 건전한 사회적 안정화라는 허울 좋은 위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등, 이들 국가들이 서방국가들에 반기를 들어 올리고 그들의 어떤 말에도 불신을 보이는 것은 근대 수백 년 동안 이뤄진 이들의 기만과 배신, 착취와 수탈이 초래한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영국의 페르시아(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꾼 것이 1972년이다)로부터의 지배력 후퇴와 미국으로의 힘의 불가피한 이전은 영국에 대한 이들 산유국의 증오와 혐오의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의 일례라 할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을 보이던 이 이슬람 지대가 근본주의적 종교 지대로 변화한 것은 이러한 유럽 제국주의의 오랜 기간의 기만과 수탈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쥐어짤 수 있는 부의 밑바닥까지 훑어가며 저지르는 그 잔혹성은 오늘날 유럽의 우월적 부의 중심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실패가 야기한 근래의 상황이나 이라크 침공의 거짓 명분, 지금도 이란에 취해진 금수조치와 금융거래 정지로 인한 미국과의 갈등에 도사리고 있는 제국주의적 추악한 이기적 탐욕의 뿌리를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위선과 기만정책은 한국도 예외 지대가 아님은 물론이다. 2000년간의 역사 시대를 한 마디로 논하라한다면 아시아 대륙의 등뼈를 지배하기 위한 쟁탈의 역사라 할 것이다.

 

실크로드, 동서를 잇는 루트에 위치하여 물질과 사상과 종교가 모여들던 곳, 풍요와 번영으로 화려한 문명이 꽃 피던 곳, 이들 중서부 아시아 지역의 거점 지역을 차지하려는, 또한 그들을 복속하고 점령하기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역사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도달하면서 제국주의 유럽 중심의 시대는 저물고, 그들의 말처럼 필연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재조정하는 정책을 세워야 하며, “2040년까지는 전환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절제된 예측의 시대가 도래 했다.

 

자원의 지배와 그 거점지역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빛나는 통찰을 통해 탁월한 교훈을 읽도록 촉구한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오래된 변증법적 전환, 즉 노예의 주인 됨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보여줌이며, 단기적 이익 앞에 사라진 도래할 장기적 상황의 끔찍함에 눈을 감았던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행태로 발견케 되는 폭력의 야만성과 자멸성, 그리고 종교와 전쟁과 상업의 관련성과 그 불가분한 동반적 교류 및 진퇴의 양상들, 인간의 부 축적과 노예라는 인간 상품 거래의 상관성 등 무궁무진한 역사적 진실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국제 질서, 국가 간의 외교 근간에 놓여있는 비밀과 그 은폐된 위선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질서의 시대에 어떤 선택이 유효할 것인지를 숙고하게 해주기도 한다. 지금 아시아의 등뼈 지대가 다시 부흥하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르네상스다. 새롭게 복원되는 실크로드,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뿌리, 그 연원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들은 이제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주변부에 여전히 머물러 있을 것인지, 중심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와 실천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는 최적의 역사서가 되어 줄 것이다.

 

주의 깊은 통찰과 예리한 역사 비평의 시선이 우아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읽는 이가 지루할 틈이 없는 저술이다. 숨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두툼한 이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세 책으로 분권된 판본이길 망정이지 합본된 책이었다면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외교, 통상산업, 국방 분야의 관리들과 정치인들, 지혜를 쫓는 청장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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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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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책의 내용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리뷰어의 판단이 개입되어 

