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아이 3
YU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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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내가 본 최고의 애니메이션인 <늑대 아이>가 원작인 만화책을 읽게 된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내용은 다 알지만, 심지어 내용도 완전 똑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쩔 수 없었다기 보단 꼭 읽고 싶었다. <늑대 아이>는 정말 최고였으므로. 극장에서 두 번 보지 못한 게 그토록 아쉬운 명작이었으니까.

 Yu라고 하는 작화가가 원작 애니메이션 <늑대 아이>를 그대로 지면에 옮긴 작품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좀 아쉽다. 당장 <빙과>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의 내용이나 연출뿐 아니라 색다른 무언가 - 가령 원작자가 참여한 오리지널 에피소드 같은 것 - 가 있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을 본 지 5년 가까이 지났는데 다음 내용이 눈에 선명히 기억나는 내게 있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독이 될 수 있지만 안정적이게도 약이 될 수 있다. 몇 번을 강조해도 시원찮을 정도로 명작이기에 그대로 옮기다시피 그려도 상관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원작에 폐를 끼치거나 하진 않기에 작화가의 자질을 딱히 의심할 것도 - 다 좋은데, 개인적으로 저 3권의 표지는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너무 울지 않나...? - 없다. 여전히 아메를 찾아 비 내리는 숲을 헤매는 하나의 외침은 내 한 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서글프고 감동적이며 유키와 아메가 늑대의 모습으로 설원을 누비는 것도, 전원 생활에 적응하는 세 가족의 여정이 주는 따뜻함은 어디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상은 애니메이션을 다시 감상한 후에 마저 풀고자 한다. 원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읽힌 것도 있고 전개가 다소 빨랐던 것도 있다. ... 사실 이건 핑계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에 풀 이야기를 벌써 적지 않겠다는 계획에서 이러는 것이다.;; 조만간 찾아 볼 예정이라서 말이다.

괜찮아. 이제 어른이니까.

어른...?

자신의 세계를 발견한 거야. - 3권 제15막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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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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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4







 일본하면 아무래도 '스미마센'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치곤 가장 중요한 사과를 정부 차원에서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스미마센'을 말하는 일본인을 우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떠오를 수 있다. 그게 진심이건 체면상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건, 아니면 정말 습관이건 외국인으로서 생경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문학하면 주로 심상 세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주로 그 심상 세계는 죄의식으로부터 비롯됐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나 배우자에게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사죄 어린 말을 읊조리는 게 귀에 선하다. 사람에 따라 평가와 감상이 제각각이겠지만 대체로 이런 일본 문학의 특징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것으로 꼽히며 딱히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작풍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너무 심하면 읽는 내가 다 우울하고 찝찝해지긴 하지만.


 노자와 히사시는 나에게 있어 특별한 작가다. 이 작가는 자살로 생이 마감됐다는데 그 날짜가 내 생일과 같다. 연도는 다르긴 하나 나랑 마냥 관계 없다고 여겨지지 않으니... 뭐 어쩌자는 걸까 싶지만 불현듯 그런 배경이 미세하게라도 작품 속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니 순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한해서는 그렇게 무의미한 접근도 아닐 것 같다.

 7년 전에 이 소설을 읽을 당시, 너무 어두운 작풍과 몰입감이 압도적인 초반부에 비해 늘어지는 전개를 보인 후반부 때문에 시큰둥하게 읽었었다. 다시 읽기까지 걸린 7년이란 시간 동안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이번엔 영 다르게 읽혔다. 이렇게 좋은 작품이었나? 책을 두 번 읽을 때마다 느끼곤 하지만 이번 만큼 인상이 크게 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절판된 책이라 이득을 본 기분이다.


 수학 여행을 떠난 주인공 가코는 아빠, 엄마, 남동생 2명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들이 있는 수학여행지에서 도쿄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가코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참사가 가족을 덮쳤었는데 이는 가코에게 아주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후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가족을 죽인 범인을 검거하는 것부터 재판, 사형 판결까지 전부 지켜봐야 했던 가코는 누구도 헤아릴 길이 없는 감정 속에서 살게 된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을 비롯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가코의 마음 속 편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코는 가족을 죽인 범인에게 자기와 동갑내기인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진다. 이윽고 가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범인의 딸 미호에게 접근하는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는 가해자,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가해자에게 천인공노할 짓을 범해 분노를 산 나머지 살해당한 피해자. 세간의 평가처럼 법과 도덕 사이에서 엇갈린 입장인 두 아버지들은 각자의 딸에게 형용불가한 상처를 남긴다. 가족을 잃은 가코와 법에 의해 아버지를 잃게 될 미호. 이 둘은 처지가 달라 보이지만 상처의 깊이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듯 같아 보인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지만 일본은 가족 단위의 연좌제가 극심한 나라다.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선에서의 연좌제긴 하지만 말이다.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것만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든 아니게 생각하든 그 가족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오히려 마음의 짐을 지는 게 바로 일본인답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는데 가코와 미호, 이 둘의 내면은 좀처럼 파고들기 민감한지라 그 심상 세계가 읽기에 여간 신선한 게 아니었다. 일가족 살인사건의 생존자나 범인의 딸이라는 사실이 자기 인생과 결코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텐데 과연 이 둘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게 궁금해 계속 읽어나갔다.

