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더 선 시스터 문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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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에게 온다 리쿠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두어야겠다.

나는 토론과 논쟁을 즐기는 편으로, 매사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애쓰는 편이다. 물론, 지향하는 바는, '남에겐 관대히, 자신에겐 엄격히' 이긴 하지만, 나도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이라 그딴게 잘 될 리 없다. 한 작가에 대한 지극한 편애는 당연히 비판적인 시각 따위 개나 줘버리게 만든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는 딱 두가지로 압축시킬 수 있다.

[회상] 과 [대화] 이다. 그녀의 작품세계에서 [회상] 과 [대화] 는 플롯의 전체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앉아 과거를 회상하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되고 끝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전체를 뭉뚱그려 보았을 뿐으로, 과일생크림 케익이 스폰지빵과, 생크림과 과일로만 이루어져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고급 원유와 빈티지가 오래된 향기로운 좋은 브랜디로 만든 생크림에, 유기농 밀을 이용해 만든 신선한 빵, 제철에 나는 신선한 과일들 역시 각각 다른 맛일터다. 그와 같이 온다 리쿠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회상들과 대사들 역시 촘촘하게 잘 짜여진 각각의 플롯들을 가지고 있다.  그저 몇 사람이 앉아 평범하게 과거를 추억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 과거와 대화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스토리 텔링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어떤 작가가, 등장인물들이 그냥 방안에 앉아서 이야기만 나누는 소설을 이렇게 흡인력 있게 써낼 수 있겠는가?


[브라더 선 시스터 문] 은 단편에 가까운 세 편의 이야기가 모여 중편에 가까운 한편의 장편을 만들어낸다. 

세 친구, 니레자키 아야네와 도자키 마모루, 하코자키 하지메는 고교 동창생으로 도쿄에 있는 대학 동기생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때는 곧잘 어울렸지만, 다른 과를 택했기에 대학에 와서 부터는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아야네와 마모루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관계이기도 했는데, 친구도 아닌 짝사랑도 아닌 묘한 감정은 하지메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이 세명의 친구들이 각기 과거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먼저 아야네의 이야기가 [그애와 나] 라는 챕터로, 마모루의 이야기가 [파란 꽃] 이라는 챕터로, 하지메의 이야기가 [젊은이의 양지] 라는 챕태로 이루어져 있다.

아야네의 이야기의 소재는 일본문학으로 챕터 제목[그애와 나]는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책 이름이고, 마모루의 이야기의 소재는 대학시절 몸담았던 재즈밴드의 이야기로, 챕터 제목[파란 꽃] 은 책 안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재즈 연주곡의 제목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하지메의 이야기는 온다 리쿠가 종종 활용하는 인터뷰의 형식으로 쓰여졌는데,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영화이고, 챕터 제목 [젊은이의 양지]는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그리고 책 제목이기도 한 [브라더 선 시스터 문] 은 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실제 성 프란체스코의 인생을 다룬 영화 제목이다. 


일본문학과 재즈에는 식견이 없어서, 확실치는 않으나, 세번째 챕터의 제목이나 책 제목, 그리고 온다 리쿠 작가의 성향으로 봤을때 챕터 제목들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들일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그 작품들에 받은 영향은 어쩌면 온다 리쿠 작가가 받은 영향을 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온다 리쿠는 [목요조곡] 이라는 작품속에서 베스트 셀러 작가의 삶을 비교적 상세히 풀어낸 적이 있는데, 당시 어떤 인터뷰에서 일정부분 본인의 이야기가 어느 캐릭터엔가 묻어있다고 한 기억이 난다. 이 작품 또한 본격적인 자전적 소설은 아니겠지만, 작가의 성향상 어느정도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묻어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은 그 독특함 때문에 작품을 한두단어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개인적으로는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정의한 '청춘소설' 이 주는 단어의 어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향수' 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아서, 일본 현지에서도 굳이 '노스텔지어' 라는 애매한 외국 단어를 가져다가 닉네임처럼 붙였을터다. 

그녀의 이야기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에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녀의 작품 안에는 장르 자체가 주는 묘한 긴박감과 음습한 분위기가 듬뿍 묻어있다. 묘하게 삶을 관조하는 듯한 시각도 거의 매 작품마다 등장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과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청춘이나 향수같은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노스텔지어' 라는 단어의 어감이나 이미지가 온다 리쿠의 작품들과도 잘 어울릴 듯 하다. 

안개에 쌓여있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뿌옇고 몽환적인 추억들. 

 

이 작품 [브라더 선 시스터 문] 또한 그러한 온다리쿠의 특색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세명의 친구, 아야네와 마모루, 하지메 또한 대단히 관조적인 자세로 자신들의 대학시절을 추억하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세 친구가 공통적으로 겪은 사건과 영화 이야기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것이 세 친구의 과거를 꿰는 실 같은 역할을 한다. 

대학을 졸업한 동창들이 모여 과거를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흑과 다의 환상] 과 비슷하긴 하지만, 훨씬 얇고, 훨씬 관조적이다. 이야기의 방식은 차라리 비교적 초기작인 [유지니아] 와 닮아있으나, 작품이 주는 느낌이나 분위기는  더 건조하고 담담하다. 

확실히 작가의 작품색이 달라진 느낌으로, 그녀의 데뷔작부터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 묘한 느낌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걸까?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과거는 고정되어있고,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다.

다가올 고통은 두렵지만, 지나간 고통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이고, 과거는 이미 겪어낸 일이다.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아야네와 마모루, 하지메 모두 이제 막 시작하는 초년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야네는 막 작가로 등단한 것 같고, 마모루 역시 막 사회로 뛰어드려는 초년생인 듯 하고, 하지메는 10여년간 금융권에서 일한 샐러리맨이었지만 이제 막 상업 영화 감독으로 입봉한 터다. 미래를 향해, 희망을 향해 뛰어가야 할 선에 서있는 것 같지만, 담담하게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린다. 

 이 작품은 거창하게 미래를 이야기하지도, 희망이나 의욕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담담하게 현재와 과거, 삶의 불가역성과 기억의 가역성을 이야기 할 뿐이다. 


