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해외 작가들의 선(先)인세가 지나치게 높이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국내 독자들을 형성하는 작가의 작품의 경우에는 출판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를 잘아는 작가는 이러한 니전투구를 관망하다가 최고의 인세를 지불하겠다는 곳에 팔아넘기는 식이다.

 

이 결과는 달랑 한편의 단편 소설을 포장하여 국내 작가들의 장편소설이나 소설집(대개 7~10편의 단편 수록)의 가격을 넘어서는  높은 정가를 붙일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이어지고,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행태를 보인다.

이번에 비채에서 출간하는 하루키의 신간은 이러한 현상의 가장 나쁜 귀결이 아닌가 의심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러한 사정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출판사들의 자정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자본 시장의 논리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정도의 지나침이란 것이 있다.  제아무리 풀륭한 작품이라도 독자들은 작가와 출판사를 외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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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가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나 바야흐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기지개를 켜며 싱그러운 기운에 같이 휩쓸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지간하면 묵고 낡아서 활력을 막아서는 것들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이고만 싶다. 그런데 여전히 케케묵은 프레임으로, 또한 범주화시켜 그 저의가 뻔한 스토리를 반복하며 이러한 봄의 생동에 중국발 황사처럼 마스크를 쓰고, 넌더리를 내게 하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말의 구린내가 기분을 싹 잡치게 한다.

 

교활한 언어게임을 통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역행적(逆推進;reaction)인 수사학적 전략들에 신물이 난다. 정말 끊임없이 계속되는 낡고 천박한 이데올로기를 씌워 고착된 틀(Frame)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지독히도 편협한 인식에는 이젠 오직 짜증만 올라오는 것이다. 마침 이러한 편협성이 어떤 수사학적 전략과 인지적 태도에 갇혀있는지를 통찰하는 연구 저술들의 연이은 출간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이 퇴행적 논리, 이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않고 살만한 세상,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준다.

 

1. 수사학적 주장과 그 기계적 반복

 

인류역사, 문명의 진보를 언제나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전형적인 수사학적 주장의 형식과 유형을 밝히면서, 그 기계적인 주장이 담고 있는 다분히 반동적인 명제들을 설명하고 있는 앨버트 O. 허시먼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저술은 보수가 지닌 퇴행성의 민낯,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

 

그는 이 퇴행적 세력들이 사용하는 명제, 그 전형적인 수사학적 전략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역효과의 명제라고 하는데, ‘행동이 의도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에서 보듯이, ‘의도와는 달리 고용축소와 총임금 감소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즉 저소득층의 소득향상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사회통합의 고취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만을 야기하여 사회발전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반대한다.

 

둘째는 무용론의 명제이다.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즉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희화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다. 특사의 북한 방문과 북의 핵 폐기 의사,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추진을 시작할 때, 이를 두고 를 하는 것이라고 콧방귀를 껴대던 사람들의 언행이나, 역사학자 알렉스 토크빌이 프랑스 혁명을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 수사학적 태도가 악질인 것은 다수의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설득되고 세뇌당하기에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사용하는 교활함 때문이다.

 

셋째는 선()의 정책에 직접 반대하기 어려울 때, 제안된 변화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거나 이런저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위험론의 명제 이다. 서울시의 초등생 무료급식 정책을 시작하려할 때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거품을 물던 수사학이다. 이것이 저것을 죽일 것이다!’라는 제로섬 방식의 해석공식이다.

이 역행적 수사학들은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이 자기들만의 이익수호를 위해 정책이나 사상을 뒤집고 비난하기위한 논쟁태도나 전략, 그들의 설계된 위험신호를 우리가 조기에 알아차리고 경계를 삼도록 도와준다.

 

2. 믿음의 고착화, 그 인지적 태도의 무능(無能)

 

아마 위와 같은 퇴행적 레토릭(Rhetoric)의 빛나는 앨버트 O. 허시먼의 통찰에 내재한 본성의 우아하기 조차한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지 레이코프도덕, 정치를 말하다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의 두 저술은 무능하기 그지없는 인지적 태도에 도사린 도덕적 모호성의 본질을 관통해내고 있다.