 탁월한 심리 묘사란 어느 작품이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미덕이란 갖추기가 쉽지 않기에 미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 어려운 걸 잘 해낸다. 사람의 심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 함부로 속단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런 미묘함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가령 가코의 경우에는 범인 검거 소식에 오줌을 지릴 만큼 두려움에 떨며 범인에게 증오심을 품다가도 세간의 저속한 평가대로 아버지가 죽어 마땅한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게다가 가해자의 딸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넘겨짚지만 어쩔 땐 자기완 다르다고 어려운 처지를 비웃다가도 나중엔 곤경에 처한 미호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미호의 감정에 동화하는 등 이래저래 연구 대상일 정도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정으로 규정하기도 그렇고 복수극이라 하기엔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여러모로 참 단순하지 않아 옛날에 읽었을 땐 하품만 나온 모양인데 지금은 오히려 이 복잡미묘함이 마음에 와닿았다. 무슨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딸이 친구가 되는 것은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고 죄책감과 증오가 섞인 가코의 내면 세계도 흥미진진했는데 그렇다 보니 예측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꽤 스릴 넘쳤다.

 최근 전공 시간에 드라마란 주인공이 제자리로 올 수 없는 이야기라 배웠다. 이야기의 첫 지점에서의 주인공과 결말에 다다른 주인공은 그간 겪은 일 때문에 다른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라 한다면 소설 속 가코의 여정은 그에 꼭 알맞다고 생각한다. 중심 사건의 대세엔 영향이 없지만 가코의 내면 세계는 분명 달라졌다. 검은색에서 흰색처럼 아주 판이하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던 가코가 갈피를 잡게 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 작품은 속시원하지 않더라도 가코의 방황을 결코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만큼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적극성은 죄의식을 못이겨 웅크리는 이들에게 꽤 모범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과연 '죄의식의 나라'답게 죄의식에 대해 진지한 탐구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그 진지함이 남달라 작가의 일생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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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9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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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지난번에 <점과 선>을 읽은 뒤로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많은 관심이 갔다. 찾아보니 국내에 상당히 많은 작품이 출간됐던데 너무 많은 나머지 고민이 앞섰다. 일생 동안 몇 백편을 썼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아무튼 많은 분들이 추천해주셨고 어떤 작품을 읽을지 심사숙고하기로 했다. 다작하는 작가가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말이다.

 친구에게서 빌려 읽은 이 <모래그릇>은 마쓰모토 세이초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문학동네 세계명작선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입대 직전에 출작된 책이라 잊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세계명작선이 추리소설을 펴냈다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려면 어쩔까 싶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분명 추리소설을 넘어 일본 소설계에 분명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니 만큼 어떻게 보면 진작에 세계명작선에 포함되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높은 추리소설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 죄 사회파 추리소설에 속하는 걸 보면 말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원조이자 후배 추리소설가들이 추앙을 아끼지 않는 당사자인 만큼 만나는 작품마다 처음 읽는데도 불구하고 어째 어색하지 않았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자신의 데뷔작인 <십각관의 살인>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곤 했지만 적어도 이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만 봤을 때 그 불만은 썩 와닿지 않는다. 수많은 양산형 사회파 추리소설이 있긴 하지만 '원조'는 확실히 다르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난 이렇게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사회파 추리소설은 처음 읽어봤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여행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소년 시절의 기억은 이후의 작가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점과 선>도 이미 경험했지만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엄청 발품을 판다. 모든 작품이 다 이렇진 않겠지만 확실히 여행 추리소설하면 이 작가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매 장마다 계속 기차를 타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고 그렇게 움직여야 할 정도로 미궁 속에 빠진 사건이나 또 그를 파고드는 형사의 끈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었다.