나도, 전혀, 아무것도 없었던, 좁고 좁았던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실, 아직도 그 좁고 좁은 세상속에 갇혀있다.

어쩌면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좁은 관 속, 아니면 좁은 유골함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될테고, 머지 않은 훗날에 오늘을 추억할테니까.

지금 이 순간이 기쁘고 행복한 만큼,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훗날에, 기뻐하고 행복해할 수 있을테니까. 




p.s

최근에 작가의 신작 장편과 작품집이 연달아 출간된 것으로 알고있다.

어서 만나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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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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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한 소녀의 이야기.

한 남자의 손에 잡혀 자루속에 던져지던 기억이 아마도 그녀의 첫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랄라 아스마라는 사람에게 판매되어서, '밤' 이라는 뜻의 '라일라' 라는 이름을 얻게된 아프리카 태생의 소녀.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랄라 아스마 덕에, 유괴되어 팔려간 소녀 치고는 올바른 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사랑이나 애정과는 거리가 있었을테고, 랄라 아스마의 아들과 며느리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앞으로 그녀가 겪을 여정들에 비하면 그 시절은 '평탄했다' 고 할 수 있을터.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로부터 받았던 그 시절의 교육들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지역을 거쳐 프랑스로, 미국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하게 되고, 역경과 고난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게 된다.

 

 인간은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이 사유를 시작한 이래 가장 의미있는 질문인 동시에, 무의미한 질문.

인간으로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인 동시에, 인간이기에 영원히 고민해야 할 화두.

라일라는 왜, 무엇을 위해 그토록 떠돌았을까? 왜 그토록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근원지  - 고향을 찾아 헤매야만 했을까?

그녀의 삶은 텅 비어버린 삶일까, 가득 찬 삶일까?

마치 고속철도의 창밖으로 사라지는 풍경들처럼, 그녀의 삶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랄라 아스마, 조라, 아벨, 자밀라 아줌마, 후리야, 게오르크 쇤, 들라예 부인, 마리 엘렌, 프리메제아 부인, 노노, 하킴, 엘 하즈 할아버지, 시몬과 베아트리스, 엘 세뇨르...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그녀의 인생에 크고작은 영향을 미치고, 그녀에게 길을 내어주고, 길을 가로막고, 길을 안내하고, 길을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 그녀를 갖고싶어했던 사람들과, 그녀에게서 위안을 찾고싶었던 사람들과,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

 인생과 인생, 수많은 인생들이 얽히고 또 얽히고 설키고 엉킨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그리 했던가?

라일라를 유괴했던 그. 그는 왜 그리 했던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던가.

 

수많은 질문들을 만나고, 수많은 목적들을 만나고, 수많은 무의미와, 유의미를 거치고 거쳐, 그녀는 음악을 만난다.

음악이 그녀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있다. 그녀의 음악을 통해 치유받고 회복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었고,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해 연주했을 터다.

 그것은,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을까, 무언가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을까? 

 

라일라의 삶 전체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

'표류' '항해' '파란만장' '역경' '미로' 등이 떠오른다. 

그녀의 삶은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비참할정도로 가난할때에도 지역에 설치되있는 무료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공부했고, 쓰레기 하치장을 뒤지며 살았을때도 쓰레기로 버려진 책들을 쌓아놓고 읽었다.

그녀의 삶은 표류처럼 시작되지만, 결국은 목적지를 찾아내, 항해로 바뀐다.

수많은 역경들이 있고, 수많은 막다른 골목을 만나지만, 역경 속에는 언제나 헤쳐나갈 구멍이 있고, 막다른 골목 역시 벗어날 방법이 있다. 삶이란 언제나 그러하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오고, 좋은일엔 나쁜일이 따른다.

하늘위로 높이 치솟은 파도는 반드시 땅 속 깊숙히 꺼지기 마련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중 잘 읽히는 편에 속한다' 는 평처럼, 정말 순식간에 읽어내린 작품이다.

라일라의 삶의 여정은 쉼없이 파도가 몰아치고, 바람이 몰아치고, 수영 뒤에 싸이클, 그리고 마라톤까지 완주해야하는 철인 삼종경기처럼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 안에서도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이고 현학적인 문장들이 대단히 감미롭고 아름답다.

 이 작품은 라일라라는 한 흑인소녀의 인생 그 자체가, 거대 서구문명에 잠식되어가는 소수민족의 전통문명에 대한 메타포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그런 거대담론에 파묻지 않아도 충분히 깊이있고 무거우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엄청나게 무겁거나, 음울하거나, 어둡지 않다.

색채로 따지면, 온화한 노란색, 그리고 깊이있는 와인색. 이 두가지가 번갈아 펼쳐지는 느낌이랄까.

'밤' 이라는 뜻을 담고있는 '라일라' 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지만, 라일라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소녀이다. 그녀를 갖고싶어했던 남자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이다.

 

 라일라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당당했고, 올곧았다.

그녀는 일단 -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울먹이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갈팡질팡 헤매이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고, 눈 앞, 발 앞. 일단 앞에 놓인 그것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밝음' 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엄청난 낙관주의자이거나, 낙천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첫 기억이 - 시커먼 손에 붙들려 자루 안에 던져지는 것인 소녀가 낙관주의적이거나 낙천적인 성격으로 성장했을리는 만무하니까.

그런 것과는 차별되는 '밝음' 을 지니고 있었다.

 어떠한 절망과 고통과 위기속에서도, 깊은 어둠속으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무저갱의 구멍 속에 떨어져도, 꿋꿋하게 사다리를 찾아 한칸 한칸 올라올 것만 같은 밝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만큼 아주 밝고, 아주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 그녀는 그냥 평범하게 내 옆을 지나쳐가는 흑인 소녀였을터.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반짝거리며 또박또박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시커먼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더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이제 나는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름을 떨친 나의 조상 빌랄처럼, 노예였다가 예언자 마호메트가 속박에서 풀어주고 세상으로 내보낸 그 사람처럼,

드디어 나는 또 하나의 빌랄 족이 되어 부족의 시대에서 사랑의 시대로 들어선다."

