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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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을 때부터 기대한 책이었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신간 코너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빌려왔다. 이미 누가 봤는지 책 접힌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당장 읽어야 할 책이 없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김경욱 작가는 1982년 4월 26일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 벌어진 이른바 우순경(우범곤)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우순경 사건과 비교해 보니 주인공의 이름과 실제 지명들을 픽션화했다. 소설의 특이한 점은 가해자의 목소리 대신, 차례대로 등장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이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굴곡진 한국사의 이모저모를 대입시켰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기이하게도 소설은 1938년 미래 미군 제식소총 M1 카빈을 개발하게 되는 밀주업자 제이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김경욱 작가는 미국 체류 하던 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총기사건을 계기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던가. 기존의 윈체스터 라이플에서 가스압력으로 발사속도를 개량한 신형 총기 개발에 얽힌 스토리가 44년 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총기난사사건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가정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 지명을 바꾼 궁지면 총기사건은 어려서부터 열패감에 사로잡힌 한 순경의 치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자칭 해병대 특등사수이자 빛나는 청와대 근무 이력을 가진 황 순경이 촌마을의 순경으로 발령이 나면서부터 비극은 잉태되었다. 혼례도 올리지 않은 채, 마을처녀와 살림을 차린 것부터 마을의 여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술만 마시면 ‘미친 호랑이’가 되는 성정도 한몫 거들었다. 박봉의 월급에 촌구석에서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 순경, 아니 황 순경은 상급자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서 지서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다량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끔찍한 사람사냥에 나선다.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를 비교해 보면 김경욱 작가는 사실에 충실히 기반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황 순경은 술 마시고 홧김에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으로 범행을 주도한다. 우선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우체국에 난입해서 직원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문제의 발단이었던 아내 손미자와 처식구들을 몰살시킨다. 그 뒤로도 황 순경은 불이 켜진 집들을 찾아다니며 범행을 계속한다. 김경욱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이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격이라고 해야 할까. 주민의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경찰관이 어둠을 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 그 자체였다는 사실은 당시 지배권력이었던 신군부의 모습과 자웅동체로 다가왔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접수하고 나서도 초동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자수를 늘린 치안 및 행정라인의 무능은 32년 뒤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어불성설의 정치적 구호인 정의구현을 외쳤지만, 실제 이런 희대의 사건이 발생하자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언론통제와 지역개발에 따른 물질적 보상이라는 당근으로 비극을 덮어 버렸다. 김경욱 작가는 그에 앞서 날벼락이 떨어진 궁지면에 조용하게 살던 이들이 안고 있는 우리사회 제반에 걸친 이슈들에 착점을 맞춘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시골전설을 믿고 삼대독자 아들을 법대생으로 만들었지만, 신학을 공부해서 신부가 되길 원하는 아들은 황 순경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만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아들을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초신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잃은 수잔 여사와 펜팔을 우정을 쌓아 가던 전화교환원 손영희 역시 비명에 스러진다. 마구잡이로 벼락같은 불을 내뿜던 해병대 특등사수의 카빈 소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열패감에 젖은 이십대 청년의 분노는 그렇게 조용한 시골마을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작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단지 일개 싸이코패스의 일탈적인 행동으로 분석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구조로 독자를 인도한다. 궁지면은 어쩌면 압축 고도성장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가 안은 부조리의 축소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 이후 남도를 휘젓던 마지막 빨치산 부대원 56명 전원 사살로 끝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고, 제로센 전투기를 몰던 가미카제 특공대원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변신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토굴생활을 하던 전직 빨치산도 등장하고, 보도연맹원으로 무고하게 전쟁 중에 학살당한 후예로 숨죽이며 살던 이들의 한 맺힌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조국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월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잃은 ‘두팔로걸어’ 베테랑의 전설도 씁쓸하기만 하다. 비극의 현장과 역사적 담론을 오가며 종횡무진 달리던 작가는 강호의 초절정 고수 파천황을 창조한 무협지 대가 계룡생을 숭배하던 고교생의 이야기로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신군부의 3S 정책의 일환으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프로야구계에 진출하려던 초등학생 고동배의 이야기로 비극의 서사는 마무리가 된다.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김경욱 작가 특유의 눙치는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질곡으로 가득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의식을 선사한다. 작가는 건국 이래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라는 심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오히려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소설적 핍진성을 부여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계기를 제공해준 점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고 싶다. 모쪼록 어둠 속에서 빛을 구도하는 그의 소설적 여로가 계속해서 빛을 발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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