 목격자들에게서 피해자가 '가메다'라는 말을 한 것을 유추 삼아 수사가 시작되고 끝내 진상에 다다르는 쾌감을 선사해줬다. 사건의 진상은 비교적 단순한 편에 속하는데 원래 단순한 사건일수록 미궁에 빠지기도 쉽고 추리소설화하기도 쉽지 않다. 이 작품에선 이런 미궁을 주인공 형사가 끈기 어린 추적으로 조금씩 파고들게 되는데 이 과정이 아주 디테일하다. 이 과정 속에서 우연도 있고 형사가 한 발 늦기도 하지만 과정 자체가 여행과 비슷한 만큼 자연스레 몰입이 된다. 분량이 길다보니 좀 지치기도 하지만 진짜 형사가 이런 식으로 수사를 할 것이라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방언, 음악 등 온갖 소재를 녹여낸 것도 대단했다. 철저한 조사에 앞서 저런 소재를 채택한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라본 당시 일본의 사회상은 그대로 작품 속에 녹아드는데 그렇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역사성뿐만 아니라 이렇게 인간의 추한 얼굴을 추리소설적으로 풀어내는 재미도 있으니 오늘날까지 회자되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국에 밝혀지는 범인의 사정이나 사건을 이렇게 꼬게 만든 상황도 그렇지만 인간의 야망이란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치달으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범인이 살인을 범하게끔 몰아간 두려움과 그 뒤에 발생한 연쇄 살인도 살펴보면 정말 부질없게 느껴진다. 뭐 이런 동기가 있을까 싶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당시의 일본이 이 정도로도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 만큼 위태로운 자화상들이 많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그렇고 일본 근대사를 엿봐도 알 수 있지만 일본은 패전했지만 운 좋게도 한국 전쟁 특수로 인해 재기의 발돋움을 딛고 이윽고 패전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경제적인 성장을 이룬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그들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축제였고 이 작품 <모래그릇>의 출간 시기도 그 전으로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그 시대가 맞다면, 아마 그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사람들 개개인에게 있어서 패전 이전의 일본 만큼이나 혼란스런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예술가들의 그릇된 가치관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성공'에 대한 갈망은 어마어마했으리라 본다. 심지어 미국에게서 민주주의도 심어진 덕에 모두가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시대로 등떠밀려졌을 것이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 성공을 향해 어떤 방식으로 오르는가는 문제가 된다. 누군가는 성공을 향해 해가 되는 과거 기록은 전부 지워야 할 것이고 버릴 수만 있다면 방해가 되는 것은 사람이건 목숨이건 해치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이런 가치 전도 현상이 만연했던 시기였던 게 아닐까.


 적고 보니 요즘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싶지만 확실한 건 어느 시대건 반드시 경계해야 할 문제다. 성공이란 것은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기도 해서 거기에 다가서는 자신에 도취된 나머지 주위의 수많은 가치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 만큼 위험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나. 이 작품만 봐도 그렇다. 연쇄 살인의 희생자들의 사망 소식이 유독 가슴 아프게 다가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저 좋다고 하는 사람을 자신의 사익에 이용하는 것은 진짜 악질이지 않은가. 정말이지 이런 인물은 추리소설에서 많이 접하지만 접할 때마다 크나큰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정말 묵직한 사회파 추리소설이었다.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재미와 주제의식 덕에 작가의 이름값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분량이 좀 더 짧았으면 좋았겠지만 주인공의 긴긴 수사 과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제 작가의 단편을 읽어볼까 한다. 이 작가는 장편도 좋지만 단편이 정말 좋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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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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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6.5








 요즘들어 공감이 많이 가는 제목이다. 미안하다고 말해. 아주 사이다가 따로 없다. 정말이지 진즉에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는데 안하무인하게도 입 꾹 다물고 있는 사람에게 꼭 던지고 싶은 말이다. 차마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 했지만 끝까지 가관인 누구 때문에 적잖이 속이 터지는 요즘에 아주 시기적절한 제목이 아니었나 싶다.

 소설은 아주 단순하다. 어딘지 증오가 서린 제목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꽤 직설적인 작품이다. 시리즈의 주인공 조 올로클린이 우연히 살인사건 수사에 개입되는 이야기와 3년 전에 납치된 어느 소녀의 이야기가 병렬로 진행된다. 이때 소녀의 이야기가 아주 생생한데 꽤 감정적이라서 과잉된 느낌도 적잖이 있지만 그 감정의 떨림이 책을 들고 있는 손가락에 전해지기도 했다. 이런 장치가 극중 긴장감을 높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는데 사실 이는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은 대다수 차용하는 서술 방식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 로보텀이라는 이름은 처음 접했고 당연히 '조 올로클린' 시리즈도 처음 접해보는데 이 작품만 읽어봤을 때는 그 매력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심리학자인 주인공이 프로파일링을 펼치는 스릴러가 영미권에서 한두 작품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 작품에서 조 올로클린은 심리학자로서의 면모보다 차라리 심리학을 전공한 형사나 탐정인양 활약해 시리즈의 정체성에 의심이 갔다. 한마디로 개성이랄 것을 엿볼 수 없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조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것조차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사건의 진행 양상도 그렇다. 술술 읽히긴 하는데 그게 몰입이 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휙휙 넘긴 것일 뿐인지 애매하다. 또 중간중간 소녀의 이야기도 지속적으로 삽입되기 보단 텀을 두고 결정적인 순간에 들어왔으면 훨씬 충격적이고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녀의 감정 묘사야말로 이 작품의 포인트였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매번 읽기가 좀 부담스러웠다.


