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9.4






 우리나라 역사 중에 슬픔의 의미가 절대로 퇴색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몇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의 비극으론 아무래도 세월호 사건이 꼽히겠고 일제 강점기의 치욕은 지금까지도 옆 나라가 사과를 하지 않는 통에 슬픔이 가실 길이 없다. 내가 이번에 읽은 작품은 5월을 '슬픔의 달'이라고 불리게 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소설이다.

 어, 솔직히 말하면 80년대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 십 년도 뒤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서 있어서는 '약간 지난' 축에 드는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삼풍 백화점이나 성수 대교 붕괴, IMF 등 엄청난 사건이 있었고 또 사건의 당사자가 이제는 일선(현장? 어떻게 표현해도 의미가 좀... 어쨌든) 물러나서 크게 와닿지 않았고 교과서에서만 접하는 사건 정도로 이해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광주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사건의 비참함을 짐작하기가 약간 어색한 감도 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나는 작품에게 꽤나 큰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주인공이 자신의 친누나를 추억하는 이 짧은 성장 소설은 분량이나 주인공의 한정된 시각 탓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효과적으로 들여다봤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이것만 해도 나의 무관심했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초반에 주인공의 동급생 두 명이 치고 박고 싸운 걸 갖고 담임의 대처를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성과 의의에 연동시켜 풀어낸 것은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선뜻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쓰니 대번에 이해가 됐다. 또한 청소년 소설로서도 청소년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와 사고에 맞게, 한마디로 살아숨쉬는 것 같은 역동적인 캐릭터를 내세웠는데 청소년 소설이 흔히 범하고 마는 오글거림이나 현실과의 부조화는 느껴지지 않아서 참 좋았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 짧은 분량과 주인공의 연령대다. 분량이 200쪽도 안 되는데 누나와의 추억을 어린 시절부터 되새기는 것은 정말 좋았지만 이 정도 필력이면 충분히 더 쓰고도 남았을 텐데 너무 금방, 느닷없이 끝나서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이야기도 주인공이 너무 어려서 운동의 실질적인 여파가 그렇게 많이 체험하지 못했기에 더 내밀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말이다.

 기획 취지는 상당히 좋았고 이야기도 저자의 필력이 상당해서 이야기 속에 부족함 없이 빨려 들어갈 수 있었으나 복선 없이 금세 당도한 결말, 그리고 취지가 무색되리만큼 주인공의 운동과 딱히 상관없는 추억 회상에 공들인(그 자체로는 매우 좋았지만) 탓에 안타까움이 배가된다.


 그렇다 해도 너무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에 국한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서글픔과 아픔을 잘 전달한 이야기라는 것엔 틀림없다. 그래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상을 받은 채, 오히려 작품 속에선 묘사가 부족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배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배운 사람들이 더 무서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들처럼 배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 15~16p




민주주의를 우선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런 사회를 만든다면 이 민주 묘역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그렇다. 광주의 오월, 이 오월이 슬픔으로 남느냐, 아니면 명예의 훈장이 되느냐는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렸다. 선생님은 믿고 있다. 10년, 20년 뒤 여러분이 성인이 되었을 즈음이면 이 묘역은 반드시 영광의 성지가 되라라는 것을..... - 42~4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문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9.6





 이 책은 '비행기 납치, 밀실 살인, 판타지의 수수께기 3종 세트!'라는 선전 문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에 이끌려 읽은 사람들은 '이도저도 아닌 난잡함과 산으로 가는 막장'을 선사했다고 입을 모으던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근거가 궁금해서 읽게 됐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냐고 내 자신도 의아했지만 때론 이런 것도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남이 가지 말라는 길도 한 번쯤 걸어볼 만한 것 같다.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납치하는 3명의 납치범. 나름 순조롭게 납치극이 진행되는 중에 벌어진 이해불가한 밀실살인. 그리고 납치범들의 진의. 기대 이상으로 즐길 요소가 많았고 내 개인적으로는 각각의 요소 자체만으로도 재미를 느꼈고 이들의 연결고리 또한 자연스러웠다고 느꼈다. 기대를 안 하고 읽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 중에 제일 재밌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대형 납치극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것이라 크게 기대되진 않았다. 이런 비행기 납치의 목적은 대체로 답도 없는 인질 교환(납치범의 경우엔 조직의 두목이나 교단의 교주 정도?)이나 거액의 돈, 아니면 묻지마 류의 쾌락 범죄가 대부분이라 이 책의 납치범들도 이 중 한 부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처럼 그 진의가 쉬이 파악되지 않는 납치극은 처음이었다.

