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9.4







 <13.67>의 저자인 찬호께이의 작품이자 흔치 않은 중국 추리소설이며 미스터 펫이란 작가와의 합작으로 SF가 가미됐다기에... 하여튼 여러 이유로 읽게 된 책이다. 뭐 하나 이목을 끌지 않는 요소가 없는데 기대 이상의 심오함과 퀄리티를 선보여 꽤나 만족했다. 특히 SF와 추리소설의 결합이 참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내니 눈이 뜨이는 기분이다.

 최근에 읽은 SF 소설인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도 가상 세계가 주된 배경이었다. 요즘 SF계에서 트렌디한 설정인 건가? 방식은 달랐지만 이 작품도 컴퓨터 게임이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 익숙할 가상 세계를 다루고 있었다. 아주 SF적으로, 또 추리소설적으로도.


 홍콩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와 대만의 추리소설가 미스터 펫이 번갈아 쓴 연작은 꽤 흥미로운 작품들로 구성됐다. 수감자의 형량을 정하지 않고 교화 정도에 따라 석방시키는 제도가 도입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출소자가 다시 범죄에 손을 대는가 살펴봄으로써 형량을 정한다는 설정인데 해당 시뮬레이션 인공지능의 매커니즘과 인공지능의 등장에 따른 변화를 그려냈다. 전자를 찬호께이가, 후자를 미스터 펫이 그렸는데 배경은 중국이 아닌 미국과 일본이다. 딱히 이질감은 없었는데 굳이 중국 작가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사실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압도적인 현실감을 내포한 가상 현실의 등장이 인간사에 미치는 것의 윤리적 논란과 우리가 두 발로 선 현실 세계의 경계선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가 아주 장관이었다. 결국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결론일지라도 데이터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충격적인 얘기였다. 꽤나 정밀하게 범죄를 예측한다 하더라도 기계를 맹신해도 되는 걸까? 소설은 해당 시스템의 장단점을 부각시킨다. 아니, 대개 단점을 지적했다.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허점과 더불어 시스템에 휘둘리는 인간 자체의 문제점도 맹렬히 드러낸다.


 솔직히 대략의 흐름은 어느 정도 예상되긴 했지만 설정을 구축하는 디테일과 예측 불허한 전개 덕에 탄력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 미스터 펫이 쓴 이야기의 설정은 난해하고 뜬금없는 경향이 있었는데 페이메이구나 니지마 료코 같은 캐릭터는 또 괜찮아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미스터 펫이 보다 추리소설적이고 찬호께이의 글은 SF 성향이 짙었는데 둘 다 가상 세계의 이모저모를 낱낱이 다루고 있어 소설이 전체적으로 풍성했다. 특히 찬호께이는 분명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알기 쉽게 묘사하니 아주 읽기 편했는데 <13.67>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싶었다. SF로도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었다.

 가상 현실이 주요 소재인 탓에 세계관이 무너지는 체험이 잦았는데 혼란스럽긴 해도 꽤 매력적이었다. 그 밖에도 감탄스런 부분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첫 번째 소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말하진 못하겠지만 화자인 연쇄 살인범의 범죄 생활은 여느 사이코패스가 그렇듯 사소한 이유로도 치밀하게 범죄에 임하는 자세는 봐도 봐도 간담이 서늘했다. 작품의 설정과 동떨어진 것 같으면서도 크게 맞닿은 부분이기도 해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런 추리소설은 쉽게 접할 수 없을 것 같다. SF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런 SF도 쉽게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런 혁신적인 작품을 계속 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잔인한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의 세계 속 인물들이 겪는 게 낫지요. - 100p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해 생겨났고, 인간성은 과학기술 때문에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혐오하는 거예요. 난 항상 기계보다 사람을 믿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요. - 390p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주었는지, 무엇이 게임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뮬레이션 중에서 하나만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또다른 시뮬레이션을 꿈꾸고 있으니까. - 52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