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집사의 일상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42
무라카미 리코 지음, 기미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침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남아 있는 나날>을 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피상적인 개념들을 영화에 등장하는 탁월한 집사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앤소니 홉킨스가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아마 구시대 집사(butler)들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 출신 무라카미 리코라는 양반은 왜 영국 집사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 그리고 보니 전작은 영국 메이드에 관한 책이었지. 메이드에 관한 책은 아직 만나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외국인이 집사 그 중에서도 여왕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 집사들의 기원과 활약상을 탁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귀족들을 시중하는 집사 업무의 기원은 중세 시대 와인이나 맥주를 취급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축적을 하고, 토지대여로 막대한 불로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임대 수입을 올리는 귀족들을 시중하는 사용인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집사하면 보통의 경우 고용인들을 시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좀 더 전문적인 가사관리인들의 경우에는 가사관리는 기본이고 장원을 운영하는 회계까지도 책임졌다고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런 복잡다단한 이야기들보다는 아무래도 집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해프닝이나 에피소드에 더 눈길이 갔다.

 


집사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뻑뻑하다는 느낌을 다수의 수록된 주로 <펀치>라는 잡지에서 인용한 일러스트들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있다. 가사의 총책임을 맡는 집사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풋맨, 홀 보이와 요리사 그리고 여자 메이드들까지 지휘해서 가사를 꾸려 가는 집사들의 임무는 어떻게 보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그것에 견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용인들은 늘씬하고 잘생긴 집사를 선호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제복을 입혀, 세련된 풍모로 대저택에서 매일 같이 열리는 파티에 초대한 손님들을 응대했다.

 

집사들을 식구처럼 대한 깨인 귀족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고용인과 사용인의 입장이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연결하는 핵심은 자본주의 시대의 총아인 보수였다. 놀라운 건, 가사의 총책임을 맡은 집사보다 보통 요리사의 보수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하긴 프랑스 요리나 러시아 요리 같이 파티 손님들을 대접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요리사들이 드물었을 테니 당연했던 게 아닐까. 19세기 힘든 노동을 하던 타 직종의 노동자들보다 집사들은 상대적으로 덜 피로한 직장이 아니었을까. 기본적으로 숙식이 제공되었고, 화려한 파티에 초대된 부유계층들은 그들에게 후한 팁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명한 집사들은 자신의 연봉에 9배나 되는 900파운드에 가까운 돈을 벌기도 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집사의 임무는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수많은 부하들에게 규율을 지킬 것을 요구해야 했고, 아무래도 상부에서 지휘를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알코올을 대할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알코올 중도에 빠지는 집사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한다. 도박 문제 때문에 빚을 지거나 주인집의 귀중품을 슬쩍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한다. 젊은 멋쟁이 풋맨들과 메이드 간의 염문도 집사가 엄중하게 다스려야 하는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였다. 독신 집사가 대개 환영받았는데, 아무래도 처자식이 달리다 보면 주인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었다나. 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사용인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는 고용인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 학대와 모욕을 견디지 못한 사용인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격분한 사용인이 주인을 살해하고 결국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가짜 집사로 살인 행각을 벌인 싸이코패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아무래도 귀족이나 부유층의 호화행각을 늘 곁에서 지켜보니 어쩔 수 없이 사용인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남아 있는 나날>에서도 주인의 고급차를 타고 여행하느 스티븐스를 시골 사람들은 신사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눈밝은 어느 의사는 단박에 그가 사용인, 집사라는 사실을 짚어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집사들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주는 건 바로 어니스트 킹, 조지 워싱턴, 에릭 혼, 피터 휘틀리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집사들이 남긴 회고록 혹은 기록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런 기록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회고에 의한 기록이다 보니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는 생각이 든다. 그걸 바탕으로 해서 자국의 역사도 아닌 타국의 시대상을 읽기 위해 엄청난 자료를 뒤져서 이런 멋진 이야기를 창조해낸 일본 출신 자유기고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