 

p.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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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3 아서 왕 연대기 3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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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사실상 허구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100% 진실만을 담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역사' 라는 것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록과 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서 또한 100%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왕들이 과거의 기록들을 지우거나 덧씌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들은 그런 동시대의 여러 기록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대조해보며 90%이상 '팩트Fact'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들을 위주로 논리적, 인과적인 추정들을 덧붙여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기반하여 '추정'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이 남아있는 시대를 우리는 '역사시대'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 체계를 갖춘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신화시대' 라고 한다.

 

 '아서 왕'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이다. 실제 영연방의 역사에서도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신화시대의 이야기들은 [신화] 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서왕 이야기는 중국의 하나라 우임금 이야기와 비슷하고, 우리에게는 치우천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서왕 이야기는 후대까지 민담처럼 널리 알려지게 되고, 아서, 멀린, 란슬롯 같은 인물들 또한 입에서 입으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구체화가 되었고,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 이라고 보면 된다.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로 이어지는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품으로, 실제 그 시대의 브리튼에 아서왕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 충실하게 재현해낸 작품이다. 먼저 고대 브리튼에는 원주민 브리튼족이 있었다. 켈트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지배했고, 그 뒤에는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지배한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게르만의 한 일파인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 정착하고, 후에 노르만족이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많은 민족들이 뒤섞여있고, 그 민족성 또한 뚜렷해서, 캘트족이 주를 이루는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앵글로 색슨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는 문화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기원전 4~5세기경, 브리타니아를 지배하던 로마가 멸망한 뒤 앵글, 색슨, 유트족이 브리튼섬에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 현재 잉글랜드의 남부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다. 버나드 콘웰은 당시 사회는 국가의 개념보다는 족벌의 개념이 컸다. 즉, 일정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족벌 - 군벌들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왕' 은 그런 군벌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아서는 둠노니아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유서왕' 의 서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은 없지만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휘하의 전사로써 꾸준한 활약을 통해 충분한 인맥을 쌓아 어느정도 자신만의 세력을 결집한 군벌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진정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그 시대적인'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오고 습한 기후인 브리튼 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적어도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로마인들처럼 목욕과 사우나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브리튼인들은 식민지배하의 사람들이었고, 로마가 다스리던 런던등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면 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접하지 못했을터다. 오히려 로마가 갑작스레 멸망하고, 브리튼에 살던 로마인들 또한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기술의 정수들 또한 다 가지고 떠났을터다. 런던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과 목욕탕, 각종 신전들은 자신의 용도대로 쓰였을리 만무하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위생관념이 로만처럼 뛰어났을리도 없다. 브리튼의 원주민들은 로마가 남겨준 유산들을 활용하기보다, 그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일으켜 세웠어야 할테도, 얼마 가지 않아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북쪽에서는 호전적이고 독특한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켈트족의 압박에 맞서야 했을터다. 우리가 전해듣던 원탁과 아발론, 그리고 캐멀롯 같은 성채 요새와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버나드 콘웰은 보다 현실적으로 이것들에 다가선다. 아서는 로만도, 색슨도 아닌 순수 브리튼인으로 그려진다. 멀린이 보여주는 주술들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며, 브리튼 사람들의 삶 또한 처절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최대의 강점은 리얼한 전투에 대한 묘사이다. 브리튼은 면적이 넓긴 하지만, 척박한 영토가 더 많은 섬나라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위생상태와 브리튼 섬의 토착 농산물들, 가축들과 농업기술, 축산기술등 삶의 질들을 따져봤을때 인구가 많을 리 없다. 전투라고 하더라도 많아봤자 수백, 과장해도 수천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서 그려진 조조의 10만대군이 실제로는 1~2만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중국 대륙이기에 그나마 1~2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브리튼섬이라면 수백에서 기천 정도나 가능했을터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그러한 숫자적인 부분에서 우선 현실적이고, 그려지는 전투 장면 또한 대단히 '그시대적' 이다. 순전히 체력과 완력을 가진 전사들의 숙련도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을 당시의 전투. 전술이나 전형에 대한 개념도 쐐기형 공격전개나 원형 방패진 정도에 불과했을 터. 작품 속에서 아서가 뛰어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기병운용이었다. 보병위주의 전투에서 기병의 숙련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몽골의 군세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몽골인 대부분이 3살때부터 말타기를 즐겼던 기마민족으로서 매우 숙련된 기병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작품 안에서 아서의 승승장구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장면은 물론, 당시 평민들과 귀족들의 삶의 모습들, 의복묘사등 모두 세세하고 현실적이며, 특히 민초들의 삶을 무척이나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정래, 김훈등과 같은 뛰어난 역사소설가들이 당대 민초들의 삶을 자주 그리고, 무척이나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떠올리면 버나드 콘웰이 역사소설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식견과 역량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점 들 덕분에 신화속의 아서는 현실, 실제 역사의 한 전장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작품의 화자는 아서가 아니다. 바로 데르벨이다. 데르벨이 나이를 많이 먹은 뒤, 이그레인이라는 왕녀에게 자신이 모신 주군이었던 아서에 대해 술회하는 방식인데,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이 서술방식이 이야기에 더욱 더 리얼리티를 불어넣어 준다. 화자인 데르벨은 물론, 아서와 그의 아내 귀네비어까지 모두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충분한 결점이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데르벨은 이그레인에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유시인(바드) 들이 노래로 만드는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꼬집어준다. 불과 한세대만에 아서에 대한 이야기가 그토록 변질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현재의 우리에게 "너희가 알고있는 아서왕 이야기는 다 가짜야!" 라고 직접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여러가지 역사소설로서의 장점들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다. 아서는 권력욕이 전혀 없지만 자신의 서약에 떠밀려 끊임없이 전쟁터로 향하고, 사랑하는 여인 귀네비어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과 작은 농장, 그것만을 바란다. 아서는 둠노니아를 평화롭게 하고, 색슨족을 몰아내고 언젠가는 자신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야심가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고, 아내인 귀네비어는 왕의 꿈을 꾸는 여인이었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남편이나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대단히 영특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랜슬럿이나 갤러헤드도 등장하지만, 성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브리튼의 거대한 솥이 등장하긴 한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대립들 중 하나는 거대한 종교적 충돌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역사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어서 꽤나 관심깊었다. 기독교가 전 세계 문화권에 뿌리내린 방식은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공격적인 종교이다.