 

2-1. 도덕, 정치를 말하다

 

모든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도 없으며, 이유도 또한 없다. 이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인류 문명 진보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다름, 세계관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레이코프는 바로 이러한 개별자들의 믿음이 왜 달리 형성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즉 어떻게 사람들의 도덕체계, 도덕적 신념이 창조되고 형성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곧 오늘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정치적 신념이란 것의 내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답변을 제공한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 패러다임의 원천을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가정의 두 중심 모델로 비유하여 이를 정치적 성향에 연장하여 설명한다. ‘엄한 아버지 모델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이 그것인데, 전자는 절제와 책임, 자립의 장려, 보상과 징벌, 외부의 악으로부터 보호,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힘과 권위, 자기이익, 질서의 중시라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감정이입과 공정성 장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을 돕고, 인생에서 충만함을 장려하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양육을 행동의 주요 카테고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한 인간의 세계관이 양육된 환경에 지배되어 이것이 개별자에게 세상을 범주화하고, 해석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육모델의 구분이 정당함을 갖춘 것이라면, 엄한 아버지 모델에 비유되는 보수주의의 행동 카테고리의 내용은 개념적 절대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만의 도덕적 경계를 짓고, 도덕적 힘과 권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인간의 번영과 접촉하지 않으며, 보편적 인간성과의 접촉을 거부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중을 쓰레기’, ‘고려할 가치 없는 인종이라고 서슴없이 지껄이는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보수 정치인들의 언어에서 쉽게 발견된다.

 

이들은 우리와 그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할하고, 기계론적으로 인간을 징벌과 보상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지되지 못하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들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내몬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의 집단적 세력을 구성하고, 자신들을 쓰레기라고 칭하고 있는 이들에게 생존권을 의탁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체 왜 이러한 상황이 유지되는 것일까?

 

그 답은 실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지점에 있다. 보수의 전략적인 레토릭에서 보았듯이 다수의 순진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하는 지에 대한 술책의 능란함, 즉 수사의 반복적 사용으로 세뇌된 고정된 프레임() 속에 진리를 왜곡하여 감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덕적 프레임을 장악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를 100년 가까이 장악한 빨갱이와 같은 타령이 적절한 보기일 것이다. 이 프레임에 가둘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보가 보장되는 기막힌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2017년의 시민들의 촛불 혁명이 이들의 프레임이 지닌 타락한 도덕의 실체를 보았기에 피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수사학적 전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어느 때부턴가 매우 흥미로운 조어가 떠돈다. ‘중도 보수’, 혹은 진정한 보수주의라는 야릇한 언어인데, 이러한 조어가 성행하는 시기의 특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의 실체가 도덕적 규탄을 받을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사법이라는 것이다. 때 맞춰 아시아권 어느 국가에서도 번역되지 조차 않은 ‘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진정한 보수의 첨병으로 나섰다. 여기서 저자는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사회의 질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언어적 유희를 시작한다. 마음이고 방법이라 부른다고 해서 보수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러셀 커크가 제시하는 보수주의 핵심가치 6가지를 보면 조지 레이코프의 엄한 아버지 모델의 그것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대척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인 획일성과 평등주의를 배격하고 다양성과 인간 존재의 신비로움에 대한 애정이라는 선언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거짓과 진실이 마구 혼동된 자기기만적인 인식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가치인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 문명화된 사회에는 질서와 위계가 필요하다는 믿음과 모순됨은 물론 충돌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위계, 즉 권위에 의해 나와 너를 분리하고, 평등주의를 배격하는 가치에 터를 두고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2-2.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와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레이코프의 전작인 도덕, 정치를 말하다의 두 아버지 모델의 토대위에 서있는 저술로서, 제목의 뉘앙스처럼, ‘왜 보수에 현혹되는 가라는 인지적 태도에 대한 탐색이다. 즉 주요 논의는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가 전체 세계관을 구조화하며, 뇌 속의 전체 프레임 체계를 조직한다는 인식위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체계들을 주도면밀하게 도출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수가 어떻게 진보의 프레임보다 더 활성화될 수 있는지를 풀어낸다. 레이건이나 도널 트럼프가 활용한 엄한 아버지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하는 것은 이것이 대중 배반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중들을 장악하는 프레임의 위력을 확인시켜준다.

