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
류진운 지음, 김재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놀랍다. 제법 두터운 책이었는데 잡은지 3일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그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반증이리라. 류전윈 작가의 장편소설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청제국을 몰아낸 중화민국 시절로부터 시작해서 중일전쟁, 해방 그리고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르는 장장 60여년에 걸친 격동의 시절을 마촌이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그려낸 작가의 실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시작은 마촌 마을 촌장인 젊은 쑨뎬위엔이 목이 졸려 피살되는 장면이다. 마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주계급 쑨 씨와 리 씨 집안의 알력다툼에서 파생된 살인청부사건이었다. 자고로 비밀이란 없는 법, 조상 대대로 촌장직을 도맡아온 리 씨 집안 리라오시가 배후에서 꾸민 일이었다. 신흥 지주계급의 가장 쑨라오위엔은 성급히 복수에 나서지 않고 분위기를 봐가면서 치밀하게 일을 꾸민다. 그것은 마치 민국 초기 공화주의자 쑨원이 군벌 위안스카이에게 고개를 숙인 형세 같다고나 할까. 공화주의의 물결리 넘쳐 나던 시기, 마촌 마을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백년 동안 공고하게 유지되어 온 기득권 지배질서에 대한 작은 균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득세처럼 다시 촌장이라는 권력을 되찾아온 리라오시는 잠시 방심하기에 이른다. 결국 쑨 씨 집안 양자인 쉬다부이에 의해 차도살인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쑨 씨 집안과 리 씨 집안은 대대로 원수지간이 된다.

 

다음 시절은 태군(일본군)의 입성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기간인 1940년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군을 둥양귀즈(东洋鬼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무력으로 자신들을 겁박하는 그들 앞에서는 태군이라고 정중하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양쪽 집안의 차세대 주자들인 쑨스건은 팔로군 장교로 그리고 리샤오우는 중앙군 장교가 되어 국공합작으로 일본군을 상대한다. 쑨마오단은 일본군에 협력하는 매국노로 등장한다. 알다시피 당시만 하더라도 민국 시절인지라 모든 조건에서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이 천하를 쥐고 있는 형세였다. 하지만 인민의 군대를 표방하는 오합지졸 팔로군이 미래에 중원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카이펑 1고 출신의 쑨스건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국공합작으로 중앙군과 팔로군이 합심해서 일본군에 대항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 외적이 물러가면 서로 적으로 갈라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두 군대는 항일전 중에도 항상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쑨 씨 집안과 리 씨 집안의 불화로 인해 쑨스건과 리샤오우의 사이도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쑨스건이 이끄는 팔로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공을 세워 보겠다는 알량한 계획을 세웠다가 일패도지하고 엄청난 비극을 마촌 마을에 불러온다. 5명의 일본군이 항일 게릴라들에게 살해되자, 일본군 중대장은 현에 주둔 중인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마촌 마을에서 처참한 학살극을 벌인다. 마촌에 드리워진 죽음의 연대기가 시절을 마다하지 않고 반복된다.

 

자 다음은 해방이다. 압도적인 군세의 장제스 중앙군을 물리친 공산당이 마침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국민당 시절에 내노라하고 행세를 하던 지주계급은 공산당 빈농단이 주도하는 토지개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단지 몰락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농들 앞에 이끌려 나와 토지와 가산을 몰수당하고 비판받는 처지가 되었다. 민국 시절만 하더라도 지주 계급 앞에서 벌벌 떨던 이들이 세상이 바뀌어 주인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팔로군 출신 쑨스건을 둔 쑨 씨 집안에서는 다행이었지만, 마촌에서 대대로 지주였던 리 씨 집안의 몰락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나마 자씨가 온건하게 토지개혁을 할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둥베이 지방에서 토지개혁을 경험했던 판씨가 새로운 공작원이 된 후에는 그야말로 가혹한 토지개혁으로 리 씨 집안은 결딴날 상황이 되었다. 결국 마을의 빈농 출신 자오츠웨이와 라이허상의 의기투합해서 지주 리원우의 집안을 콩가루로 만든다. 황무지 다황와에서 국민당이 남긴 못이자 잔적으로 활동하던 리샤오우는 집안의 복수에 나섰다가 공산당 정규군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무대는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지주계급을 척결하고 마을의 지배자가 된 자오츠웨이와 라이허상은 한 때 ‘야초’를 같이 뜯던 혁명동지였지만 마오쩌둥이 부추긴 권력을 타도하라는 허망된 구호에 힘입어 전투대와 조반단을 만들어 불화하기에 이른다. 서로를 주자파니 조반파니 비난하던 사이에 기름장수 리후루까지 가세해서 마을은 3개 파벌로 나뉘어 권력투쟁으로 세월을 보낸다. 그냥 입으로만 하면 좋았을 것을, 서로 상대방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리며 합종연횡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유혈사태로 또 사람이 죽게 된다.

 

류전윈 작가는 네 개의 장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역사를 마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대입해서 풀어낸다.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라는 거대 세력이 중원을 두고 사생결단에 나섰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마촌의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가 다른 책들의 한국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서로 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인간사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작가는 문학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아무래도 해방군 출신 작가다 보니 공산당에 유리한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양심은 과연 혁명이 런민[人民] 혹은 라오바이싱[老百姓]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혁명이 약속했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가 과연 해방 이후 잘 지켜졌는가? 해방 후 공작원 자씨가 진행했던 대로 평화로운 방식의 토지개혁 대신 굳이 판씨의 과격한 방식을 필요했던 걸까? 얼마든지 원만한 방식의 개혁이 가능했지만, 공산당은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고 작가는 증언한다. 오랜 세월 낯을 대하고 살아온 작은 마을에서조차 불화를 조장하고, 하찮은 권력을 위해 사람의 생명까지 바쳐 가면서 투쟁에 나섰는데 국가단위의 권력투쟁은 오죽했을까. 한편, 중앙군 출신으로 총살대에서 죽어간 리샤오우의 말처럼, 공산당이 과거 적대세력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핍박하는데 그들이 반동이라고 부르는 악질분자들이 죽음을 불사한 저항이라는 선택 말고 무엇이 있었을까 싶다.

 

자그마치 세 세대를 여유롭게 오가며, 류전윈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아울러 소설 속에서 한몫하던 이들도 가차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키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장강의 도도한 흐름 앞에 어느 누구도 버틸 재간이 없다는 암시였을까. 이 소설은 전쟁과 내전으로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권력투쟁 가운데 수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죽음을 노란꽃으로 승화시킨 류전윈 작가의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류전윈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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