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시작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민음사에서 발간 중인 모던클래식 책들을 훑어 봤다. 어쨌거나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에 가장 혜택을 본 게 민음사가 아니었을까. 지난 2년 동안 모던클래식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사살하고 싶다. 컬렉션에는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작가들이 제법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존 맥그리거다. 그동안 출간한 네 권의 책 중에서 세 권이 출간되었는데 속속 절판되어서 헌책방을 이용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들조차도> 말고 나머지 두 권을 지난 주말에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나의 선택은 <너무나 많은 시작>.

 

장시간 햇볕에 노출되어 빛바랜 책처럼 고색창연한 스토리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일랜드 도네걸 출신 십대처녀 메리 프리엘이 런던으로 일하러 왔다가 불의의 임신을 하게 되고 아기를 출산한다. 그리고 아기를 어딘가에 떠맡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잘 지냈다는 서두가 등장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 아기가 도대체 누군인가에 초점이 맞춰지겠지.

 

다음 장면에서는 소설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간호사 줄리아 아줌마와 도로시 카터가 어떻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기 전에 무도회장에서 윌리엄 피어슨 소령을 만나 인내심 없이 결혼에 골인하게 된 줄리아 아줌마는 자신의 임신에 대한 남편의 답장과 전사통지서를 동시에 받는다. 그 줄리아 아줌마네 집에서 둥지를 틀고 살던 카터 집안은 코번트리로 이사한다. 소설의 주인공 데이비드 카터의 아버지는 해군 출신의 강인한 남자로 아내 도로시와 함께 수전과 데이비드를 기르면서 평범한 나날을 살아왔다.

 

열두 살 때 꿈이었던 모든 것을 소장한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된 데이비드는 애버딘 출장길에 우연히 만난 엘리너 캠벨과 편지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 전에 알츠하이머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줄리아 아줌마로부터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전해 듣게 된다. 그러니까 데이비드가 바로 아일랜드 처녀 메리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시간의 밀도에 집착하는 남자 데이비드는 말한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그리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흩어진 기억의 파편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추적을 시작한다.

 

소설의 한 축에 자신이 누구인가 찾아 헤매는 남자 데이비드 카터가 있다면, 데이비드의 반쪽으로 등장하는 엘리너 캠벨 역시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엄마 아이비의 학대를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입학 허가를 받는데 성공하지만, 데이비드와 결혼하게 되면서 자아를 잃게 되는 과정이 처연하게 그려진다. 캠벨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졸업장을 받을 기회를 받고, 언니 테서처럼 거침없이 집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곳에서 출발은 상상 속의 그것과 너무 달랐다. 결국 데이비드와 엘리너의 결혼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엘리너의 우울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동료 애너와 바람피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데이비드는 애너 남편의 어이없는 폭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런 뒤에 박물관장 승진에서 누락되고, 결국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마는 데이비드. 12살 때부터 꿈이었던 자신만의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이제 십대가 된 반항기 넘치는 딸 케이트로부터 직장을 구하지 않느냐는 타박을 받기도 한다. 존 맥그리거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어그러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데이비드와 엘리너 사이의 결혼을 그려내고 있다. 뭐 보통의 평범한 삶들이 다 그렇게 가는 거지. 과연 데이비드는 친엄마 메리를 찾는 데 성공할까?

 

개인적으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데이비드가 자신을 길러준 엄마 도로시 카터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3자이다 보니,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순수한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생모를 찾는 그렇게 중요할까?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준 엄마 도로시의 공로는 왜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걸까? 물론 많은 시간이 지나 중년이 되어서야 젊은 날의 과거를 후회하는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그런 장면들이 아니었던가. 고리타분하다고 할진 몰라도, 부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소설의 1/3 지점을 통과하면서 <너무나 많은 시작>에 애착이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존재 찾기에 나서는 한 남자의 사랑과 결혼을 그린 이야기에서 출발한 존 맥그리거의 소설 <너무나 많은 시작>은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그리고 탈선할 뻔한 삶의 궤도를 바로 잡아가는 그런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하도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접하다 보니 이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은 마치 조미료가 빠진 그런 집밥 같은 맛이 난다고나 할까. 존 맥그리거의 다른 책도 순차적으로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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