 

한편, 이 책의 특별한 미덕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근접한 묘사로 다가오는 소위 이중 개념 소유자에 대한 성찰이랄 수 있다. 실제의 우리네의 삶에 있어 양 극단으로 이분되어있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 더 이상 적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주택가격이 끝이 없다는 듯이 치솟아 사회 전체의 고통이 되어 돌아오면 정책 부재의 정부를 비난하다가도, 성공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능력이라는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양면적 모습을 보이는 자본주의 체제 속 우리에게서 두 모델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양면적 특성을 지닌 다수의 대중을 어떻게 자기 세력화하느냐는 정치 논리만 남는다. 현실 세계에서 정말 강력한 것은 바로 진실이 아니라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다. 보수는 삶은 처절한 경쟁이며 사회는 각자도생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진보는 삶이란 모두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타자로부터 손상되거나 침해되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 기만의 정치적 논리에 희생되지 않고 마음껏 봄의 신선한 생동감을 만끽 할 수 있는 세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피곤함의 희생을 피할 수가 없다. 깨어나기 위한 대중의 노력,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펼치기 위한 공동의 가치를 일궈 나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 시민대중들의 몫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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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8-04-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님의 글 가운데 포함된 ‘엄한 아버지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제겐 유달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네요. 마침 최근에 그와 엇비슷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 흥미로운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아주 머리속에 쏙쏙 들어오는 듯합니다.

제가 읽은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루이자의 아버지 그래드그라인드는 ‘전형적인 보수주의 국회의원‘이면서 그와 동시에 ‘세뇌된 고정된 프레임‘에 아주 단단히 갖힌 인물이고, 자식들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고정된 틀 속에 가두는 교육‘을 시킵니다. 나중에 그래드그라인드는 딸 루이자의 남편감조차 자신과 복사판이나 다름없는 친구인 바운더비라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자수성가한 꼰대이자 졸부이자 전형적인 못된 고용주‘의 상징인 인물이지요. 아버지 또래의 늙은 영감에게 시집간 루이자는 남편의 온갖 고약한 언행과 생활방식을 견디다 못해 ‘감옥 같은 삶‘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 나머지 인물들은 결국 ‘각자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점점 더 파멸로 치닫게 되지요.

칼 마르크스는 찰스 디킨스에 대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과연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파업을 선동하는 노조위원장의 열정적인 연설‘만 들어봐도 일견 그 말이 수긍이 가기도 하더군요.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해고된 불쌍한 노동자인 스티븐이 악덕 고용주인 바운더비에게 하소연하는 대목을 재미삼아 살짝 덧붙여 봅니다.

* * *

˝사장님, 저는 저 나름대로 문제를 느껴왔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유능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엉망진창입니다. 도시를 둘러보세요ㅡ부자이지요ㅡ그 다음에는 여기서 살도록 끌려와서 실을 짜거나 보풀을 뜯거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평생 같은 일만 하면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집에서 지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어떤 가능성을 안고, 얼마나 똑같이 살아가는지 한번 보세요. 그리고 공장이 매일 어떻게 굴러가는지, 공장이 우리를 어떻게 혹사시켜서 멀리 있는 목적지ㅡ거의 항상 죽음이지요ㅡ에 이르게 하는지 보세요. 사장님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대표자들을 통해서 우리에 대해 장관님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사장님들은 항상 옳고 우리는 항상 그를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것인지 한번 따져보세요. 해를 거듭하고 세대가 바뀔수록 어떻게 이런 일이 점점 커지고 광범위해지고 악화되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사장님. 이걸 보고서도 엉망진창이 아니라고 분명하 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장님?˝(245∼246쪽)

필리아 2018-04-03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한 아버지의 모델에 의해 성장한 사람들중에도 많은 이들이 그 알을 깨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 알을 깨고 나올 기회가 없는 계층들이 있어요. 성인이 되기 무섭게 권력의 상위계단에 오르게 되는 부류들인데요, 이들에게 타자란 그저 이용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죠. 2018년 한국사회의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배들이 그런 예라 할 수 있겠죠. 세상의 다양함에 대한 이해를 미처 학습하지 못한 채 부와 권력을 쥐게 된 탓이겠죠. 들려주신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일화, 감사드립니다.
 