 결연하면서도 때론 경건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이 3명의 납치범의 저의에 대한 궁금증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간다. 물론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나는 괜찮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질색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궁금증을 제시하고 끌고 가는 능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원초적인 재미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전개를 펼쳤다고 생각한다.


 밀실살인도 마찬가지다. 납치극엔 어울리지도 않고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해서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집어 넣었는지 궁금해 계속 읽어나가게끔 만든다. 독자인 우리들만큼이나 등장인물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이때 사건을 해결할 탐정역으로 선출되는 인물인 '자마미 군'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키나와의 자마미 섬이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의 이 남자는 의도치 않게 추리력을 선보였다가 반강제적으로 밀실 살인을 풀어야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자마미 군은 그를 빌미로 납치 사건을 들쑤시려 드는데 이런 대담무쌍한 인물은 난생 처음 봤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우스이 유카라는 탐정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자마미 군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아마 더 이상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을 텐데 비교적 단순했던 밀실살인의 트릭보다도 이 캐릭터와 티격태격하는 납치범 마카베와의 케미가 난 더 기억에 남았다. 탐정을 비롯해 캐릭터의 매력이 어째서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이 밀실살인이 그렇게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문스럽긴 하다. 맥락상 꼭 필요했다기 보다는 오로지 재미를 위해 첨가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차마 사족이라고까지 매도하지 못하겠는 이유는 일단 추리 과정이 정말 재밌었고 밝혀지는 동기가 작품의 판타지한 세계관을 제대로 드러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동기는 정말 산으로 가버렸다는 의견이 다분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믿고 안 믿고, 설득 당하고 말고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그를 믿은 작자들이 그들 나름의 논리로 이런 일을 벌였다, 이런 것이라면 추리소설로 성립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나 싶은데 이 작품이 딱 그런 경우였다. 솔직히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적 세계관이나 그에서 비롯된 동기들은 하나도 이해 안 가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나름의 논리성을 구축하고 있어서 지나친 반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러가지 걸리는 점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점도 크게 돋보여 도무지 나쁘게 읽히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한 가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최대 문제는 판타지한 요소가 아닌 '스승님'이란 존재를 너무 우상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판타지를 사용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대신 '스승님'이란 존재를 믿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 이 작품의 관건이었는데 이때 '스승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건 많이 아쉬웠다. '스승님을 만나 보면 안다'라는 문장이 자주 나오는데 정작 스승님을 만나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런 엄청난 사태를 저지른 납치범들을 크게 꾸짖지 않는 스승님은 흔히 말하는 캐릭터 붕괴가 아닌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작가 나름대로는 설득력있게 스승님의 매력을 그리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밀실살인의 동기나 납치의 동기, 마지막에 터지는 사건의 동기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근거는 갖추고 있어서 '참 특이한 동기도 다 있구나' 하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동기의 근원인 스승님의 존재가 너무 초월적이어서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탐정 캐릭터를 그렇게 잘 만든 것에 반해 스승님은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움만 남는다.


 그래도 이것만 제외하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던 추리소설이었다. 이색적인데 그 안에서 추리 과정은 꽤나 본격적인 것 등 하나같이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작가에 대한 흥미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다시금 관심이 간다.

요즘 세상에 야심 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처럼 골치 아픈 존재는 없을 거야. - 249p




타인의 악의를 견뎌낸다는 건 타인에게 악의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 29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8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7.8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어본다. 옛날에 작가의 단편집을 연달아 읽고 그랬는데 최근엔 국내에 출간되는 작품 수도 줄어들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덩달아 자연스레 관심이 시들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작품과는 확연하게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45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의 장편소설이고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서 풍기던 냉소적인 작풍 대신에 아기자기한 맛이 배가됐다. 흡사 온다 리쿠의 작풍과도 유사한 이 작품은 그 분위기에 취할 수만 있다면 치명적으로 재밌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딘지 김샐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의 도시 하자키라는 작가 멋대로 창조한 세계관에서 다채로운 매력의 캐릭터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안에 넘실거리는 대놓고 본격적인 살인사건도 구미가 당기기에 충분했는데, 왜 이렇게 읽을면 읽을수록 흥미가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른바 잔재미는 출중했다. 타고난 불행아인 주인공 마코토를 비롯해 연애소설 전문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존재나 이젠 좀 케케묵게도 느껴지는 명문가의 유산 상속 싸움에 얽힌 이해 관계나 코믹한 상황들은 적잖이 키득키득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전부 다 들어냈을 때, 과연 크게 볼 만한 요소가 있었나 하면 약간 의문이 든다.