 마이클 로보텀과 시리즈의 다른 작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대 이하였다. 작가를 둘러싼 그 수많은 찬사를 공감하기 힘들었고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오로지 제목만 기억날 듯하다. 미안하다고 말해. 작중의 파이퍼가 느끼는 바와 같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미안해할 줄은 모른다. 알고서 그러는 것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후자의 경우라면 병이지만 전자는 의심할 여지가 없잖은가. 이건 약간 다른 얘긴데, 미안한 짓임을 알고서도 했고 알았기에 숨겼다면, 이것 자체만으로도 들통났을 때 벌을 받겠다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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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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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흔히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두고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관용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곧 짐승이라는 이 등식엔 거부감이 든다. 짐승은 자연계에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의 논리 아래 본능적이나 합리적으로 살아간다. 거기엔 선도 악도 없고 생존의 문제만 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선 잔학무도하게 비춰보일 수 있으나 실상 짐승의 의지는 사람의 시선 안에서만 잔학무도할 뿐이다.

 나는 그래서 '짐승 같다'는 말보단 '악마 같다'는 말로 바꿔 표현했으면 좋겠다. 악마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상 속 존재지만 그 상징하는 바가 워낙에 명확하지 않은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인륜을 저버린 인간에게 적어도 짐승보다 어울리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인 범죄자와 공범들의 범죄 소굴을 '짐승의 성'이라 한다.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함부로 비교 대상에 옮기면 안 된다.

 혼다 테쓰야의 소설은 처음 접해봤다. '히메카와' 시리즈의 드라마는 봤는데 그 드라마가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다면 이 작가가 수위에 있어서 거침없는 표현력을 자랑하겠구나 하고 짐작했었다. 더군다나 읽기 전부터 이 작품에 대해 잔혹한 걸 싫어하거나 비위가 약하면 읽지 말라는 경고를 접하기도 해서 상당히 긴장하고 읽었다. 덕분인지 구토만은 면하지 않았나 싶다. 중간중간 속이 메스꺼웠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 소설이 '기타큐슈 연쇄 감금 살인사건'이라는 충격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다 읽은 다음에 사건 자료도 좀 찾아봤다. 확실히 실화에 비해 소설이 수위가 낮긴 한데 작중의 메시지 때문에 소설 쪽이 더 임팩트가 있다. 실화는 충격 그 자체라면 소설은 충격과 공포다.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는 인간의 심리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그에 동화되기까지 하는지 간접적이나마 체감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가해자의 진술을 듣는 형사들이 점점 사건의 잔혹성에 익숙해진다는 부분이 있는데 읽는 나 역시 공감했다. 이 익숙함이야말로 인간의 오감을 마비시키는 아주 무서운 것이 아닐까. 어째서 피해자들은 그토록 잔인한 범인에게 휘둘려졌는가. 사람들은 범인에 대한 의지 상실과 무력감을 들어 해석하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이 익숙함이말로 사람을 악마로 탈바꿈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읽는 나조차도 충격에 무뎌지는 걸 느낀 터라 작가의 이 해석은 심히 와닿았다.


 읽어나가는 데에 있어 너무 잔인한 묘사가 난무해 상당히 난이도가 높고 그렇기에 남한테 함부로 추천은 못하겠지만 결코 무가치한 내용은 아니었다. 추리소설로서 봤을 땐 결말도 너무 열려있을 뿐더러 무엇보다 결말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터라 아쉬운 감이 있는데 범죄 소설, 특히 르포적인 측면에서 보면 꽤 밀도가 높다. 다시 말하지만 자극적인 작풍임에도 작가가 파고들려고 했던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탐구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매우 참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지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정신이지 않은가 하며 감탄했다.

인간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에도 범죄의 싹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언제 자신도 범죄자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신과 범죄자는 뭐가 다른가. 범죄가가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 2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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