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
레이 황 지음, 김한식 외 옮김 / 새물결 / 2004년 9월
평점 :


좋아하는 책은 두 번 사서 두 번 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게 레이 황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 그런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어제부터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을 이번에는 쾌속의 속독 중이다. 시절이 어수선한 탓인진 모르겠지만, 거대한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던 해의 기록을 거시적 차원에서 다룬 저자의 실력이 돋보이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9세에 신종이자 만력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근한 주익균이 명 제국의 일인자가 된 지 15년이 지난 어느날 오조 사건이라는 희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저자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은 사건 하나에서 파란만장한 역사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천여 개에 달하는 현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대제국의 통치는 법률과 시스템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보다 고래의 윤리 도덕에 의한 교화 그리고 제현의 기로와 신사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했다. 무엇보다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문관 집단과의 관계가 중요했을 거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직접 경작하는 시늉을 하며 모든 번잡한 의례들을 소화해 내야했다. 어린 나이에 제국의 일인자가 된 만력제는 스승과 통치를 위한 유능한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런 필요를 내각대학사 원보 장거정과 대반 풍보가 채워졌다.

 

황제가 어린 소년에서 의젓한 청년 황제로 성장해 가는 동안의 집권 초반의 10년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고 무사태평한 시절이었다. 장거정이 발탁한 총병 척계광을 비롯한 일단의 무인들이 동분서주하며 북로남왜를 제압했고, 평소 검약을 주창한 내각대학사의 의도래도 사해의 지배자인 황제조차 마음대로 재정을 집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장거정 자신의 축재와 사치스러운 생활은 예외라는 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장거정은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수신제가에는 좀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관리들에게 박봉을 제공하는 명조의 시스템은 구조적인 관리들의 부정부패의 원인을 제공했다. 장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궁정의 방대한 지출과 2만 명에 달하는 과다한 환관의 숫자 그리고 근위부대의 열악한 근무조건에 대한 지적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는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승상제를 폐지했지만, 내각대학사가 실질적인 황제의 대리인으로 비서실장과 고문으로서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거대한 영토에서 매일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 수많은 상주문을 황제가 일일이 검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후대에 환관은 무지하고 축재만 밝히는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져 있지만, 명조대의 환관은 과거를 통해 입신한 문관 집단 이상의 실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었다. 어려서부터 전문적 교육과 훈련은 받은 환관 중에 병필태감으로 발탁된 유능한 인재들은 방대한 분량의 상주문을 사전에 읽고 요약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동창이라는 비밀경찰/특무기관의 장이었던 대반 풍보와 대학사 장거정이 협력해서 정보를 스크린할 수만 있다면, 어린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에게만 관대한 이상주의자 장거정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면서 그에 반대하는 집단의 저항 역시 점증되기 시작했다. 장거정의 뒤를 이어 제국의 일인자가 된 신시행은 도덕률로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사리사욕도 추구했던 문관 집단의 이중성을 포착하지 못했던 전임자의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고로 타인의 실패는 내 성공의 바탕이지 않은가.

 

자그마치 48년간 제위에 있었던 만력제는 제위 10년차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 아들이었던 주상락이 탄생했고, 그동안 자신을 보필해서 제국을 대리통치했던 장거정이 죽었다. 탄생과 소멸이라는 인생의 순환과정처럼 황제의 스승이자 총신 장거정의 인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전에 부친의 탈상 문제 때문에 반대파들의 극렬한 탄핵으로 홍역을 겪었지만, 소년 황제의 절대적 신임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사후에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겉으로는 검약을 주창하면서 자신만은 예외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행불인치하고 파렴치한 공직자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만고의절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고 황제에게 상주문을 빗발처럼 생산해 내던 전국 지식인들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이미 죽은 내각대학사의 명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장거정의 후임자이자 현실주의자였던 수보 신시행이 분석했던 것처럼 문관 집단의 이중성에 대해 적절한 타협 대신 강공책으로 문관 집단 전부를 적으로 만들어버린 내각대학사의 치명적 실책에 대한 지적이 매섭다.

 

물론 이 정도의 위기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근간이 흔들린다는 건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24세의 나이에 문관 집단의 이중적 모습과 그들의 집요한 권력 투쟁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관 집단이 “폐장입유”라는 이유로 청년 황제가 사랑하는 3황자를 황태자로 삼을 수 없게 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태업/파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근 30년 동안, 황제는 상주문에 대한 주비도 내리지 않고 인사권 행사도 거부했다. 물론 신하들이 무도한 군주를 폐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한 세대에 걸친 태업 정도로는 폐립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점도 저자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문제는 그렇게 허송세월한 시간이 망국으로 치닫는 시계를 가속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책의 절반가량 읽고 나서 책의 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우선 저자는 1587년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만력제를 필두로 한 권력집단의 실상을 해부했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위해 대옥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태조 홍무제와 달리 만력제는 거의 바지사장에 가까운 황제일 따름이었다. 최고 통치자였던 만력제가 사실은 자금성의 죄수였다는 표현은 절묘했다. 장거정과 신시행으로 대변되는 문관 집단이야말로 명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법률과 시스템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사서에 따른 도덕 윤리야말로 제국 최고의 규범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확고한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장입유를 원한 만력제의 집요한 입태자 지연전술도 결국 자신의 뜻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암군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제왕의 도를 배운 총명한 황제는 명나라 군신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방법으로 소극적 저항에 나선 것이었다.

