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9.4







 일본하면 아무래도 '스미마센'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치곤 가장 중요한 사과를 정부 차원에서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스미마센'을 말하는 일본인을 우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떠오를 수 있다. 그게 진심이건 체면상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건, 아니면 정말 습관이건 외국인으로서 생경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문학하면 주로 심상 세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주로 그 심상 세계는 죄의식으로부터 비롯됐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나 배우자에게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사죄 어린 말을 읊조리는 게 귀에 선하다. 사람에 따라 평가와 감상이 제각각이겠지만 대체로 이런 일본 문학의 특징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것으로 꼽히며 딱히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작풍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너무 심하면 읽는 내가 다 우울하고 찝찝해지긴 하지만.


 노자와 히사시는 나에게 있어 특별한 작가다. 이 작가는 자살로 생이 마감됐다는데 그 날짜가 내 생일과 같다. 연도는 다르긴 하나 나랑 마냥 관계 없다고 여겨지지 않으니... 뭐 어쩌자는 걸까 싶지만 불현듯 그런 배경이 미세하게라도 작품 속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니 순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한해서는 그렇게 무의미한 접근도 아닐 것 같다.

 7년 전에 이 소설을 읽을 당시, 너무 어두운 작풍과 몰입감이 압도적인 초반부에 비해 늘어지는 전개를 보인 후반부 때문에 시큰둥하게 읽었었다. 다시 읽기까지 걸린 7년이란 시간 동안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이번엔 영 다르게 읽혔다. 이렇게 좋은 작품이었나? 책을 두 번 읽을 때마다 느끼곤 하지만 이번 만큼 인상이 크게 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절판된 책이라 이득을 본 기분이다.


 수학 여행을 떠난 주인공 가코는 아빠, 엄마, 남동생 2명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구들이 있는 수학여행지에서 도쿄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가코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참사가 가족을 덮쳤었는데 이는 가코에게 아주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후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가족을 죽인 범인을 검거하는 것부터 재판, 사형 판결까지 전부 지켜봐야 했던 가코는 누구도 헤아릴 길이 없는 감정 속에서 살게 된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을 비롯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가코의 마음 속 편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코는 가족을 죽인 범인에게 자기와 동갑내기인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진다. 이윽고 가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범인의 딸 미호에게 접근하는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는 가해자,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가해자에게 천인공노할 짓을 범해 분노를 산 나머지 살해당한 피해자. 세간의 평가처럼 법과 도덕 사이에서 엇갈린 입장인 두 아버지들은 각자의 딸에게 형용불가한 상처를 남긴다. 가족을 잃은 가코와 법에 의해 아버지를 잃게 될 미호. 이 둘은 처지가 달라 보이지만 상처의 깊이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듯 같아 보인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지만 일본은 가족 단위의 연좌제가 극심한 나라다.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선에서의 연좌제긴 하지만 말이다.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것만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든 아니게 생각하든 그 가족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오히려 마음의 짐을 지는 게 바로 일본인답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는데 가코와 미호, 이 둘의 내면은 좀처럼 파고들기 민감한지라 그 심상 세계가 읽기에 여간 신선한 게 아니었다. 일가족 살인사건의 생존자나 범인의 딸이라는 사실이 자기 인생과 결코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텐데 과연 이 둘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게 궁금해 계속 읽어나갔다.

 탁월한 심리 묘사란 어느 작품이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미덕이란 갖추기가 쉽지 않기에 미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 어려운 걸 잘 해낸다. 사람의 심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 함부로 속단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런 미묘함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가령 가코의 경우에는 범인 검거 소식에 오줌을 지릴 만큼 두려움에 떨며 범인에게 증오심을 품다가도 세간의 저속한 평가대로 아버지가 죽어 마땅한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게다가 가해자의 딸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넘겨짚지만 어쩔 땐 자기완 다르다고 어려운 처지를 비웃다가도 나중엔 곤경에 처한 미호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미호의 감정에 동화하는 등 이래저래 연구 대상일 정도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정으로 규정하기도 그렇고 복수극이라 하기엔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여러모로 참 단순하지 않아 옛날에 읽었을 땐 하품만 나온 모양인데 지금은 오히려 이 복잡미묘함이 마음에 와닿았다. 무슨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딸이 친구가 되는 것은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고 죄책감과 증오가 섞인 가코의 내면 세계도 흥미진진했는데 그렇다 보니 예측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꽤 스릴 넘쳤다.

 최근 전공 시간에 드라마란 주인공이 제자리로 올 수 없는 이야기라 배웠다. 이야기의 첫 지점에서의 주인공과 결말에 다다른 주인공은 그간 겪은 일 때문에 다른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라 한다면 소설 속 가코의 여정은 그에 꼭 알맞다고 생각한다. 중심 사건의 대세엔 영향이 없지만 가코의 내면 세계는 분명 달라졌다. 검은색에서 흰색처럼 아주 판이하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던 가코가 갈피를 잡게 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 작품은 속시원하지 않더라도 가코의 방황을 결코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만큼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적극성은 죄의식을 못이겨 웅크리는 이들에게 꽤 모범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과연 '죄의식의 나라'답게 죄의식에 대해 진지한 탐구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그 진지함이 남달라 작가의 일생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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