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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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아는 지인에게 부탁을 해서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의 영문 번역판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고 도중에 포기해 버렸다. 지난주에 마누엘 푸익의 이 쎅시한 제목을 가진 책이 출간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뻤다. 그래서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정리해 봤고 그가 쓴 8편의 소설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봤더니 <거미여인의 키스>가 전부였다. 그래서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조그만 입술>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 역시나 매혹적이었다. 한 때 할리우드 키즈로 영화감독을 꿈꾸던 작가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오늘 지난 주말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에 몰입했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에도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유한 노인네 라미레스 씨와 그를 간호하는 36세의 남자 래리(로런스 존)가 주연을 맡았다. 작가가 사랑한 영화처럼 수많은 다이얼로그로 이루어진 소설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 느릿한 속도로 전개된다. 어쩌면 이 소설도 연극 무대에 올리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작품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본 푸익은 비록 자신의 꿈처럼 영화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은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 영화기법을 담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이뤘다. 뉴요커답게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인 요양사 래리는 대화를 통해 무시로 자신의 개인영역에 침입하려는 라미레스와 충돌한다. 하지만 수년간의 실업자 생활 때문에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래리는 라미레스의 휠체어를 밀어 주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수다를 떠는 손쉬운 돈벌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고,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두 개인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푸익은 허위와 진실이 교차하는 래리와 라미레스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주인공들의 면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과연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시대적 배경은 1978년, 라미레스의 고국 아르헨티나에서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가혹한 군부통치가 진행 중이었고 투옥과 연이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라미레스는 부유한 형의 후원으로 석방된 뒤 뉴욕에서 고문 후유증을 치료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는 군부의 폭탄 테러로 모두 죽었다. 아니 그런 것으로 보인다.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라미레스의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두 주인공들의 대화는 종교와 권력, 연애, 사랑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른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라미레스가 래리가 들려주는 대화의 디테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대체 무슨 피자를 먹었는지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라미레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뉴욕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박사로 역사학 교수 자리도 지냈다는 래리의 진술은 더 오락가락한다. 미국 역사상 첫 패전으로 기억될 베트남전이 끝난지 고작 3년 밖에 안된 상황에서, 래리는 양심적 병역기피자였노라고 또 어떤 날에는 해병대로 2년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는 말로 독자를 현혹시킨다. 라미레스를 추잡한 관음증 환자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성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를 서슴지 않기도 한다. 라미레스를 간호하는 미모의 간호사와의 썸타는 관계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 아버지와의 불화에 이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늘어놓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인지 래리가 전달하는 주관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지점이야말로 푸익이 소설의 제목에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가 되는 게 아닐까.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에 주목하다 보면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식인으로 각자의 고국에서 망명자 신세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지자인 라미레스의 처지야 이해할 수 있지만, 미국에 사는 뉴요커 래리의 경우는 어떨까? 아무런 명분도 없던 베트남전에 대한 격렬한 반전운동으로 결국 철군에 성공했지만 197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 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래리를 통해 푸익은 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가오고 있던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던 미국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조활동가 출신 교수는 어디에서고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 래리는 실업자나 바텐더, 정원사, 웨이터나 노인 요양사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소설 속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는 두 개인이 그리는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퍼즐 게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푸익 작가가 심리상황극과 유사한 상황을 매개로 방어기제가 작동 중인 상대방의 심리 저변을 돌파해 보려고 노력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비등해가는 갈등을 변주하며 긴장을 유도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좀 더 중요한 래리의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라미레스가 옥중 수기라는 메모를 통해 비밀리에 수행한 작업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래리는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대학사회로 복귀를 도모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가 래리가 라미레스가 철저하게 방어기제를 발휘해서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밝히려고 투입된 CIA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요즘 스릴러 비밀첩보물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그리고 또 라미레스의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래리의 대사에서는 문득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 연상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내려질 저주를 추동하는 원심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정말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 완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최대의 내공을 시전해서 쓴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여름에 프리모 레비를 읽은 것처럼, 이번 가을에는 마누엘 푸익에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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