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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ㅣ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8.8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인공지능 관련 이야기를 계속 접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뭐가 됐든 간에 테마를 정한 일련의 독서는 아주 흥미롭다는 것이다. 일전에 읽은 <당신을 위한 소설>의 띠지 - 난 그 부분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 에 같은 출판사에 나온 책 한 권이 소개됐다. 바로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이 책이었다. 전혀 소설 같지 않은 제목인데 작가 이름은 익히 들어온 터라 궁금증이 일었다. 'SF 사상 보기 드문 정치함과 우아함을 갖춘' 작가라니. 이런 수식어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SF는 장벽이 그리 낮은 장르는 아닌 것 같다. 발군의 상상력과 과학적 고증과 토대가 전제되지 않는 한 흉내내지 못하는 장르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비단 현실적 한계 안에서의 과학을 일컫진 않는다. SF가 Science Fiction의 약어로 '공상' 과학을 뜻하는 만큼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과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을 가리킬 테다. 그리고 과학이란, 내가 봤을 때는 인간을 제외하고선 성립되지 않은 분야인 듯하다.
인간의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보다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인간을 위한 마음'이 없는 이상 과학은 발전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가끔 가치가 전도된 일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 비인간적 작태를 보인다는 설정의 픽션을 접하기도 하는데 한낱 문학도인 내가 봐도 있을 수 없는 일로만 비춰진다.
SF의 매력도 이런 과학의 태생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사람의 미래를 위해 상상하는 낭만이 없는 SF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무늬만 SF라도, 정통 하드 SF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관건은 과학과 미래가 우리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가, 그를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처음 접한 테드 창의 소설은 아주 이상적인 SF였다. 가상 세계에서의 인공지능 아바타인 '디지언트'를 두고 둘러싼 윤리적, 상업적 논쟁과 더불어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묘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가장 긴 작품 - 200쪽 내외 - 이라는데 체감상으론 그보다 2, 3배 분량이 두터웠던 것 같다. 아무래도 SF적 서사에 어색한 탓도 있었겠지만 빨리 읽어내려가기에 아까운 '교감'이 그려진 덕분인 것도 같다.
최근 본 영화 <옥자>는 초반부에 미자와 옥자의 종을 초월한 교감을 짧고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반면에 이 작품은 오로지 인간과 인공지능 아바타의 교감에 모든 분량을 동원해 천착한다. 이런 전개가 나로선 어색할 따름이었다. 다분히 SF적이고 학술적이고 설명적인 일부 내용은 솔직히 지루할 때도 있었다. 흥미를 돋구는 내용이지만 견문이 좁은 탓인지 머릿속으로 소설의 정경을 온전히 그려내기가 그리 쉽진 않았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아도 두 번째 읽을 땐 또 다르겠지? 읽는 내내 두 번째 독서를 기약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작품이 한 둘은 아니다. 사실 요즘 들어 더욱 그런 것 같다. ...어쨌든 하드 SF라 명명되는 만큼 결코 가볍게 읽히진 않았으나 불순물이 끼지 않은 순수하고도 진중한 SF인 것은 초심자인 나조차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또 작중에서 다뤄진 가상 세계의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분명 컴퓨터 세대인 우리 세대부터 대두된, 일종의 전유물이기도 하니 디테일하게는 몰라도 충분히 공감할 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아니었더라면 난...
SF는 여전히 내게 진입 장벽이 높지만 도전을 밥먹듯이 하니 그 매력이 만만찮게 풍겨온다. 조만간 읽을 예정인 작품들이 몇 있는데 정말 기대된다.
관계란 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독자적인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다가도 귀찮아지면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아이인데도 최소한의 보살핌만으로 때우려는 부모들도 있다. 처음으로 한 번 싸우자마자 헤어지는 연인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이들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상대가 애완동물이든 자기 아이든 연인이든,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욕구와 자기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의지가 있어야 한다. - 2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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