"세상에 신은 한분뿐이고, 그건 바로 내가 믿는 신이다. 즉, 네가 믿는 신은 신의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그랬을지 모르지만, 세상에 전파된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 지역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있던 토착신을 끌어내어 없애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거나 죽여서 없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종교가 없어지게 된 계기 또한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그정도이다.

 이 작품의 두번째 권인 [에너미 오브 갓] 에서 그 과정이 보다 밀도있고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고대 브리튼 또한 다른 많은 문명의 신들처럼 다신교였다. 브리튼의 사람들은 내가 믿는 신과 네가 믿는 신을 인정했고, 네가 믿는 신이 나에게 줄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관습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작품 내에서는 침을 뱉거나, 특정한 표식을 만들거나, 오줌을 누거나 하는 정도였다. 고대인들의 삶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었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관장했다.

 [윈터킹] 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군벌의 입지를 다진 아서는 [에너미 오브 갓] 에서 종교적인 대립은 물론 귀네비어의 배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접하게 되고, [엑스칼리버] 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귀네비어를 이해하고 다시 받아들이며, 기독교와 색슨족들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둠노니아를 바로잡은 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집 한 채와 앞뜰, 그리고 대장간이 있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얻어낸다.  (물론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 왕 연대기(원제는 The Warlord Chronicles로 '군벌 연대기' 쯤 될터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사실상 허구이다. 그렇다고,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100% 진실만을 담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역사' 라는 것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록과 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서 또한 100%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왕들이 과거의 기록들을 지우거나 덧씌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들은 그런 동시대의 여러 기록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대조해보며 90%이상 '팩트Fact'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들을 위주로 논리적, 인과적인 추정들을 덧붙여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각종 유물과 유적들을 기반하여 '추정'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이 남아있는 시대를 우리는 '역사시대' 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 체계를 갖춘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신화시대' 라고 한다.

 

 '아서 왕'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이다. 실제 영연방의 역사에서도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신화시대의 이야기들은 [신화] 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서왕 이야기는 중국의 하나라 우임금 이야기와 비슷하고, 우리에게는 치우천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서왕 이야기는 후대까지 민담처럼 널리 알려지게 되고, 아서, 멀린, 란슬롯 같은 인물들 또한 입에서 입으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구체화가 되었고,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 이라고 보면 된다.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로 이어지는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한 작품으로, 실제 그 시대의 브리튼에 아서왕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 충실하게 재현해낸 작품이다. 먼저 고대 브리튼에는 원주민 브리튼족이 있었다. 켈트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지배했고, 그 뒤에는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지배한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게르만의 한 일파인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 정착하고, 후에 노르만족이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많은 민족들이 뒤섞여있고, 그 민족성 또한 뚜렷해서, 캘트족이 주를 이루는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앵글로 색슨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는 문화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 작품은 기원전 4~5세기경, 브리타니아를 지배하던 로마가 멸망한 뒤 앵글, 색슨, 유트족이 브리튼섬에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 현재 잉글랜드의 남부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다. 버나드 콘웰은 당시 사회는 국가의 개념보다는 족벌의 개념이 컸다. 즉, 일정한 군사를 지니고 있는 족벌 - 군벌들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왕' 은 그런 군벌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아서는 둠노니아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유서왕' 의 서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은 없지만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휘하의 전사로써 꾸준한 활약을 통해 충분한 인맥을 쌓아 어느정도 자신만의 세력을 결집한 군벌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진정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그 시대적인'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오고 습한 기후인 브리튼 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적어도 물이 부족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로마인들처럼 목욕과 사우나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브리튼인들은 식민지배하의 사람들이었고, 로마가 다스리던 런던등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면 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접하지 못했을터다. 오히려 로마가 갑작스레 멸망하고, 브리튼에 살던 로마인들 또한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기술의 정수들 또한 다 가지고 떠났을터다. 런던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과 목욕탕, 각종 신전들은 자신의 용도대로 쓰였을리 만무하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위생관념이 로만처럼 뛰어났을리도 없다. 브리튼의 원주민들은 로마가 남겨준 유산들을 활용하기보다, 그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일으켜 세웠어야 할테도, 얼마 가지 않아 색슨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고, 북쪽에서는 호전적이고 독특한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켈트족의 압박에 맞서야 했을터다. 우리가 전해듣던 원탁과 아발론, 그리고 캐멀롯 같은 성채 요새와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버나드 콘웰은 보다 현실적으로 이것들에 다가선다. 아서는 로만도, 색슨도 아닌 순수 브리튼인으로 그려진다. 멀린이 보여주는 주술들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며, 브리튼 사람들의 삶 또한 처절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최대의 강점은 리얼한 전투에 대한 묘사이다. 브리튼은 면적이 넓긴 하지만, 척박한 영토가 더 많은 섬나라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위생상태와 브리튼 섬의 토착 농산물들, 가축들과 농업기술, 축산기술등 삶의 질들을 따져봤을때 인구가 많을 리 없다. 전투라고 하더라도 많아봤자 수백, 과장해도 수천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서 그려진 조조의 10만대군이 실제로는 1~2만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중국 대륙이기에 그나마 1~2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 브리튼섬이라면 수백에서 기천 정도나 가능했을터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는 그러한 숫자적인 부분에서 우선 현실적이고, 그려지는 전투 장면 또한 대단히 '그시대적' 이다. 순전히 체력과 완력을 가진 전사들의 숙련도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을 당시의 전투. 전술이나 전형에 대한 개념도 쐐기형 공격전개나 원형 방패진 정도에 불과했을 터. 작품 속에서 아서가 뛰어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기병운용이었다. 보병위주의 전투에서 기병의 숙련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몽골의 군세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몽골인 대부분이 3살때부터 말타기를 즐겼던 기마민족으로서 매우 숙련된 기병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작품 안에서 아서의 승승장구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장면은 물론, 당시 평민들과 귀족들의 삶의 모습들, 의복묘사등 모두 세세하고 현실적이며, 특히 민초들의 삶을 무척이나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정래, 김훈등과 같은 뛰어난 역사소설가들이 당대 민초들의 삶을 자주 그리고, 무척이나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떠올리면 버나드 콘웰이 역사소설가로서 얼마나 뛰어난 식견과 역량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점 들 덕분에 신화속의 아서는 현실, 실제 역사의 한 전장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작품의 화자는 아서가 아니다. 바로 데르벨이다. 데르벨이 나이를 많이 먹은 뒤, 이그레인이라는 왕녀에게 자신이 모신 주군이었던 아서에 대해 술회하는 방식인데,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이 서술방식이 이야기에 더욱 더 리얼리티를 불어넣어 준다. 화자인 데르벨은 물론, 아서와 그의 아내 귀네비어까지 모두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충분한 결점이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데르벨은 이그레인에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유시인(바드) 들이 노래로 만드는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꼬집어준다. 불과 한세대만에 아서에 대한 이야기가 그토록 변질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현재의 우리에게 "너희가 알고있는 아서왕 이야기는 다 가짜야!" 라고 직접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여러가지 역사소설로서의 장점들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다. 아서는 권력욕이 전혀 없지만 자신의 서약에 떠밀려 끊임없이 전쟁터로 향하고, 사랑하는 여인 귀네비어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과 작은 농장, 그것만을 바란다. 아서는 둠노니아를 평화롭게 하고, 색슨족을 몰아내고 언젠가는 자신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야심가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고, 아내인 귀네비어는 왕의 꿈을 꾸는 여인이었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남편이나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대단히 영특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랜슬럿이나 갤러헤드도 등장하지만, 성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브리튼의 거대한 솥이 등장하긴 한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대립들 중 하나는 거대한 종교적 충돌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역사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어서 꽤나 관심깊었다. 기독교가 전 세계 문화권에 뿌리내린 방식은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공격적인 종교이다.