 

요즘 부쩍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무한 역행적’, 즉 논리적으로 대답이 불가능한 물음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이유의 물음에 대한 답은 논리적으로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물음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1)사실적인 측면에서 그 대답은 공허, ()와 같은 허무를 떠나지 않지만, 줄기차게 거듭하는 것은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을 부정하고 싶은 본능적 저항, 아마 삶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의미의 부여를 통해서만 이것에 반항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소설도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이 물음일 것이다. 아니 우리들은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또 자문한다. 인간은 조건반사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의미 해석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로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 것인가를 탐색하는 확장된 의미의 대상이 된다. 바로 지금 개별자로서, 혹은 종()의 집단인 사회, 국가, 그리고 인류라는 동종의 총체에서 벌어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유, 그 해석을 추상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인간, 나는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서.

 

소설의 공간적 무대는 지구가 아니다. 지구는 단지 모()행성으로서 스치듯 언급될 뿐이다. 인간 실존조건의 핵심인 공기와 태양의 열과 빛, 대지라는 지구를 벗어나있을 뿐 아니라, 이백년간 캡슐에 갇힌 채 우주미아로 떠 돈 후 무인행성에서 깨어난 한 존재의 행위와 기억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그야말로 이 얄궂은 배경은 우리들이 굳게 믿고 있는 인간의 실존 조건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세계임을 알린다. 실존적 조건을 벗어난 존재로서의 객관적 지위를 획득한 자, 어쩌면 이미 인간이 아닌 자의 시선으로서.

 

1. 인간 실존의 조건에 대해서

 

화자는 지구의 식민행성으로서 독자적인 체제를 수립한 네이처정부로부터 육백 이십 오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살인을 저지르고 추방된 1급 범죄자이다. 네이처는 법, 제도적 계급의 구분은 없으나, 실재적 계급으로 철저하게 분리된 계급사회이다. 즉 거대한 위선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 중에서 5계급은 최하위 계층으로서 거주 지역뿐 아니라 체제에 소외되어 오직 노동자로서의 신분만을 세습한다. 또한 개별자들의 몸에는 그들의 신상을 통제하는 칩이 내장되어 있는 감시사회이자 통제사회이다. 극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축조한 사회가 기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과학기술과 정치를 이끌어가고 다수의 인간은 그 혜택으로부터 차단되어 노예화되어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촘촘하게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채 하는 오늘의 우리네처럼. 그 기만의 사회처럼.

 

화자는 HD-733으로 불린다. 계급과 신분의 분류를 함의하는 기호화된 존재. 노동과 실의의 삶을 전전하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아이를 버리고 가출해 버린다. 고아가 되어 떠돌던 아이는 구역 관리자의 선택에 의해 교육과 계급적 구속을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되고, 네이처 정부 지도자의 아들인 관리자 JN-210의 보살핌과 후원이 있지만 군인으로서의 미래를 시작한다. 20대의 젊은 얼굴을 한 일백 사십 육세의 관리자와 극소수의 지배자가 지닌 욕망의 독점, 그 혐오스러움은 모든 인간, 인류를 위한 과학기술이라는 인본주의의 낙관적인 전망을 선전하지만 그것은 대다수의 인간이 꿈꾸는 인간중심주의의 빗나간 사랑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견뎌야 할 삶이라는 의미에서는 불평등의 심화와 고착처럼 아무런 변화의 이익에 참여치 못한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삼십대의 성인이 된 HD-733은 갈아탔던 복제된 신체의 질병을 벗어나고자 육체교환을 앞두고 있는 JN-210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JN-210은 말한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밑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지 놀라게 될 거다.” 이기심, 복제된 신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 육신으로 갈아타는 그 무한한 탐욕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인간에 대한 살해, 정상적인 한 번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HD-733을 위한 변론이 진행되지만 네이처 정부는 삼백년간의 추방을 선고한다. 새로운 신분의 기호인 'DH(different human)-194'가 되어.

