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중국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파란만장한 인물들의 각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에는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일까. 인물 중심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영웅 위주 특히나 제왕들을 중심으로 한 기존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중국 출신 작가인 사식이라는 양반은 역사 속에 특출난 인물들 중에서도 제왕 혹은 군주에 입각한 역사 이야기를 <황제들의 중국사>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인물은 바로 촉한 망국의 군주 2대 황제 유선이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삼국지 시대 촉한 황제 유황숙 유비의 뒤를 이어 두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른 금수저 인물이다. 당양 장판파 싸움에서 조자룡이 품안에 안고 목숨을 걸고서 구해낸 인물이 바로 아두 유선이다. 선대 황제 유비는 돗자리를 짜서 팔던 인물로 난세에 형주에 기반해서 익주까지 하고, 기원도 불분명한 중산정왕의 후예라는 타이틀로 한황실의 뒤를 잇는다는 그럴싸한 대의명분으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물론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제갈공명이라는 아주아주 특별한 인물의 보필이 중요했던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구제불능 뚝심으로 촉한을 건설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수성에는 실패한 인물 또한 유비였다. 형주와 익주에 기반해서 동오와 협력해서 중원의 조조를 공략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삼분계의 핵심이었건만,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오만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고 유비군의 전략거점이었던 형주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지키는데 실패했다. 그마저도 어느 정치적으로 무마하고 다시 북벌에 나섰으면 좋았겠지만 똥고집장이 소열황제는 동오 복수전에 나섰다가 일패도지하고 그만 백제성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제갈공명만 믿던 2대 황제 유선은 철저하게 내정과 외치를 실력 있는 선수들에게 맡겼다. 제갈공명의 뒤를 이어 장완, 비위 등을 기용해서 수성에 나섰지만 천하의 2/3를 이미 지배하고 있던 조조왕국와 사마씨 정권을 이길 힘은 처음부터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선을 나라를 말아먹은 무능한 군주라고 폄하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에 나선다. 근 40년 동안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이 증명되는 게 아닌가라고 말이다.


다음 주자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다. 우리 조선시대 태종과 비견될 정도로 유능한 실력자이자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군주지만 그 역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형인 태자 이건성과 아우인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대권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공맹의 도인 장자상속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골육상쟁인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치 9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세민은 죽은 형의 가신이었던 위징을 재상으로 발탁해서 이른바 정관의 치를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식 작가는 다시 한 번, 황제 이세민에게 충직한 간언을 마다하지 않는 위징의 모습이 짜고 치는 고스톱, 다시 말해 쇼였다고 분석한다. 자신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대중을 속이기 위해 재상까지 동원한 쇼가 대대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사형수들에 대한 사면 조치 역시 사전에 약속한 기간에 돌아온다면 사면해주겠노라는 선약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후대의 지식인은(구양수였던가 잠시 헷갈린다)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었다. 대중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 지 몰라도, 모두를 속일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왕권이 차차 안정되어 가면서 치세 초반 쇼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본성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했던가. 왕희지 부자의 글씨를 모은 <난정서>를 탈취하는 방법 역시 제왕의 품격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레이황 교수는 제왕에게 현재의 도덕률을 적용시키는 건 무리라고 했었지 아마.


주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후량의 창시자 주온의 모습은 또 어떤가. 사식 작가는 아예 살인마라는 소제목으로 그의 됨됨이를 단박에 정리하고 있다.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 이후 발호하는 지방절도사들을 실제로 통제할 수 없었던 황실의 고민과 동시에 덕치로 도저히 다스릴 없는 상태가 된 군벌시대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원래 황소 반란군 출신의 주온은 형세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끌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서 거꾸로 반란군 토벌에 나선다. 무자비한 처벌과 유력한 가신들과 양자관계를 맺으면서 주온은 마침내 당황실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게 된다. 살인마 황제 주온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사서의 기록 그대로 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작자도 오로지 무력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니 놀랍다.


청대의 옹정제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문자옥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이민족 출신 황제로 다수의 한족(漢族)을 지배하기 위해 만주족의 중원지배를 정당화하고 다른 의견을 사상적으로 탄압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논점은 명나라의 기운이 다했기 때문에 청나라가 천명을 대신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이민족의 정복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서는 역부족이었고,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에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증정 사건을 통해 지식인을 포섭하고 <대의각미록>이란 책을 출간해서 선전에 나섰지만, 결국 자신의 아들이었던 건륭제 시대에 <대의각미록>이 금서로 지정되고 증정 역시 처형되고 만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아들에 의해 자신의 정책이 실패였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청나라 옹정제와 달리 주원장은 다른 이유에서 문자옥을 유발했다. 비천한 농민 혹은 도적 출신으로 홍건적 병졸로부터 시작해서 만인지상의 자리인 황제가 된 주원장에 대해서도 사식 작가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양자강 인근의 남경을 근거로 해서 곽자흥의 부장으로 출발한 주원장은 몽골족의 원나라 조정에 대항하는 한족의 지도자로 추앙받았지만 실제로 원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그다지 두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군벌들이 원나라와 총력전을 벌이는 동안, 내실을 다지고 있다가 두 마리 호랑이가 기운이 빠지자 그 틈을 타서 경쟁 군벌들인 한림아, 장사성과 진우량을 제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나라 정벌에 나섰다.


자신의 비천한 태생 덕분에 지식인 계급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주원장은 문서에 기록된 사소한 실수들을 빌미로 엄청난 문자옥을 일으켰고, 자신과 고락을 같이 하며 개국에 나섰던 공신들 역시 숙청의 피바람 속에 무사할 수가 없었다. 개국공신이었던 서달, 호유용 그리고 남옥 역모 사건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학살극을 벌였다. 이 모든 옥사의 이유를 자신의 태자에게 확고한 황제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이 역시 저자에게는 싸이코패스 킬러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중국 황제들의 역사를 가늠하며 과거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국의 군주로 만대의 비난을 받는 유선도 안락공이라는 이름의 사마 씨의 포로가 되었지만 즐거워 촉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선 제왕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던 황제들의 속살을 엿볼 수가 있었다. 같은 망국의 군주로 죽으면서 남긴 <죄기조>에서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해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명나라 숭정제의 일화에서는 비장미마저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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