"세상에 신은 한분뿐이고, 그건 바로 내가 믿는 신이다. 즉, 네가 믿는 신은 신의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그랬을지 모르지만, 세상에 전파된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 지역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있던 토착신을 끌어내어 없애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거나 죽여서 없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종교가 없어지게 된 계기 또한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그정도이다.

 이 작품의 두번째 권인 [에너미 오브 갓] 에서 그 과정이 보다 밀도있고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고대 브리튼 또한 다른 많은 문명의 신들처럼 다신교였다. 브리튼의 사람들은 내가 믿는 신과 네가 믿는 신을 인정했고, 네가 믿는 신이 나에게 줄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관습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작품 내에서는 침을 뱉거나, 특정한 표식을 만들거나, 오줌을 누거나 하는 정도였다. 고대인들의 삶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삶이었다. 신적인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관장했다.

 [윈터킹] 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의 군벌의 입지를 다진 아서는 [에너미 오브 갓] 에서 종교적인 대립은 물론 귀네비어의 배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접하게 되고, [엑스칼리버] 에서 자신을 배신했던 귀네비어를 이해하고 다시 받아들이며, 기독교와 색슨족들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둠노니아를 바로잡은 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집 한 채와 앞뜰, 그리고 대장간이 있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얻어낸다.  (물론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다.)

 

 버나드 콘웰의 아서 왕 연대기(원제는 The Warlord Chronicles로 '군벌 연대기' 쯤 될터다)를 보며 지난해 완간된 이우혁 작가의 [치우천왕기] 가 떠올랐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아서왕에 버금가는 동양의 전사는 바로 치우천왕이다. 이우혁의 '치우천왕기' 역시 뛰어난 작품이지만 애초에 '판타지' 라는 옷을 입고 나왔기에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만일 치우천왕기가  바로 이 아서왕 연대기처럼 보다 리얼리티를 강조했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치우천왕기는 애초에 판타지의 세계관 - 왜란 종결자와 퇴마록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우혁 유니버스' 의 안에서 기획된 작품이지만, 이우혁 작가의 뛰어난 필력을 생각해보면 정통 역사소설로 접근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무엇보다 아서왕 연대기가 가지고 있는 '주술' 이라는 것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우리의 치우천왕기도 아서왕 연대기처럼 수준높고 뛰어난 작품이 되어 등장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이 작품 [아서 왕 연대기] -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 는 탐나도록 멋진 작품이다.  

다)를 보며 지난해 완간된 이우혁 작가의 [치우천왕기] 가 떠올랐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아서왕에 버금가는 동양의 전사는 바로 치우천왕이다. 이우혁의 '치우천왕기' 역시 뛰어난 작품이지만 애초에 '판타지' 라는 옷을 입고 나왔기에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만일 치우천왕기가  바로 이 아서왕 연대기처럼 보다 리얼리티를 강조했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치우천왕기는 애초에 판타지의 세계관 - 왜란 종결자와 퇴마록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우혁 유니버스' 의 안에서 기획된 작품이지만, 이우혁 작가의 뛰어난 필력을 생각해보면 정통 역사소설로 접근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무엇보다 아서왕 연대기가 가지고 있는 '주술' 이라는 것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언젠가는 우리의 치우천왕기도 아서왕 연대기처럼 수준높고 뛰어난 작품이 되어 등장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이 작품 [아서 왕 연대기] - [윈터킹],[에너미 오브 갓],[엑스칼리버] 는 탐나도록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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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성 샘터 외국소설선 6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시간과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었고, 의지가 있었다."
p.299

