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말 정말 오랜 만에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다시 읽었다. 만화로 미국의 저명한 문학상인 퓰리처상 수상을 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예술성은 담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의 편린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 보니 나치의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비애에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아트 슈피겔만의 그래픽노블 <쥐>는 두 가지 이야기를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작가의 아버지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던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냐 질버베르크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고 게토에 거주하며 쫓기던 가운데 결국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끌려 갔다가 살아남게 되는 이야기 하나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남은 아버지 블라덱이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아우슈비츠 시절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 자신과의 불화를 그린 이야기 둘.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자란 아트 슈피겔만의 눈에 반평생을 외국에서 보낸 아버지 블라덱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우슈비츠의 후유증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작가의 어머니 아냐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아버지 블라덱은 같은 수용소 출신 말라와 결혼했지만 인색한 유대인 구두쇠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보여준다. 후반에 블라덱이 보여주는 흑인에 대한 지독한 인종차별은 나치의 인종차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모습은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그래픽노블에 담은 이미지들이 반유대주의를 부상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포스트홀로코스트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자신이 구입한 식료품을 상점에 가서 반납하겠다고 고집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에 넌더리를 내기도 하고, 가스를 켜기 위한 성냥을 아끼기 위해 호텔에서 제공하는 종이성냥을 슬쩍하기도 하고 집세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루종일 가스를 켜둔다는 말에서는 정말 질려 버렸다. 하지만 블라덱이 보여주는 이 모든 근검절약 정신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아우슈비츠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못할 바도 아니었다. 블라덱 슈피겔만 역시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다고 진술한 블라덱 슈피겔만은 젊은 시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호남자였다고 한다. 진지한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던 그에게 직물공장으로 백만장자였던 질버베르크 집안의 아냐야말로 이상적인 배우자였다. 처갓집의 후원 덕분에 잘 나가던 블라덱은 첫아들 리슈를 낳고 그야말로 꿈같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웃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이래 점증하던 유대인 박해는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이 폴란드가 침공해서 제국령과 보호령으로 나누면서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현실이 되었다. 폴란드군으로 징집되어 전투에 나섰지만 전쟁포로가 되어 집으로 무사히 귀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가혹했다.

 

전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겠다는 나치 독일의 최종해결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비록 유대인으로 박해를 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블라덱 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차례로 가스실로 실려 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교묘하게 위장된 벙커와 가지고 있던 금품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수차례나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1944년 마지막으로 헝가리로 탈출하려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블라덱과 아냐는 한 번 들어가면 굴뚝으로만 나올 수 있다던 아우슈비츠, 폴란드 이름으로는 오시비엥침으로 끌려 간다. 역시 수용소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그의 저서에서 알려 주었듯이, 젊은 블라덱이 가지고 있던 건강과 기지 그리고 언어능력은 그가 수용소에서 살아남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비하면 허약하고 의지도 부족했던 아냐가 리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기적이었다.

 

블라덱은 수용소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운을 총동원했다. 아첨을 해야 할 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아첨을 했고, 말단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카포에게도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빌미로 호감을 얻은 정보로 가스실로 향하는 선별작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직물상인으로 함석장이나 제화공 기술은 하나도 모르면서, 남보다 기술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블라덱은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상인으로 풍족해진 다음에도, 땅에 떨어진 전선 조각 하나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은 모두 소비해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절약정신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른들은 모두 자면서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다고 했던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아우슈비츠가 무사하게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이 다시 독일내로 수용되었다는 점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사리 살아남았지만 또 그 와중에 어이 없이 죽어 갔다는 점도 다시 알게 됐다. 도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마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픽노블 <쥐>는 블라덱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 남아 사랑하는 아냐와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슈피겔만 작가는 아버지의 기억을 토대로 해서 자신만의 그래픽노블을 완성시켰다. 나치에게 핍박당하는 유대인은 쥐로, 유대인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는 고양이로, 폴란드 사람들은 돼지로(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인들은 개로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개구리로 묘사했다. 개인위생과 청결을 중시하는 그들의 눈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나치는 인류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을 쥐에 비유했다. 전쟁 전에는 그렇게 친절하던 폴란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나치에 쫓기는 존재가 되자, 박정하게 대하는 장면도 그렇고 전쟁이 끝난 뒤에 자신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찾아온 유대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어렵사리 회복한 자신들의 땅인 팔레스타인에서 악착같이 정착촌을 세우고, 다수의 아랍민족에게 포위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점은 이해하면서도 과연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한지 다시 묻게 된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만큼이나 아들 아티와의 지난한 갈등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1970년대 뉴욕 퀸즈 레고 파크에 거주하는 블라덱은 자신의 기준에서 보기에 제멋대로인 아들 아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보다 실용적인 직업 대신 만화가의 길을 걷는 아들 아티를 그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래픽노블의 시작에서 등장한 친구에 대한 개념에 대해 아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하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간극만큼이나 어쩌면 홀로코스트는 우리에게 실제 경험자들과 거리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들 아티 역시 홀로코스트의 악몽으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뇌리에 각인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체험의 기억을 아티의 말처럼 없었던 것으로 하기도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세대 간의 간극이야말로 갈등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유서 한 장 없는 어머니의 죽음도 역시나 아트 슈피겔만에게 트라우마였으리라.

 

아마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친구의 추천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만나게 됐다. 클래식은 시공을 초월해서 읽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지난 주말에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과 다시 만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지금 다시 읽게 된 커트 보네거트(보니것보다 보네거트가 왜 더 마음에 드는걸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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