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작년에 주경철 교수님의 <일요일의 역사가>를 사서, 프리울리 지방의 물레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원작인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글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주경철 교수님의 책은 마저 읽지 못했다. 그러다 올봄에 다시 주 교수님의 책을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이틀만에 완독의 쾌거를 이뤄냈다. 역시나 역사책 읽기는 즐거운 모양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사유에 접속하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해, 역사가 바뀌다>의 시작은 중세 여명의 시기였던 1492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첫 번째 주자는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이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아직까지도 신대륙 발견의 영예는 후발주자이자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에게 주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 콜럼버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유럽인들의 숙원이었던 레콩키스타에 성공한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의 물질적 후원으로 신대륙의 황금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저자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당대에 지식인 사이에서 지구구형설은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신대륙에서 부를 창조하겠다는 세속적 열망 외에도, 컬럼버스는 자기 이름이 유래한 크리스토퍼 성인의 예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세계를 확장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울러 컬럼버스는 독학으로 신대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역시 당시 세계관(이마고 문디:Imago Mundi)으로서는 파격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가 논리대로 움직인다면 재미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인도 대륙을 찾아나선 컬럼버스는 네 차례의 항해에서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는 새로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온갖 영예와 부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성공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특히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다음 꼭지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와 인도의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하던 후발 주자 유럽이 산업혁명이라는 획기적인 생산양식의 도약을 통해 마침내 세계의 패자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기존의 동서양의 정보와 물자의 유통방식은 캐러반, 수레 그리고 배였는데 기존의 두가지 요소가 대륙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후자는 원천적으로 해양적 요소를 담보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영락제는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원정이 가능한 선단을 꾸릴 정도였지만, 정화의 원정 이후 내륙개발에 치중하면서 바다를 저버리게 된다. 저자는 이유를 유럽의 분열과 중국의 통합에서 찾게 되는데 유럽 대륙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한 시기에 분출한 국가민족주의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내부의 힘을 외부로 향하는 중상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 정책이 발호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그 기점을 1820년으로 잡고 있는데, 그후 200년 동안 기술과 자본을 축적한 유럽과 신대륙의 미국이 전 세계 패권을 장악해 왔다고 분석한다.

 

저자가 아무래도 경제학 전공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보니 기존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보다는 경제사적 역사발전의 차원에서 역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유행하는 미시사에 대해서도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다 보니 주석 부분에서 옥의 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일본 전국시대 영주였던 오나 노부나가에 대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아닐까.

 

세 번째 꼭지에서 환경 문제를 결부시킨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인간 중심의 인류세 시기에 인간은 바야흐로 자연을 지배하고 나아가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구 증가에 비해 생산성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지구는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지구의 총생산의 일정 부분을 담당해왔던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1820년 이래 한차례 주춤한 적이 있지만, 중국 경제가 안정되면서 다시금 원래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노라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다음 세기는 팍스 시니카의 시대가 되는지, 현재 싸드 배치 문제로 무역보복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채 새우등이 터지지나 않을지 우려가 앞선다.

 

모리셔스섬의 살지 못하는 새 도도 같은 경우 멸종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개체수가 수입억 마리에 달하던 나그네 비둘기의 멸종 같은 경우는 정말 궁금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이 인간의 난개발로 시시각각 멸종해 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인류도 어쩌면 어이 없이 멸종한 나그네 비둘기의 뒤를 따를 수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지막 주제는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는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내재된 폭력성을 길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령 에티켓을 예로 들어 보자. 지금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중세시대 혹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기간 인류의 폭력성은 순치되었을 뿐 어느 계기를 통해 분출할 수 있는 그런 활화산 같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역사를 20세기 인구로 조정한 대전쟁에 대입해 볼 때 몽골의 세계정복과 중국 안사의 난이 당시 인구대비 더 큰 인명피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엄청난 살상무기를 동원한 섬멸전을 수행하는 현대판 전쟁이 과거의 비해 덜 야만적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간이라는 대상을 물질화시켜서 섬멸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에도 나와 다른 상대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제노사이드라는 형태의 비인간적인 대량학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전쟁이 문명보다는 더 야만에 가깝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건명원에서 행해진 강의를 책으로 엮어서 그런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났다. 게다가 경제사학자의 이야기라 그런진 몰라도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정치사적 차원의 접근보다 흥미로운 주장들도 많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층 더 느낄 수가 있었다. 자, 다음에는 읽다만 <일요일의 역사가>를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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