저자의 의도에 대한 비(非)의도적 오독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 자본주의는 무수한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모순을 시정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의 제도적 질서를 이 문제 많은 자본주의에게 헤게모니를 쥐어주기까지 하고 그 어떠한 대응이나 탈취를 위한 기획이나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접근 경로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짚는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위 고전적 경제논리에 입각한 이해에 전념하다보니 그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에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자본주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이고 오늘에까지 일반적이고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사적소유, 시장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이라는 단일 특성으로 바라보는 한 결코 자본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질서”,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라는 단일 특성이 아니며, 경제에서 분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작동의 근간인 -경제’(경제외적)기둥 - 생태자연, 돌봄 등 재생산, 법을 비롯한 국가 권력, 수탈 영역 - 을 포함하는 은폐된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는 자본주의의 어떠한 측면에 대해서도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라는 것이다. 각 요소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요소에 제아무리 처방전을 내봐야 고쳐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환상을 실재라고 승인하는 조금은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같은 말은 법률차원의 자유와 시공간적 자유라는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키며, 자본가에 종속적이고, 시공간적 구속을 받는 임금노동자임을 지워버린다. 또한 자본의 목적인 자기축적, 즉 자기자본의 확장이라는 고유충동을 부정한다. 때문에 발생한 잉여의 사회적 할당이 시장에 맡겨져 노동자 등 사회적 복리와는 무관하게 아주 자의적으로 배분되어 불평등을 내재적으로 보유하는 도착적 특성이 마치 없는 듯 행동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조화)이라는 시장에 대한 환상, 자유노동이라는 환상...,게다가 자본가가 축적하는 잉여는 노동 생산의 이윤만이 아니라 비경제 요소를 무상 또는 해당가치에 훨씬 모자라는 저가로 사용하여 얻는 거의 수탈에 가까운 공짜 이익까지 더해져 사실 자본가의 축적은 더 큰 규모로 이뤄진다.

 

바로 이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이 무임승차하면서 한 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자기 축적에 전념함으로써 야기되는 전방위적인 사회적 폐해의 요소들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전경이 아닌 배경으로 밀쳐지고 분리되어 눈앞에서 치워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내는 것이다. 내적 모순으로 인류를 신음하게 하는 헤게모니를 쥔 자본을 시정할 수 있는 대항 질서(대항 헤게모니 연대)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자본을 경제라는 범주에 특정함으로써 경제 이외의 것들과는 무관한 듯 설명하며 배제한 것, 그러나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토대로 하여야 하는 것 말이다. 자기 축적을 위한 근본적 요소임에도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을 하지 않으려는 요소들. 낸시 프레이저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생태 자연, 공적권력과 정치, 그리고 착취와 수탈, 크게 네 가지로 분류 정리하고 있다.

 

노동이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입되려면 노동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위해 무수한 요인들을 필요로 한다. 정서적 신체적 돌봄, 가사, 육아, 학교, 다음세대를 낳고 사회화하는 일, 공동체 구축, 사회적 협력을 뒷받침하는 가치 지평의 가르침 등등 사회적 유대와 공동인식 유지를 위해 기여하는 일군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비경제 요소의 하나이다.

 

이들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자본의 생산 세계에서 분리되어 개별적인 사적 가정의 영역으로 유폐되고,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라는 중차대한 진실을 가려버린다.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분리되어 재생산은 젠더화되고 여성의 차지가 되어왔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은 이것들마저 상품화하여 여성을 대거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에 충원한다. 이것은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그것과 다시금 얽히는데, 착취와 수탈의 요소라는 노동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여성이 일하는 여성 대신에 저가의 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가난한 여성의 가정은 돌봄의 사각지대화 되어 서발턴을 고착화시킨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공짜로 먹어치우며, 이 비용을 사회에 전가한다. 자본 축적, 즉 잉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것에 비용을 치루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불화라는 자본주의 위기, 내적 모순을 드러낸다.

 

생태자연이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가장 파렴치한 뻔뻔함의 하나일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무한히 회복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전제 하에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분할하여 자연은 무상 이용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선인데, 경제는 가치 발생의 창조적 인간 행동의 장()이지만, 쉽고 무한히 보충할 수 있는 자연은 가치 없는 영역이라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만이자 왜곡인데, 생태 자연은 자본 생산의 필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자본의 생산, 자본주의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 이용하고 그 부담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이 또한 사회에 전가되고,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 일컫는 오리무중의 모호한 지대로 자취를 감춘다.

 

공적 권력과 정치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 경계를 오르내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 특성을 지닌다. 자본은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규제를 폐지하고, 조세의 감면과 탈세를 추구한다. 즉 탈정치를 주장하지만, 자기 확장, 자본축적에 장애가 되는 것을 파괴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권력과 정치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 내용의 실행과 분쟁을 심판하고, 노동자 저항을 진압하며, 질서를 보장하고, 이견을 관리하는 국가권력은 시장 교환이라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원초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요구하며 작금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방임을 지향한다.