 초기의 Sci-Fi 라는 장르(이하 SF) 는 굉장히 어려운 장르였다. 초기 SF문학의 선구자였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화학박사였고, 천문, 물리, 생물 등 모든 과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아서 클라크 또한 물리학, 수학박사였고, 로버트 A 하인라인 역시 뛰어난 사회학자에 가까웠으며, 어슐러 K. 르 귄 이나 필립 K. 딕, 로저 젤라즈니 같은 그 이후 세대의 작가들도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작품세계를 펼쳐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순수하게 대중적인 인기에만 초점을 둔 SF 소설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자의 작품들이 철저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한 보다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과학 소설이었다고 한다면, 후자는 서부 활극의 배경이 우주로 바뀌었을 뿐인, 단순한 모험소설에 불과했다. 이런 우주 모험물은 후에 '스타워즈' 와 '스타 트렉' 등의 작품들의 모태가 되고, 'Space Opera'  라는 비아냥 섞인 이름을 갖게 된다. 이후로 SF장르는 '하드SF' 와 '스페이스 오페라' 로 양분된다. 
 SF 장르는 쭉 이런 두 파벌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위에 언급한 SF의 3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뒤를 이어 러브 H 크래프트, 로저 젤라즈니,어슐러 K 르귄, 필립 K 딕, 스타니스와프 렘 등이 하드SF의 줄기를 이어왔고, 그 밖의 수많은 작가들이 과학적 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 스페이스 오페라를 발전시켜왔다. 게임. 영화산업은 필연적으로 대중적인 장르와 시너지를 일으켰고, '스타워즈' 와 '스타트렉' 은 대중들의 인기를 업고 생명력을 쭉쭉 뻗어나갔다. 

 비아냥과 조소가 섞인 명칭이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는 이제 완전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비아냥을 받지 않는다. '스타워즈' 는 장르를 넘어 미국 문화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배틀쉽 갈락티카' 같은 TV드라마는 새로이 리메이크되어 '미국 그 자체를 그려냈다' 는 평을 들으며 Sci-Fi 채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드디어 하드SF와의 융합을 꿈꾼다.
충분한 과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우주를 누비는 스페이스 판타지. 댄 시먼스나 존 스칼지 같은 작가들이 바로 그 전위에 서있다.  


 내가 좋은 장르 소설을 구별하는 기준은 다른 많은 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그럴 듯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이다. 장르 소설도 엄연히 '소설' 이다. '있을 법한 일' 이어야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낸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완전 허황된 발상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 들 조차 허황되기 짝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독자들에게 외면당한다. 만약 허황된 발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런 허황된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이다.  

 SF의 거장들이 시대와 장르를 넘어 폭넓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발상과 이야기들이 전혀 '허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상을 구체화 시켜서 세상을 만들어 내고,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과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페이스 오페라' 가 비아냥과 조소를 들으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타워즈' 나 '스타트렉', '배틀스타 갈락티카' 등에서는 우주비행선들이 순식간에 쓩쓩 날아가며 수십광년 수백광년을 뛰어 넘는다. 이런 작품속의 우주비행선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아예 시간과 공간의 간섭 자체를 받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작품속에서 중요한 것은 우주선과 우주비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 워즈' 는 수많은 외계 종족들과 광선검과 포스를 사용하는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의 제다이 들의 이야기이다. '스타 트렉' 은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 비행선 안에 살고있는 종족과 인종을 초월한 크루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이다. '배틀스타 갈락티카' 는 사일런의 침공에 멸종 위기에 몰린 피난민들을 태운 거대한 노아의 방주이다. 모두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 그들은 우주선들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 세계의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궁금해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최근의 '스페이스 오페라' 들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정보의 바다에서 뛰노는 돌고래들과 같은 세대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시간의 상대성 이론을 너무나 쉽게 풀어낸 수많은 리포트들을 검색할 수 있고, 우주의 양자역학을 중딩도 이해할 정도로 재미나게 풀어낸 수많은 리포트들 또한 검색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다. 수많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들. 즉,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론적으로 '어느정도는 가능한'  과학적 가설들도 접할 수 있고, 역사와 신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도 키보드를 몇번만 두드리면 찾아낼 수 있다. 우리의 선배들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수많은 지식들을 너무나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이스 오페라' 의 작가들 또한 이러한 수많은 지식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그럴듯한 논리를 적용시켜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시공간을 넘나들 것인가? 그리고 그에 따른 시간과 공간의 간섭은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류는 어떤 식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이며, 관련된 산업과 기술들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그리고 결국 그러한 기술들이 인류 사회에 미치는 궁극적인 영향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인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존 스칼지 같은 최근의 SF작가들은 결국 이러한 논리들은 너무나 정연하고 '그럴 듯 하게' 풀어낸 성공적인 작가이다.  

 [노인의 전쟁] 시리즈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SF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존 스칼지는 보다 황당하고 보다 고전적인 발상을 구체화 시켰다. 그것은 바로 [영생] 인데,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인간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로 전이시키는 발상이었다. 이 새로운 육체는 우주 시대에 맞게 새로이 개조된 육체였다. 뼈, 살, 피 모든게 새로웠다. 이렇게 개조함으로써 우주에 나간 인류는 시간과 공간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진다. 나이를 먹지 않는 육체, 바꿀 수 있는 육체에 시간이나 공간은 그 의미 자체가 상실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주로 나간 새로운 인류는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고, 그 와중에 수많은 외계 종족들과 마주한다. 그 외계 종족들 또한 자신의 행성을 떠나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우주는 놀랄만큼 광대하지만 인간이 살기 적합한 행성은 놀라울 정도로 적고, 공교롭게도 우주에는 인류와 같은 행성들을 원하는 다른 지적 생명체가 가득하다. 이들 중에서 무엇인가를 함께 나눈다는 생각을 지닌 종족은 거의 없다. 인류야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이들 모두는 전쟁을 하고 있다.  p.11 "
는 점이다.    
 

 [노인의 전쟁] [유령 여단] [마지막 행성] 으로 연결되는 소위 [노인의 전쟁]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전쟁' 을 화두로 삼고 있다. 폭력, 욕망,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결국 우리의 역사가 거울처럼 투영되어 있다. 특히 3부작의 완결편인 [마지막 행성] 은 '콘클라베' 라는 범 외계 연합과 인류의 마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치밀한 정쟁政爭과 음모들이 섞이고 섞여 상당한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음모위에 음모, '계計 위의 계計' 의 정점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음모와 정쟁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잣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그려지는데, 특히 인류가 만든 '우주 개척 연합' 의 치졸한 정치놀음과 황무지 행성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개척민 사회가 대비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 그리고, '주권적 사고' 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안에는 크게 세개의 정치 조직이 등장한다. 

