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 탐정 그림의 수기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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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렇게 동화를 원작으로 둔 소설은 사실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흑소소설>에서 '신데렐라 백야행'이라는 단편을 읽었었는데 이 작품은 <백야행>의 성격을 고스란히 <신데렐라>의 무대와 등장인물에게 옮긴 패러디 소설이었다. 통쾌하리만치 섬뜩했는데 어쨌든 재밌게 읽어서 이 작품도 내심 궁금하면서도 걱정됐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국내에 유일하게 출간된 <클락성 살인사건>의 평이 그닥 좋지 않아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잘 몰라도 읽는데 지장이 없는 게 우선 참 마음에 들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긴 했지만 그 애니메이션이 원작과 달리 해피 엔딩을 그린 것이 논란이 됐던 만큼 원작에 대한 이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못한 채 넘어간 동화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인어공주>는 그 동화의 후속의 이야기로서 진행되는 만큼 패러디니 오마주니의 문제가 없이 별개의 전개가 펼쳐져서 상당히 볼 만했다.


 목소리를 잃으면서까지 인간이 되어 왕자의 곁에 있으려던 인어공주였지만 그마저도 왕자가 타국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실연을 당하게 되고 결국 인어공주가 바다의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이틀 뒤에 왕자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왕실 사람들은 타이밍 좋게 행방이 묘연해진 인어공주를 의심하게 되는데...

 동화를 배경으로 대놓고 판타지를 차용하는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슴 떨리는 도입부로 시작된다. 안데르센이 화자(왓슨역)로, 그림 형제는 탐정으로 활약하고 인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등 해봄직하면서도 시도하기 힘든 설정을 아낌없이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서민에서부터 왕궁까지의 묘사도 부족함이 없이 생생해서 상상을 마구 자극시키는데 일견 작위적이긴 했어도 동화 속, 실화 속 존재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는 진풍경은 독자들이 이 독특한 추리극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게끔 하는데 일조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수작을 만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불안했던 짧은 분량이 결국 발목을 붙잡아 안타까운 결말을 내고야 말았다. 비슷한 작품으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판타지 추리소설 <부러진 용골>이 떠오른다. 그 작품도 분량이 짧은, 엄밀히 말해 53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음에도 급결말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작품은 390페이지밖에 안 되니 어떻게 보면 예견된 미래였는지 모르겠다. 17세기 덴마크의 낯선 정경과 분위기, 인어의 세계, 각종 마법에 대한 풀이를 더 세밀하게 해냈더라면 500페이지는 기본으로 넘었어야 했는데...

 엉뚱한 탐정인 루트비히(그림 형제)나 사명감을 띄고 동생의 누명을 벗기려고 인간이 된 인어 셀레나 등 인상 깊은 캐릭터가 좀 있었지만 정작 화자이자 주인공인 안데르센이 그 존재감이 흐릿한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동화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작품이니 등장시킨 것 같은데 학교 가기 싫어하고 환상의 모험을 동경한 소년이란 여러 설정은 좋았으나 이번 추리극 안에서의 실질적인 역할은 미미했었다. 안데르센이라는 한 소년의 성장과 모험담에 주목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원작자인 안데르센이 '보릿자루'의 성격이 강해서 개인적으로 많이 아쉬웠다.


 '물리의 기타야마'라는 별명답게 범인을 특정 짓는 트릭은 기발했지만 기껏 동화나 인어라는 설정을 가지고 왔으면서 그와 따로 노는 트릭을 선보인 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고 그 범인의 정체나 범인을 지목하는 탐정의 추리 부분도 논리적이긴 하나 복선 회수가 부족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어의 세계관을 너무 난잡하게 설정한 나머지 괜히 몇 차례 복잡하게 꼬아져서 에필로그 읽을 때는 정말 피곤했다. 뜬끔없이 '역사 속 그 인물'이 등장한 것도 옥의 티였던 것만 같다.

 초, 중반부가 가슴 벅차게 만드는 요소로 가득했지만 막판의 정리가 미흡해서 속 어딘가가 얹혀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작가에 대해 흥미는 가지만... <클락성 살인사건>도 비슷한가? 아, 그 전에 동화 <인어공주>부터 읽어야지.

세상의 규칙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더욱 엄격히 속박당하게 돼. 진심이 아니어도 되니까 순종하는 척하렴. -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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