 

이미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이미 영역간, 그 경계의 자의적 융통성으로 인해 불의와 부패성이라는 위기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은 이러한 정치적 비용, 공공재의 비용에 대한 어떠한 책임과 부담을 지니려 하지 않는다. 이 역시 공짜이고 무임승차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불평등과 불화의 문제인 것은 그 내적구조의 태생성이 지닌 반()민주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행태, 공공기관 및 그 자산의 민간 매각. 건보료를 비롯한 국민연금 등의 인상이라는 공적 부담의 회피, 대기업 조세감면, 금리의 폭발적인 인상 등은 민주주의 정치의 조건을 파괴한다.

 

금리 인상이 자본의 파렴치한 무한축적의 동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무엇에 견줘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자본이 사회와 자연의 부를 빨아들이는 일은 부채가 한다. 자본은 즉각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자본을 통해 대중을 훈육한다. 금리 인상은 부채상환에 압박을 받는 사적 개인의 몫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계에 선 많은 이들을 빈곤계층의 나락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자본은 자기 축적을 확보한다. 여기에 정치권력은 막대한 떡고물을 받기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지원한다.

 

이러한 실태를 여기에 모두 열거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가 될 듯하여 자제토록 한다. 자본은 외형적으로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얽혀있다. 분리함으로써 자본은 이 비경제 요소인 국가권력, 공공재의 이용을 위한 아무런 비용도 부담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사회질서는 그 윤리적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다. 이 질서의 혼란이 야기한 복구비용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대중의 몫이 된다. 그것은 시간의 고통, 재정적 고통, 삶의 견딤이라는 정서적, 육체적 고통, 민주주의의 정치적 지향성이라 사회 윤리적 비용의 부담이다.

 


네 번째 요소인 착취와 수탈은 역사적, 지역적 시간에 따라 형태적 형상이 변화되어 온 비경제 요소이다. ‘착취란 국가가 정해 놓은 법아래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 잉여분을 통한 자본 축적을 말하는 것이며, ‘수탈이란 법이 보호하지 않는 영역의 노동, 즉 가계의 생계가 불가능 할 정도의 임금 또는 무상으로 빼앗는 잉여를 통한 자본축적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그 경계를 변경하며 인종주의와 주변부 지역(예로서 식민지 또는 이에 준하는 포스트 식민국가 등 제3 국가 등)으로부터의 강탈에서부터 현재의 플랫폼노동이나 이 밖의 임시직 노동을 비롯한 새로운 인클로저(물의 상품화를 위한 토지 수용, 식물의 소유권화, 터미네이터 씨앗 등)로 인한 박탈로부터 챙기는 공짜 잉여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준다.

 

이들에게는 사회안정 보험의 수혜도 받지 못하고, 착취 노동자로부터도 경멸받으며,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빼앗기며 아무 발언권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수탈 대상 계층과 지역민은 제도화된 사회질서의 변경에 그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한다. 택배노동자, (음식) 배달 노동자, 경비 노동자 등 긱(geek)노동 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폭행과 불이익의 수용이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비경제 요소들은 결코 그 요소 자체의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불의가 아니다. 이들은 상호 엮여있는데, 이것들에 대한 자체적 요인만으로 문제 해결을 해보았자 미봉책이거나 시늉에 불과한 꼴이 되고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적으로 곪아가기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남성중심 사회를 그 어떤 중심도 아닌 기회 평등과 공정을 외치며 여성의 일자리 진출을 하나의 전형적 모델로 등장시켰다. 소위 맞벌이 가족이라는 해방 지향 운동으로 보이지만 시장주의자들이 환호하고 나선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는데 아주 유용한 프로파간다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시장 자본주의와 공모하며,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특권을 지닌 여성이 가난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유례없는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공짜 재생산 비용의 비난을 회피하고, 마치 존재하는 문제가 아닌 듯 책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일 요소의 문제로 접근하면 다른 파생적 문제를 낳는 비경제 요소의 상호 엮임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착취와 수탈의 영역과 협력해야 하며,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경계에 대해, 또한 생태자연의 영역과 연대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성과의 연대 문제가 아니라 비경제 요소 상호간의 연대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잠자리를 함께하며 문제를 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하는 집단의 행동도 또한 신자유주의의 놀음에 동참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외치는 불가능한 접근으로 자본주의의 축적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에 해방이라는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는 역할을 해 온 것이 페미니즘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질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여 인민대중이 일어날 때 페미니즘과 현재의 좌파, 인종주의는 거부되는 형국을 불러 올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분열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분열된 대중은 결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지향하는 추악한 자본 축적의 동기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회 정의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그럴듯한 해결은 새로운 왜곡의 시작을 알려 줄 뿐이다. 이의 역사적 실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겠다. 낸시 프레이저의 목소리(이 책cannibal capitalism)를 참조하시라는 조언으로 갈음하여야겠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극우화된 현재의 권력은 자본의 충실한 충복들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자본축적의 동기로 가득한 대기업의 출자 기업들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확장을 방해하는 요소와 세력은 살해하여야 하는 대상 일뿐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자본가의 미디어 매체들이 바보같은 이 정권을 기를 쓰고 지원사격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음해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당위적 현상이 노골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뻔뻔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와 구조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이슈가 무엇인가? 대기업 조세 감면과 공기업 매각, 공적 부담 장치들의 파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주변부의 부를 빨아들이기 위한 금리인상과 각종 공공요금의 무한 증가를 통한 자본 확장의 지원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의 해체 등 반민주주의, 반여성주의, 반생태주의, 반노동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저항하는 인간은 누구라도 때려잡겠다고 을러대고 있지 않는가? 이 모두는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가 지닌 뿌리깊은 내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비경제 요소를 외면하고 소외시켜 은폐하는 것이다.


