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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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다, 한 때 커트 보니것의 팬이라고 자처하면서 책을 사 모았던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책을 안 읽을 거야 아마라고 생각하고 다 처분해 버렸으니. 더 이상 그의 책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오판했던 걸까? 이번에 <제5도살장>이 새단장을 하고 나오기 시작하면서 절판된 보니것 작가의 다른 책들도 계속해서 출간될 거라는 소식에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니 그럼 다시 그의 책을 사서 모아야 한단 말인가? 웃기는 건 아직도 샀지만 읽지 않은 그의 책 <타임웨이크>와 <갈라파고스>가 책장에서 다소곳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더 나이트>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는 보니것의 대학졸업식 연설문과 다양한 연설들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부담 없이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그의 연설을 추적하다 보니, 이 양반 삶의 굴곡이 참 많았구나 싶더라. 우선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대폭격의 와중에 살아 남았고, 전후에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예일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수학했지만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원하는 교사직을 얻지 못했다고. 그리고 제네럴일렉트릭 같은 대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일찍 세상을 타계한 누이의 자식들을 맡아 기르기도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그가 체험한 모든 일들이 바로 그에게는 좋은 글쓰기 소재감이었고, 자못 딱딱해지기 쉬운 졸업식 연설장에서 유머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약 중독에 빠지기도 했던 아들 이야기도 등장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대학 과정이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성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한다면, 보니것의 주장대로 오랫동안 미뤄온 하나의 사춘기 의식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싶다. 아울러 모든 미국인들이 사춘기 의식을 치러야 한단다. 그들에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방식을 채택하려나. 언뜻 듣기에 엄청 무섭고 끔찍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던데 말이다. 물론 보니것 특유의 냉소와 블랙 유머도 빠지지 않는다. 이미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을 알려면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시간과 절대적 “비용”이 필요하다고 어른들이 규정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보니것 작가 자신은 전쟁을 통해 어른이 되지 않았던가. 요즘 그런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지만, 보니것의 시절에는 누구나 전쟁터에 나가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으로 무장했다는 21세기 한국 청년들이 과연 세계무대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졌는지 말이다.

 

아, 그의 연설문 중에서 절실하게 공감한 것 중의 하나는 아이를 키우기에 지금의 핵가족 시스템이 너무 부실하다는 지적이었다. 예전에 대가족 제도에서 자란 나로서는 주변에 사촌 누이와 형들의 보살핌 속에 혹은 무관심과 다툼 속에 무탈하게 성장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말이겠지만,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절에 돈벌이 나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금처럼 애정을 쏟을 시간과 재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애정결핍 문제로 시달리진 않았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21세기 한국이 물리적 결핍의 시대는 아니지만, 정서적 결핍은 그 시절보다 증폭된 느낌이다. 한 여자에게 한 남자만으로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한 가족만으로 가족 제도를 이끌어 가려다 보니 결혼 제도가 박살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보니것 연사는 목청을 높인다. 내가 직접 결혼생활을 해보니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 점들이다. 그건 마치 결혼식 주례사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 되돌아 보면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인 것이다. 졸업식 축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니것이 커버하는 장르는 참으로 다양하다. 음악에서부터 시작해서, 비록 자신은 무신론자이자 휴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팔복을 비롯한 좋은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내가 타인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도 그렇게 대접하라고 주문한다. 공화당 강령과 똑같지는 않다고 주의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 센스란. 오직 미치광이만이 반장 선거에 나가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은 또 어떤가. 우회적으로 당대 대통령을 풍자하는 보니것의 실력은 발군하다. 우리가 빠져들 수 없는 탐닉에 대한 경고에서도, 코카인이나 LSD 마약이나 보다 훨씬 강력한 화석연료 중독을 으뜸으로 친다. 하긴 화석연료 중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현대 미국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레에게도 피해주지 않을 음악 중독이 나은 게 아닌가.

 

새해 다시 만난 보니것의 연설문과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이제 더 이상 지구별에 거주하지 않고,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귀환했을 지도 모를 위대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이 어서 쏟아져 나오길 희망한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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