우선 범 외계인 연합인 '콘클라베'. 콘클라베는 우주 종족 전체가 '땅따먹기' 전쟁에 너무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종족 자체의 발전이 고착화되어 오히려 퇴보를 시작하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조직된 연합이다. 이미 엄청나게 오랫동안 수백종에 달하는 외계 종족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남이 가지고 있는 행성을 빼앗고 빼앗기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인류, 즉 '우주개척연맹' 이 새로이 가세한 형국이었다. 이제 막 개척사업을 시작한 인류는 콘클라베가 기치로 삼고 있는 '개척 중지' 라는 현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치적인 모략으로 콘클라베라는 연합 자체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콘클라베의 제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신 개척지 '로아노크'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이제 한 가족이 된 [노인의 전쟁] 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존 페리' 와 [유령 여단] 에서 등장했던 '제인 세이건' 그리고 '조이' 가 있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이 이야기의 주제는 '정치' 이다. 이 모양새는 마치 현재 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범 외계종족 연합인 콘클라베는 역시 크게 두개의 파로 나뉘어 주도권을 쥔 싸움을 하는 중이고, 우주개척연맹은 로아노크의 개척민들을 미끼로 도박을 벌이는 중이며 그 안에도 구성원들의 정치적인 파벌싸움이 자리잡고 있다. 존 페리가 책임자로 내정된 로아노크의 개척민 사회 또한 트루히요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개척민 평의회의 주권을 쥔 정치싸움이 은근하게 벌어진다.
 그 안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정말 손을 뗄 수 없을정도로 재미있다. 음모 위의 음모를 밝혀내 가는 과정도 재미있고, 특히나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개성적이고 사랑스럽다.
 결국 정치를 둘러싼 음모와 음모, 계책과 계책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음모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위태롭게 서있는 존 페리의 인간성 - '진심' . 그것은 무엇이며, 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이 거대한 우주 전쟁의 엔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장르 문학은 - 그렇다, 지나치게 따지고 들어가면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우주로 나가든, 바닷속으로 들어가든, 핵폭발로 폐허가 되든, 모두 좀비가 되든 인류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장르 문학이랑 상상력에서 기반한 것이고, 순문학보다 더 '먹어주는' 구라를 얼마나 '완벽하게' 칠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그 안에 인류 문화 전반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의문이나 해답 등이 들어가면 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장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존 스칼지는 그러한 고전 문학의 클래스와 영상 세대에 어울리는 놀라운 상상력과 묘사를 두루 갖춘 작품들을 뽑아 낼 수 있는 재능을 보여준 작가로서, 이 3부작보다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 기대되는 작가임도 사실이다.  

 '정보의 바다, 영상의 세대'  

과연 존 스칼지는 SF장르 소설 매니아들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줄 것인가?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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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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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독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니시던 작은 교회를 다녔고, 대학때 보다 깊이있는 예배와 공부를 위해 좀 더 많은 신자가 섬기는 교회로 옮겼다. 20대 중반에는 청년부 회장도 맡고, 제자훈련도 받으며 신앙을 키웠고, 열정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적인 신앙관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현재 한국 교회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심도있는 공부를 하기도 했고, 젊고 박식하며 열린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목사님과 함께 이슬람, 성공회, 가톨릭을 넘나드는 성경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의문만이 가득했다. 사후의 세상부터가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실 종교의 대부분은 현실의 삶 보다는 사후의 삶을 중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사후 세상이 믿겨지지 않는다니. 그럼 뭘 믿길래 교회를 다니냐는 말도 들었다!

 결국 난 '기독교를 반만 믿는다.' 고 말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 그것을 한쪽만 믿는 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 즉 기독교의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이지만, 그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들의 종교 기독교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한 종파는 "예정론" 을 신봉한다. 내가 다니던 장로교의 교회도 철저하게 예정론을 신봉하는 교파였다.

 돈독하게 지냈던 목사님은 내게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더랬다. 내가 하나님을 접하고, 어쩌면 이렇게 의문과 의심을 갖는 것 또한 그분의 예정이신거고, 나는 결국 그분의 예정으로 인해, 의문과 의심을 거두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의문과 의심이 학문으로서의 '신학' 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목회자의 길이 아닌 신학도의 길을 권유하기도 하셨었다. 모든 의심과 의문을 내려놓고 순전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하게 '신' 의 뜻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신이 원하시는 대로' 라고 고백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인' 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그런 신앙인의 표상인 '목회자' 즉, '목사' 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중순 평양.

유엔군의 개입으로 열세였던 한반도의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전쟁 초기, 낙동강 유역까지 밀렸던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휴전선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함락시킨 뒤, 기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한다. 바로 그 시기의 평양. 육군 특무대 정치정보국 소속의 이대위는 유엔군 치하의 평양으로 파견되어, 파견대 대장인 장대령과 조우한다.

 이 대위가 평양으로 파견되어서 받은 첫번째 임무는 평양에서 일어난 목사 실종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평양이 유엔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평양 시내의 주요 교회의 목사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납치당한 14 명의 목사들 중 12 명이 총살되었고, 2명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대위는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를 만나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 12명의 기독교 목사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과정중에 비 인륜적인 집단 총살을 당했다면 서방 국가들에 북한군의 만행을 선전할 수 있다. 육군 정치 정보국은 이러한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두 목사의 생생한 증언을 통하고자 한다. 이 대위는 자신의 임무를 위해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나서는데, 두 명 중 젊은 목사인 '한목사' 는 미쳐버렸고, 남은 한명의 목사, '신 목사' 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