 

소설의 거대한 한 축인 DH-194가 되기까지의 HD-733의 행성 네이처에서의 성장(成長)()(2)‘전뇌(全腦)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을 통한 자아의 무한 반복적 복사로 영원한 존재가 되려는 21세기 뇌 임플란트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희망찬 죽음학이라는 이 모순어가 지닌 기술실증주의의 소름끼치는 욕망의 현주소, 그것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말한다. 지구라는 자연의 인간 실존적 조건의 마지막 끈조차 없애버린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진리들이란 것이 더 이상 인간의 말과 사유로 표현되지 못하는 불구인 것은 아니냐고.

 

2. 다른 존재들의 불문율의 가능성에 대해서

      

두 번째 축은 유배지인 신생 은하계의 한 행성인 루시아에서의 생존을 향한 전쟁(戰爭)()라 할 수 있다. 무인 행성의 유일한 인간인 DH-194(이하 ‘DH’라 함)는 홀로 100년의 유형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너는 고독하지 않은 상태를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항상 자신은 외로움을 단짝처럼 지녔던 존재로써 이 낯선 행성에서의 새로운 삶의 걸음을 내딛는다.

 

DH는 미지의 환경에서 괴성에 불가한 소리만을 내지르는 인간의 외형에 근접한 짐승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를 위해할 의사가 없는 존재임으로 이해하게 되지만, 혐오스러운 그것들에 총을 난사하여 학살한다. 주어진 자유, 그의 의지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이질적인 것,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반감은 무한한 폭력의 행사로 이어진다. 결과는 인간의 외형에 친숙한 것들만 살아남는다. 양식을 구하던 DH는 우연히 숲 속 한 장소에서 열매를 줍는 듯한 이 짐승의 무리를 발견하고,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 돌아오지만,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그것들의 임을 인지하게 된다.

      

부화한 짐승의 새끼에게 애정을 갖게 된 DH이라 부르며 양육하지만 양식을 찾기 위해 은거지를 떠난 뒤 잃어버린다. 렘을 찾기 위해 짐승들의 행동을 좇던 중 알을 주웠던 장소의 특이한 흙과 알껍질의 단 맛에 홀린 듯 먹게 되고, 이후 그의 신체는 변화하고 발화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지하 은거지의 여러 통로 중 하나를 통해 버려진 지하의 거대 유리도시를 발견하게 되고, 최초의 인간인 여성 과 조우한다. DH는 그녀로부터 호전적인 짐승의 공격성을 사라지게 변화시키기 위한 화학적, 약물요법의 계획이 도리어 인간 문명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신체변화는 이러한 화학지대의 영향임을 전해 듣는다.

계획이 진행되면 될수록 문제가 생겼죠. 놈들에게서 짐승의 특성이 사라져가자, 거꾸로 놈들에게 그동안 숨겨져 있던 인간과 비슷한 면들이 하나둘 드러나게 된 거예요. ...엉뚱한 결과가 초래....우리의 계략이란 것이 거꾸로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게 되어버린 셈이었죠.”(P 239)

 

그런데, DH의 변화에서 발화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말이 힘을 잃은 세계 속으로 진입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3)이것은 지식과 사유가 결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곧 자신의 방법론적 노예, 자기의 창조물에 내 맡겨진 생각 없는 피조물로 전락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DH는 식물로 화하는 자신, 기억하기를 잊어버린 생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며, 인간이 진화의 단계를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아마 결코 주어지지 않는 개별자의 존재적 영원성에 대한 헛된 욕망이 아닐까? 자연은 종의 존재적 영원성만을 보장한다. 또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진리가 물론 있을 수 있다. 홀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비정치적 존재에게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 세계에 행위하며 살아가는 인간, 다수의 인간들은 서로 소통하고 타인에게 통하는 을 할 때만 의미를 경험 할 수 있다.

