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며 NFF (New Face of Fiction)
카릴 필립스 지음, 안지현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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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보면 운명적인 만남의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릴 필립스의 신간 <강을 건너며>가 꼭 그랬다. 내가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작가를 소개하는 문학전도사의 느낌으로 그의 이력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와 작가의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경력을 조사해 보니 대서양 양안의 노예무역과 흑인 디아스포라를 자기 문학의 중점적 주제로 다루고 있는 카릴 필립스 작가의 문학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는 10권이나 발표된 작가의 작품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강을 건너며>를 국내 출간 첫 책으로 고른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글로 그의 작품에 대한 해외신문사 리뷰들을 검색해 보았는데,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보니 이 작품으로부터 꼭 십년 뒤에 발표된 <먼 바닷가>도 비슷한 줄기의 작품인 것 같아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강을 건너며>에 집중해 보자.

 

<강을 건너며>는 모두 네 개의 별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스타일의 소설이다. 지독한 흉년 때문에 살기 위해 세 명의 아이들 마사, 트레비스 그리고 내시를 팔았다는 모놀로그로 시작되는 소설은 <이교도들의 바닷가>, <서부>, <강을 건너며> 그리고 마지막에 <영국 어딘가에서>라는 네 개의 이야기로 시대와 공간을 가로지르며 분화한다. 카릴 필립스 작가는 네 편의 이야기 모두 다른 서술 방식을 채택한다. <이교도들의 바닷가>에서는 계몽된 플랜테이션 경영주인 에드워드 윌리엄스의 ‘은혜’로 해방되어 신생 라이베리아에 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파견된 내시 윌리엄스 사이의 서간문 형태로 독자를 미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열병과 말라리아가 지배하는 원시세계에 도착한 문명인 내시 윌리엄스는 전 주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야심찬 개척과 선교사업을 시작하지만, 초기의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원망과 계속되는 가정의 불운이 겹치면서 주인과 연락이 두절되는 상태에 다다른다. 자신이 전폭적으로 믿고 파견한 내시에 대한 소식이 궁금해진 에드워드는 죽음을 무릅쓰고 진실을 직접 알아내기 위해 아프리카행을 선택한다. 카릴 필립스는 식민모국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기회 대신, 선교를 위해 열사의 땅에 스스로 찾아 들었다가 원래의 신앙마저 지키지 못하고 소멸해 버린 내시 윌리엄스의 삶을 통해 미국에서 출발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환상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노예수요의 최종 목적지였던 미국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서부>에서 환부를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네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서부>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전작이 내시 윌리엄스가 에드워드에게 보낸 편지와 에드워드의 아프리카 체험담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서부>에서는 여주인공 마사의 목소리로 비극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주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사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새 주인이 삼촌의 유산을 모두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노예, 가축 그리고 잡동사니 재산 순으로 경매에 붙여졌노라는 마사의 전언에서 우리는 비극의 전조를 읽게 된다. 인간이 가축보다 못한 시절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과연 예상했을까? 그들이 독립선언에 명시한 천부인권은 백인지배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냐고 묻게 된다. 경매에서 남편 루카스와 딸 일라이자 메이와 생이별하게 된 새로운 주인 밑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종교를 통한 위안을 찾아보지만 자신의 삶이 워낙 괴롭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에 마사는 공감할 수 없노라고 고백한다. 지옥 같은 남부 노예주로 팔려갈 운명을 거부하고 도망쳐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의 재결합을 꿈꾸며 서부행을 선택하지만, 소용이 다한 늙은 마사는 원정대에서도 외면당한다. 백인 지배계급은 물론이고, 동족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전락한 마사의 삶이야말로 카릴 필립스가 천착하는 흑인 디아스포라의 정수가 아니었을까.

 

18세기 중반 노예무역에 나선 젊은 선주 제임스 해밀턴의 항해일지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이루어진 <강을 건너며>는 평화롭게 아프리카에 살던 흑인들을 잡아 상품으로 절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던 신대륙에 공급하던 노예무역상에 관한 이야기다. <서부>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하면, <강을 건너며>는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아버지 역시 노예무역상이었던 가업을 이어 받은 젊은 선주 해밀턴 씨는 자신의 사업이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가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아내와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피고용 선원들의 선상반란과 노예반란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사나운 바다와 싸우고 있노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통해 고백한다. 해밀턴 씨에게 흑인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상품에 불과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상품’을 온전하게 보존해서 비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비인격화시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글자본주의의 원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 위한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양심에 어긋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젊은 선주의 진실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양심을 압도한다. 어쩌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피상적 사유와 자기합리화가 18세기 지식인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영국 어딘가에서>는 처음 세 편의 소설과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연이은 사랑에 실패하는 조이스의 일기로 독자를 초대한다. 시간의 통시적 구성을 혁파하고, 마치 퀜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독자는 초반에 정보부족으로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복잡한 구성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내면서 한 개인의 기록에 어떻게 자신의 장기로 삼는 흑인 디아스포라와 유무형의 차별의 연대기가 맞닿아 있는지 대가의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둔 조이스는 스스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여성으로 그려진다. 유럽대륙에서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섬나라 영국에 양키들이 주둔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접촉하면서 조이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연극배우 허버트와의(알고 보니 그는 애딸린 유부남이었다) 풋사랑에 실패하고, 폐가 망가져서 입대하지 못한 랜과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통해 책읽는 여성 조이스는 어쩌면 유심론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다퉈온 어머니가 폭격으로 죽고, 남편 랜이 전시 암시장 거래죄로 부재하던 순간에 만난 흑인병사 트레비스와의 만남은 결정적으로 조이스의 삶을 전환하게 만든 계기였다. 비록 남편이 수감생활 중이긴 했지만, 타국의 유색인종병사와의 로맨스에 경멸의 시선을 보내던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던 조이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두 세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차별의 통시적 시선에 카릴 필립스는 정면도전장을 내민다.

 

카릴 필립스가 발표한 다른 작품들을 좀 더 읽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 신대륙 미국 그리고 작가의 실질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을 삼각축으로 하는 노예무역의 시원과 흑인 디아스포라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카릴 필립스는 ㄷ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엔딩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 대신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겨 두었다. 내시의 마지막 정착지에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에드워드 윌리엄스는 만족했을까? 덴버에 내쳐진 마사의 가련한 영혼은 비참한 삶의 마지막을 세상의 끝처럼 보이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젊은 선주 제임스 해밀턴은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지맞는 사업이었던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었을까? 외로운 영국 아가씨 조이스는 기억에서 그리어와 트레비스를 지우고 새로운 삶에 완전히 적응했을까?

 

<강을 건너며> 단 한 권의 책으로 카릴 필립스 작가의 30년에 달하는 작가 경력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의 꾸준한 노력과 그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시도에 대해서만큼은 높은 평가를 해주고 싶다. 또 한 가지, 18-19세기 노예무역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현실감 넘치는 묘사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 아래 영국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들인 리서치 조사에 대한 공력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작가의 훌륭한 작품들과의 계속된 해후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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