 

다음은 타협을 모르는 보수적 원칙주의자이자 모범관료 해서를 통해 명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농촌 조직을 명철하게 분석했다. 명태조의 건국 이래 2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의 기반은 농촌경제였다. 제국은 인구과잉과 전국적 재정제도, 교통 통신제도의 개선 그리고 박봉에 시달리는 문관들의 인사 및 급여 제도 같이 시급한 제도 개혁이 대두되었지만, 문관 집단의 고질적 이중성 때문에 그 어떤 개혁도 추진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서 같은 소수의 청렴결백한 모범관료들의 분전만으로는 도저히 일상화된 관리들의 부정부패 수입인 상례 같은 악폐들을 현실적으로 척결할 수 없었다. 해서 역시 홍무제 당시의 제도야말로 현상의 문제들을 타파하기 위한 최상의 해결책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명나라 농촌경제를 지탱하는 농민들의 삶이야말로 제국의 영속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돌봐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수탈함으로써 발생할 미래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문관 집단의 비정한 이중성을 저자는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비판한다. 그들은 현상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균형을 가져올 지도 모를 해외무역이나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변혁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레이 황이 주목하는 다음 분야는 척계광으로 대표되는 군사다. 태조 이래 명제국은 문관 위주의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군에 대한 징병과 보급 같이 필수적인 문제도 역시 문관들의 소관이었고, 당말 군권을 가진 절도사의 발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왜구와 오랑캐의 침공이 일상화된 남부의 절강 복건 지역 혹은 북쪽 장성 지방에 강력한 군권을 가진 총병의 등장에 문관 집단들이 경계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수도 북경 부근의 군사령관이 반심을 품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 시대 군조직의 존재이유는 혹시 모를 지방 반란에 대한 진압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외부의 가공할 침략에 대한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대응과 방어가 불가능했다. 북로남왜라는 표현처럼, 소수 무인집단으로 이루어진 남방에 출몰해서 끝없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연례행사처럼 진행된 알탄으로 대표되는 북방 몽골족의 침략에도 조정은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강성 용병들로 구성된 척계광의 척가군은 엄정한 군율과 혹독한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의 실력자 담륜과 장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왜구와 몽골에 대한 상승군의 이미지를 쌓아나갔다. 물론 척계광 개인의 용병술에 대한 뛰어난 실력과 원앙진으로 대표되는 전술훈련이 적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준 것도 사실이다. 척계광은 군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어진 현실 조건 아래서 최선의 방법들을 뽑아내는데 주력했다. 남부 지방 왜구들을 소탕하고, 계주총병이 되어 북방전선의 실질적인 총책임자가 되어 장성의 보루 구축에 전념하던 척계광은 장거정 사후, 실각되어 말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와 장거정이 추진했던 군비 확장책이 성공했다면, 역사의 가정이긴 하지만 만력 연간 말년의 대청작전이었던 사르후 전투에서의 굴욕적인 패전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력 15년>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은 바로 이단아 지식인 이탁오다. 레이 황 저자에 따르면 이천년 전 등장한 유가사상이 진한시대에는 선진적인 관료제도로 새로운 학풍으로 받아 들여졌을 진 몰라도, 특히 명나라 시대에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진단이다. 문관 집단이 가장 중요시하던 현상유지 균형 정책과 농촌경제와 생산력 발전을 가로 막은 상공업의 발전에 대한 무관심, 법률 시스템을 대신해서 황제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사서에 의한 공맹사상의 인의중시는 결국 사회발전에 퇴보를 가져왔고, 나아가 망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모순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관료 출신 철학자 이탁오는 관료로서의 성공 대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선택했다. 주희가 개발한 신유학 이데올로기에도 반대하면서, 유가가 추구하는 도의 완성과 불교 혹은 도가의 그것이 다르지 않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번잡한 의례를 중요시하는 공맹사상과 지식인 관료 계급에 비판적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여생을 보내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모범관료가 해서가 지방관들에게 골칫거리였던 것처럼, 이단적인 주장을 설파하면서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실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이탁오는 결국 노년의 옥중에서 자결로 생을 마무리한다.

 

400쪽 남짓한 레이 황의 <159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를 새해 들어 숨가쁘게 완독했다. 예전에 샀던 책을 7년 만에 다시 한 번 사서 읽는 느낌은 아무래도 남달랐다. 그 시절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리뷰를 썼었는지 궁금해졌다. 이 리뷰를 다 쓰고 나면 한 번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반역의 책> 그리고 명청교체기를 다룬 <룽산으로의 귀환>의 재독, 작년에 읽다 만 <건륭제> 그리고 상당 부분 읽은 하버드중국사 <청제국> 같은 숙제를 마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대가의 저술은 다시 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1587 만력 15년을 기점으로 해서 벌어졌던 다양한 인물들이 엮어낸 역사드라마의 귀결이 사실은 거대제국 명나라가 영속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역사의 터닝포인트일 수도 있었다는 가정은 의미심장하다.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시절을 통과 중인 우리는 미래에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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