 아, 말이 너무 심했나? 어떻게 보면 이런 잔재미 또한 작품의 개성인데 몰이해한 발언일 수 있겠다. 각각의 잔재미들의 조화로운 배치는 감탄스러웠던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리소설 특유의 사건으로서의 흡입력 부분에선 약간 달리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글쎄, 내가 너무 삐딱하게 작가의 생소한 모습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기대를 했는데 그에 부합하지 못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 좀 아쉽기도 했다. 언젠가 말한 적 있지만 나는 모든 책을 재밌게 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투자한 시간 대비 만족감은 꼭 얻고 싶은데... 그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순전히 작품 때문이라고 말은 않겠다. 여담이지만 내가 문제인 경우가 허다하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너스에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
권하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6





 아직 살면서 동성애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나는 왜 이렇게 동성애자에게 관대한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고 자신한다. 막상 동성끼리 애정행각을 벌이는 영화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눈과 귀를 어디에 둘지 몰라 곤혹스러워하지만 이건 생리적인 거부감일 뿐 철학적으로는 늘상 지지한다.

 아무래도 이건 네이버 웹툰 중 명작이라 손꼽히는 <어서오세요, 305호에!>의 덕이 클 것이다. 평범한 주인공이 하필 게이랑 동거하면서 겪게 되는 요지경을 지극히 평범한 시선으로 보여준 그 작품은 처음엔 덮어놓고 혐오감을 품었던 주인공이 게이와 진정한 베스트 프랜드가 되면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독자였던 나는 주인공과 같이 여러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동성애자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오늘 본 <로렐>이란 영화(개봉하자마자 봄)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왔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동성애를 비롯해 성소수자를 주제로 다룬 영화(<아가씨>는 논외다)를 보면 일맥상통한 주제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 혹은 주인공의 주변인이 동성애자로 나와 세상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필하게 되는 사건을 겪고 그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줄기를 갖고 있다. 그들의 정체성이란 내가 봤을 때는 이렇다. 동성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뿐이다. 우리는 평범하다. 벌써 세 번째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더 말해야겠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진짜 평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 얘기는 <로렐> 후기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 작품도 여느 동성애 작품처럼 동성애자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이를 부정하고자, 숨기고자 여자친구를 사귀지만 번번이 그들로부터 도망친다. 자신의 불순한 교제 동기에 비해 너무나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그녀들의 진심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고자 남자에게 대쉬한다. 하지만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방식으로 인생은 파탄길에 오르고 마는, 적어도 오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홍석천 씨다. 활발히 활동하는 방송인이고 특출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이며 성공한 외식업자이기도 해서?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되지만, 알다시피 그가 게이임에도 이런 외적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그를 너무나도 존경한다. 최초이자 아직까지도 유일한 커밍아웃 연예인인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편견에 시달려본 사람인데 나는 동성애자가 아님에도 그의 현재 모습이 멋있는데 동성애자들에게는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처음엔 홍석천 씨도 동성애자 사이에서 치부의 대상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마 한국 동성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장식될 위인이 아닐지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김조광수 감독도 그런 의미에서 그 자신의 행보의 성과를 꼭 거두었으면 좋겠다. 제발.


 이 책은 모든 동성애자가 후에 홍석천 씨처럼 세상에 녹아들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 비법이 녹아있는 성장 소설이다. 수많은 사람을 놓고 하필 홍석천 씨를 언급했냐면 그가 동성애자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그리고 내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 여겨서다. 어쨌든 주인공이 학교에서 자퇴하고 정상적인 학생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진 마당에 찾아야 하는 자아는 일반 청소년들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처지인 동성애자 친구들 또한 찾아야 하는 것이라서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으리라 생각된다.

 대신에, 이건 흥을 깨는 말일 수도 있지만 작가의 <발이 닿지 않는 아이>를 기대하고 읽은 나로선 주제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지만 실상은 평범해서 실망이었던 작품이었다. 초반부는 흥미진진한 걸 넘어 머리칼이 쭈뼛 설 만큼 소름 끼쳤던 것에 비해 중반부부터는 교과서적인 성장 소설이라서 괜히 김샜다. <발이 닿지 않는 아이>는 진짜 걸작이었는데......