맺는 말


책은 18~19세기의 중상주의-자본주의, 19세기~20세기 초의 식민주의-자본주의, 20세기 경제공황과 세계대전 이후의 국가주의-자본주의,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의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비경제 요소와 경제와의 경계를 어떻게 이전 은폐하며 봉합하여 지속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착취와 계급갈등을 가리기 위해 스위트 홈을 창안하여 남성 중심의 생산 경제와 여성 중심의 가정이라는 비경제로 분리하여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이에 여성주의가 대두되자 이에 기생하여 맞벌이 가족을 이상화하며 경계를 이동시키고, 급기야 부채를 통한 착취와 수탈의 지대를 만들어 주변부의 부까지 빨아들이는 자본의 민낯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은 이처럼 경제와 비경제의 경계를 변경하며 은폐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화폐가 곧 권력의 표상이 된 세상이다.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거나 적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 없음의 이 상징은 곧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며, 제도질서에서 제외되고, 결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발언권이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의 본성을 4D로 설명하고 있다. ‘분할(division)+의존(dependency)+책임회피(disavowal)=불안정화(destabilization)’,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자연과 경제를 분리하며, 경제와 수탈을 분할하며, 재생산과 생산을 분리하며 자본은 분리된 것에 등을 돌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회피된 것들, 돌봄, 생태계, 수탈대상의 노동, 정의로운 정치에 기생하고 이를 이용하면서도 비용부담도, 그 어떤 책임도 회피하면서 오직 파괴하고 사회와 인간을 고통의 신음으로 몰아넣는다.

 

책은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은폐한 내적 결함을 감춰둔 장소들에 예리한 빛줄기를 드리워 노출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단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질서라면, 새로운 질서를 우리들은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것들을 단 번에 치유할 체제란 불가능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계급주의를 청산하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분배의 공정성을 확보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는 경제, 즉 생산과 시장 교환시스템만이 아니라고 했다. 무임승차하고 돈 한 푼 내지 않는 비경제의 토대에 선 질서 체계이다. 젠더와 성, 인종적(확대하여 지역화되고 부채화된 노동),민족적 억압, 정치적 지배에 대한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경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비경제 영역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지, 효율성과 성장을 내세우는 자본의 요구를 압도하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기획해 낼 것인지 등 지금까지 자본의 배경에 머물렀던 것을 전경으로 세우기 위한 제도 설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주적 과정을 통한 결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경제에 중심을 둔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사회주의를 상상한다. 새로운 제도 질서로서의 사회 창안을. 아마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생태적이며, 보다 평등한 성과 이질성의 극복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영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교과서를 읽는다면 나는 단연코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Cannibal Capitalism: 식인(카니발)이라는 표현을 은유라 설명했지만 사실은 의미 자체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 무리를 제도화 한 것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중심메뉴는 바로 우리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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