 과연 신 목사가 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는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대위는 죽은 열두명의 목사들 중, 절친한 사이인 박 대위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종교색이 강한 작품이다. 사건의 핵심에는 '신앙인' 이 자리잡고 있고, 또다른 축인 '박 대위' 는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도' 라고 부르며 의절한 상황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고, 죽음이 눈 앞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쳐가는 전쟁터. 그것도 적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나는 신앙인들의 갈등. 그것이 참으로 적나라하고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편이다. 토론과 논쟁의 핵심은 '설득' 에 있다. '종교' 는 본질적으로 토론이나 논쟁과 매우 흡사하다. 종교는 태생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위한 거대한 기구가 있고, 때론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한 특권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국 '설득' 이다. 인간은 '신'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섭리' 에 종속된 존재이며, 때로 그 인간의 인생은 '신' 또는 그 '섭리' 의 손길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지를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목사, 신부, 랍비, 부처, 도사, 사두인...등등이 성경, 성서, 카발라, 꾸란, 경전, 기도문 등등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종교는 아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지만 엄청나게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으니 바로 '신앙' 즉,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이성과 논리를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신앙인들은 불가사의한 대상인 동시에, 존경스러운 대상이다. 내가 신앙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것은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해소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얄팍한 지식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완벽하게 '신앙 안' 에서만 작용해야 한다. 신앙이 이성과 논리와 접목되면, '신의 뜻' 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고 적용시키려는 행동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대단한 신앙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뿐 만 아니라, 중세시대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신의 뜻' 을 마구잡이로 해석해대곤 했다. 신앙인들에게 '신의 뜻' 이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메시지이고, 신의 뜻을 해석하고 받든다는 '목회자' 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들에겐 신의 목소리와도 같을 터다.

 

 그 때, 1950년 10월의 평양은 지옥과도 같았을터다.

친구, 친지들은 어디선가 날아와 아무데서나 펑펑 터져대던 폭탄의 폭발에 휘말려 산산 조각나고, 연료가 없어 생쌀을 씹어야 했을터다. 생쌀과 같은 곡기라도 있었으면 다행이었을 터다. 유엔군으로부터의 구호 식량은 간신히 한 끼를 떼울 정도였을 터이고, 그것도 몸이 성해야 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식수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씻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터이고, 밤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격포와 전투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터다.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전염병. 그 속에서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평양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들 중 하나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1904년에 시작된 '원산 대부흥'의 종결점을 찍은 일종의 '기적' 으로서, 이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기독교가 퍼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치고 굶주린 평양 시민들에게 목회자들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을터다.

 그리고, 북한군의 잔혹한 총 앞에 무너져간 열두명의 목사들.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장렬하게 죽어간 열두명의 목사들이야 말로, 피폐해진 삶에 큰 위안이 되고, 자긍심이 되었으며, 원동력이 되었을터다.

 

신 목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열두명의 목사들이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했을 것이다. 북한군의 총부리 앞에 하나님을 부인하며 목숨을 구걸한 목사가 있었을수도 있다. 신 목사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두번째는, 자신이 신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열 두 명의 목사들은 죽었는데, 신목사와 한목사는 살아남았다. 한목사는 미쳤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신목사는 멀쩡히 살아나왔다. 열두명의 목사들은 최후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신목사는 마지막 순간 신앙을 거부하고 북한군이 시키는대로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과연 신목사는 무엇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의 신은. 그의 하나님은 어떤 일을 원하고 계시는가?

 

 작품을 읽는 내내 굉장히 괴로웠다.

과연 나라면 어찌했을까? 그리고 신목사가 처해있는 심각한 딜레마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신목사가 처한 환경은 '인간' 예수가 처해있는 상황과 대단히 흡사하다.

"저들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지만,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깊이 묻어나 있다.

죽은 목사의 숫자가 예수의 제자들과 동일하게 열두명이고, 박 대위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와 겪는 갈등은, 신목사가 자신의 하나님(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과 겪는 갈등을 대비시키고 있다. 박대위가 아버지의 신앙을 부정하고 미워하듯, 신목사 또한 자신의 신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부정의 마음이 자라난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실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양심' 이라고 불러보기로 하자. 결국 '신의 뜻' 은 우리의 양심의 방향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즉, 신의 유무나 신앙의 유무를 떠나도 이 작품이 하는 이야기는 명명백백하다.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고하지만, 대중들의 영혼은 구제할 수 있다. 어쩌면 일신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손가락질 받고, 비난받을 것이며 영원한 불명예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실을 드러내고 본 것을 모두 말하면 피폐해진 대중들의 영혼은 더욱 더 상처받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지만, 더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절망에 찬 대중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다.  

 

 '순교'

종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행위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하면 될까?

사람을 위한 희생이 아닌, 신을 위한 희생을 순교라고 한다. 순교의 개념은 어느 종교에나 있지만,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종교 자체의 기반이 '예수의 희생' 에 있기에 순교의 의미가 더욱 크고 중하다. '신앙' 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선 타인의 희망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희생은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종교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은 다름아닌 희생에 있다. 희생은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소외받은 자들에게 향했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으며,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까지 감싸안았던 숭고한 희생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종교적인 멘트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신목사의 결단 또한 그래서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무엇보다 절망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강인한 모습이 아름답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섬기는 종교의 지도자였지만, 스스로 그 율법을 어겼고, 그에 대한 책임도 끝까지 지고 간다. 자신의 절망을 타인의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대중들이 던지는 돌을 당당하게 맞아내고 비난들을 아낌없이 받아낸다.

 그도 인간이기에 한때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다. 때로는 스승 예수를 부인하기도 했고, 누구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이 모시던 스승 예수와 그가 설파하고자 했던 진리, '복음' . 즉 신앙을 위해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불에 타 죽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듯, 타인의 행위를 통해 감동받고, 감화되기 마련이다.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래한 초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목 앞에 칼을 들이대고, 굶주린 사자의 이빨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 에서 지극한 절망 속에서도 불꽃처럼 피어나는 희망을 본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절망하지만, 사람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진실과 사실. 그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의 뜻과 인간의 뜻. 그것들 중 진실은 무엇이고, 사실은 무엇인가?

희망과 절망. 그것의 차이 또한 무엇인가?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신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믿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이 있다고 믿고, 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과,

신이 존재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갈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국 이 작품 속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의 뜻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뜻을 위해 사는 사람은 등장한다.

모든 진실과 모든 절망. 그리고 모든 고통과 모든 고난을 등에 지는 사람.

자신의 모든 삶을, 눈 앞에서 고통받는 나 아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완벽하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  그렇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진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진정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 을, 진정한 '신앙인' 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한층 더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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