네, 정말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과 대학을 가고 싶다는 것은 개와 고양이만큼이나 다른 것 같아요. - 37p




내가 물소 떼 속의 물소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나를 몹시 착잡하게 한 거지. 하아....... 나는 그냥 나면 안 되는 건가? - 42~43p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본모습은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야. 자연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거든. 단지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은 수치스러워해야 해. 자신을 인정할 수 없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야. - 46p




잘못 없는 인생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끔찍하지 않니? - 201p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듯 내 삶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 25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어공주 - 탐정 그림의 수기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7





 이렇게 동화를 원작으로 둔 소설은 사실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흑소소설>에서 '신데렐라 백야행'이라는 단편을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백야행>의 성격을 고스란히 <신데렐라>의 무대와 등장인물에게 옮긴 패러디 소설이었다. 통쾌하리만치 섬뜩했는데 어쨌든 재밌게 읽어서 이 작품도 내심 궁금하면서도 걱정됐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국내에 유일하게 출간된 <클락성 살인사건>의 평이 그닥 좋지 않아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잘 몰라도 읽는데 지장이 없는 게 우선 참 마음에 들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긴 했지만 그 애니메이션이 원작과 달리 해피 엔딩을 그린 것이 논란이 됐던 만큼 원작에 대한 이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못한 채 넘어간 동화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인어공주>는 그 동화의 후속의 이야기로서 진행되는 만큼 패러디니 오마주니의 문제가 없이 별개의 전개가 펼쳐져서 상당히 볼 만했다.


 목소리를 잃으면서까지 인간이 되어 왕자의 곁에 있으려던 인어공주였지만 그마저도 왕자가 타국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실연을 당하게 되고 결국 인어공주가 바다의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이틀 뒤에 왕자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왕실 사람들은 타이밍 좋게 행방이 묘연해진 인어공주를 의심하게 되는데...

 동화를 배경으로 대놓고 판타지를 차용하는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슴 떨리는 도입부로 시작된다. 안데르센이 화자(왓슨역)로, 그림 형제는 탐정으로 활약하고 인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등 해봄직하면서도 시도하기 힘든 설정을 아낌없이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서민에서부터 왕궁까지의 묘사도 부족함이 없이 생생해서 상상을 마구 자극시키는데 일견 작위적이긴 했어도 동화 속, 실화 속 존재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는 진풍경은 독자들이 이 독특한 추리극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게끔 하는데 일조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수작을 만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불안했던 짧은 분량이 결국 발목을 붙잡아 안타까운 결말을 내고야 말았다. 비슷한 작품으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판타지 추리소설 <부러진 용골>이 떠오른다. 그 작품도 분량이 짧은, 엄밀히 말해 53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음에도 급결말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작품은 390페이지밖에 안 되니 어떻게 보면 예견된 미래였는지 모르겠다. 17세기 덴마크의 낯선 정경과 분위기, 인어의 세계, 각종 마법에 대한 풀이를 더 세밀하게 해냈더라면 500페이지는 기본으로 넘었어야 했는데...

 엉뚱한 탐정인 루트비히(그림 형제)나 사명감을 띄고 동생의 누명을 벗기려고 인간이 된 인어 셀레나 등 인상 깊은 캐릭터가 좀 있었지만 정작 화자이자 주인공인 안데르센이 그 존재감이 흐릿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동화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작품이니 등장시킨 것 같은데 학교 가기 싫어하고 환상의 모험을 동경한 소년이란 여러 설정은 좋았으나 이번 추리극 안에서의 실질적인 역할은 미미했었다. 안데르센이라는 한 소년의 성장과 모험담에 주목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원작자인 안데르센이 '보릿자루'의 성격이 강해서 개인적으로 많이 아쉬웠다.


 '물리의 기타야마'라는 별명답게 범인을 특정 짓는 트릭은 기발했지만 기껏 동화나 인어라는 설정을 가지고 왔으면서 그와 따로 노는 트릭을 선보인 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고 그 범인의 정체나 범인을 지목하는 탐정의 추리 부분도 논리적이긴 하나 복선 회수가 부족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어의 세계관을 너무 난잡하게 설정한 나머지 괜히 몇 차례 복잡하게 꼬아져서 에필로그 읽을 때는 정말 피곤했다. 뜬끔없이 '역사 속 그 인물'이 등장한 것도 옥의 티였던 것만 같다.

 초, 중반부가 가슴 벅차게 만드는 요소로 가득했지만 막판의 정리가 미흡해서 속 어딘가가 얹혀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작가에 대해 흥미는 가지만... <클락성 살인사건>도 비슷한가? 아, 그 전에 동화 <인어공주>부터 읽어야지.

세상의 규칙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더욱 엄격히 속박당하게 돼. 진심이 아니어도 되니까 순종하는 척하렴. - 20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