 

이제 소설은 이러한 물음의 끝으로 달려간다. DH가 행성 루시아에서 처음 맞이했던 짐승들은 절반쯤 인간화된 변이가 진행 중인, 즉 인간의 과학기술적 오만이 야기한, 자신들의 피조물이었으며, 이제 그것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 역시 사라져야 함을 알게 된다. 아마 이 서사 축을 압축하는 문장이 될 것 같다. “우리에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개념과 사고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인간이나 지적 생물체에겐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하고....다른 존재들의 불문율의 가능성을 이해해야한다는 자각이다. 인간화된 짐승들은 종족의 우성인자를 지켜내고 재편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살상을 시작하고, 열등한 마지막 인간변종, DH는 종말을 고한다. 그들의 원년, 첫 날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무엇인가? 다시 반복하지만 인간은 물을 수 없는 의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 하는 여타 동물과는 차별화된 종이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 21세기 인류의 존재론적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필 토레스는 말한다. (4)‘부주의, 실수, 사고(事故), 사고(思考)적 결함, 지식의 불완전성, 게다가 불가지(不可知)에 이르기까지 인간 스스로를 위협하는 그 불완전성에 대해서. 결국 유발 하라리의 인본주의에 경도된 인류의 비판적 사유의 촉구, (5)인간의 자연지배와 약탈행위의 정당화가 만들어 내고 있는 그 마지막 열차의 질주가 인간의 말과 사유를 말살하는 영원한 죽음의 희망학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라는 통렬한 자성의 목소리에 이르게 한다.

 

 

참고 도서:

(1)박이문 , 죽음 앞의 삶, 삶속의 인간, 미다스북스, 2017.2

(2)마크 오코널 , 트랜스휴머니즘, 문학동네 2018.2

(3)한나 아렌트 ,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7.3

(4)필 토레스 , 디 엔드, 현암사, 2017.7

(5)유발 하라리 , 호모데우스, 김영사, 2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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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노래다. 도저히 읽기을 멈출 수 없다"라는 작가'마크 해던'의 서평이 아마 내가 이 책을 읽도록 유혹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책 표지의 앞과 뒤를 살펴본다.

 

"인간과 자연, 생명과 죽음, 애도와 치유가 어우러진 '현재 진행형의 고전'"이라는 압축된 문장이 시선을 끈다. 아~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다. 문장 하나 하나에 나를 집어넣으며 읽어야 할 책이리라는 짐작을 한다.

 

그리곤 책장을 넘기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실앞에서 삶의 고통에 당혹해하는 중년의 여인을 본다. 자신의 현실을 이해한 그녀가 선택한 자기 치유의 방법이 바로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고독이다."이라는 한 문장에 온전히 포용되고 있음을 또한 보게된다.

 

책 읽는 속도를 낮춘다. 가능한 문장에 철저히 조우하기 위해. 책을 다 읽은 후에 어떤 소회를 남기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책 읽는 나의 이 고독한 행위와 작가  '헬렌 맥도널드'의 참매, '메이블'을 조련하는 행위에는 어딘가 맞닿아 있음을 느낀다. 나의 인간성을 태우기 위한 그것으로써.

 

그녀의 메이블 조련행위는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을 갖고자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솜씨있게 사냥하는 동물을 조련함으로써,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함으로써, 그것과 동감함으로써, 모든 생생하고 진지한 욕망을 완전한 순수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 중략 ~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 고.    P 76 中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관찰중인 대상 속에 자신을 넣는 관찰자가 됨으로써, 그녀 자신을 매가 지닌 야생의 마음안에 넣어 자신의 인간성을 태워버리는 것이리라. 책은 동물과 인간의 "문학적 조우"의 걸작이리라 머리를 끄덕인다. 이 책 읽기는 하나의 과정, 인생의 한 과정이 될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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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부동한 건 하나뿐이다. 삶은 유한하다는 것,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는 것, 허무를 부둥켜안고 얼크러져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삶의 본령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별아<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275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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