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8년 만이다. 자그마치 8년 만에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다시 읽었다. 빌리 필그림, 엘리엇 로즈워터 그리고 킬고어 트라우트까지. 이후에도 보니것 작품들에 등장하게 될 익숙한 이름들이 줄 지어 등장할 때,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뒤늦게 보니것 바람이 분 모양이다. 그의 미발표 유작도 곧 도착할 예정이니 보니것 풍년이 아닐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은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몇몇 장르소설을 발표하면서 인지도를 쌓아 왔지만, 요즘은 한국 드라마에서조차 클리셰이가 된 시공을 오가는 타임슬립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뉴욕주 일리엄 출신 검안사이자, 분명 자신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빌리 필그림이라는 전쟁터에서 정말 어릿광대 뺨치는 ‘소년병사’의 좌충우돌 체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걸작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커트 보니것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반전 메시지다. 이미 13세기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시작되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뿌리 깊은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십자군 원정에도 등장한 어린이 십자군이 현대에도 모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단적 나치 파시즘을 박멸하는 정의로운 전쟁에 동원된 미국 젊은이들의 현실은 우스꽝스러운 토가를 걸침 빌리 필그림의 이미지로 정확하게 치환된다.


군종병으로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에서 전쟁에 숙련된 독일군 베테랑에게 포로가 된 일단의 미군들은 독일 영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 이상의 끔찍한 희생자를 낸 1945년 2월 13일에서부터 15일까지 3일간 계속된 공중폭격으로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과연 이 폭격이 의미가 있었을까? 자크 파월은 800여대의 폭격기가 동원된 드레스덴 대폭격의 진정한 목적은 동쪽으로 베를린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해 오고 있던 스탈린의 적군에 대한 미영의 강력한 무력 시위였다고 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20만명에서 25만명의 희생자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격이자 ‘인간 도살’이었다고 그는 규정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수용되었던 <제5도살장>은 단순하게 드레스덴 폭격만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육체파 여배우 몬태나 와일드핵과 함께 가공의 행성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수용되어 손에 눈이 달린 외계인들의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오가는 시간여행 그리고 못생긴 아내 발렌시아와의 결혼생활, 아내가 죽은 뒤 외계인과의 접촉사실을 사방에 알리다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1968년 현재의 모습 등이 뒤죽박죽으로 전개된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드레스덴 시절 전우를 찾아가는 장면 등 그야말로 백화점 같은 이야기를 죽 전시하는 가운데, 진짜로 전쟁을 체험한 베테랑 병사의 강력한 메시지를 훗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블랙유머로 잘 포장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솜씨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과거 전우의 아내가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녀와 반전을 공감대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던가.


무기를 팔아먹는 군산복합체 말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됐다. 애국심에 호소해서 전쟁을 부추기는 정치인,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며 본질을 왜곡하는 전쟁상인 그리고 이미 전쟁을 겪은 세대의 선동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한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현실에서 벗어난 선전선동이 트랄파마도어 행성과 지구별을 오가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는 빌리 필그림의 허무맹랑한 주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빌리 필그림이 열렬하게 추종하는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에 대한 빌리의 딸이 가진 적개심은 보니것 특유의 블랙유머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거의 어릿광대 같은 모습을 한 미군 전쟁포로 빌리 필그림에게 독일군이 던진 한 마디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냐고. 피와 살이 튀는 그야말로 끔찍한 전쟁을 빌리 필그림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병사들이 수행했다는 것이야말로 희비극이 교차하는 전쟁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다수의 미군 포로들을 호송하는 독일 병사들 역시 어린이 십자군과 퇴역한 노병이 아니었던가. 엄청난 물자가 약탈당한 전시에 고작 드레스덴 폭격 후에 교사 출신 노병 에드가 더비가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장면도 어처구니가 없긴 마찬가지다.


보니것의 전작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이자 이번에는 카메오로 출연한 하워드 W. 캠벨 2세에 대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의 부역자 캠벨 씨(사실은 이중스파이)가 미군 포로들의 행태에 대한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을 한 번 살펴보자.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파괴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가난뱅이들이며 포로로 잡힌 병사들에게서는 어떤 연대나 형제애도 기대할 수 없노라는 냉소 섞인 분석을 시도한다. 한 다미로 말해 ‘인간다운 존엄성을 상실한 대량의 빈곤층’이란다. 저자가 구사하는 씁쓸한 진실에 입맛이 쓰다. 너무나 리얼해서 트랄파마도어 외계인도 믿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시간여행, 지구별과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을 오가는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설정과 어릿광대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을 통해 커트 보니것은 전쟁국가 미국의 실체를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의 진짜 목적은 독일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세계화 그리고 미국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였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 와중에 작가가 직접 체험한 드레스덴 폭격은 미영의 동유럽을 집어 삼키려는 스탈린에 대한 냉혹한 경고장이었고,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도살된 것이다. <제5도살장>이 발표된 즈음, 미국은 아픈 상처로 기억될 베트남 전쟁의 진창 속으로 뛰어 들고 있는 중이었다. 21세기에도 전쟁국가 미국은 여전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포의 일상화 그리고 ‘상상된 위험’으로 수지맞는 장사가 성업 중이다. 미국 문단의 이단아 혹은 현자 커트 보니것이 다룬 전쟁에 대한 우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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