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실타래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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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석 달 동안 잡고 있던 앤 타일러의 <파란 실타래>를 드디어 다 읽었다. 사실 지난달 독서 모임 책으로 내가 추천해 놓고, 독서모임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책도 다 못 읽었다. 지난 주말에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정리되자 바로 집어 들어서 남은 100쪽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만나는 앤 타일러 작가의 책이었는데, <파란 실타래>는 앤 타일러의 스무번째 책이라고 한다. 필력이 대단하군. 이 책이 부커상 파이널 리스트에 오른 건 참고로 알아 두자.

 

소설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간단한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 햄든에 정착해서 삼대째 살고 있는 휘트생크 집안 이야기다. 불쑥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 중인 막장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가족이라는 사회의 기본단위를 배경으로 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요소들을 가미해서 자극적인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비해 앤 타일러의 소설은 품격이 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막장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소설의 시작은 아들 데니의 게이 선언으로 휘트생크 집안에 폭탄이 터지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별 일 아닌 헛소동이었지만, 독자는 이 집안의 문제아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뭐 보통 자식이 넷 정도면 되면 이 정도는 기본이 아닌가.

 

엄마 애비 ‘달턴’ 휘트생크는 사회복지사 출신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이들이라면 두손 들고 식탁으로 초대하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 레드는 대를 이어 건축업에 종사하는 고지식한 미국 아버지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데니의 첫 번째 누나 아만다는 변호사로 맹활약 중이고(그래 집안에 변호사 한 명쯤은 있어야지), 둘째 지니 누나도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산다. 막내 스템은 탕자 데니와 대조되는 성격으로 언젠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을 것으로 인정되는 선량한 아들이다. 이런 세팅을 바탕으로 <파란 실타래>는 그야말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휘트생크 가족사를 상세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의 가족들에겐 머리 아픈 일이었겠지만 나같이 이런 드라마를 즐기는 독자에겐 즐거움일 따름이다.

 

자 어느 폭탄부터 살펴볼까. 우선 스템은 애비와 레드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애비는 스템을 친자식 이상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치매를 앓던 애비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에 사실의 전모를 알게 된 스템은 아버지 레드를 보살피기 위해 신앙심 넘치는 아내 노라와 자식들을 이끌고 햄든 저택으로 들어왔다가 충격을 받고 탕자 데니와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싸움을 벌인 스템과 데니의 이야기는 그들의 할아버지 주니어와 리니 매의 사랑이야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앤 타일러 작가는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점층적 설정에 입안해서 후반에 배치한 것 같은데 절로 혀를 찰 정도의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속출한다. 아 그리고 보니 레드의 누나 메릭 휘트생크도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을 위해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결혼하지 않았던가.

 

<파란 실타래>는 책의 절반 이상을 현재의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책의 절반 가량을 현재에 투자하고 나머지 부분을 과거의 플래시백에 골고루 분배한다. 우리가 사는 현재가 과거로부터 비롯된 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면 작가의 설정은 다분히 공정하다. 하지만 시대마다 휘트생크 가족이 겪는 문제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의 데니가 말썽꾼이었다면 과거에는 메릭이라는 아가씨가 문제였다. 좀 더 상류계층으로 이동을 원하는 메릭은 정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최고의 인생투자를 결심한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지위와 부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의 비난과 호랑이 같이 꼬장꼬장한 시월드의 주인을 모셔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니어와 리니 매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는 문득 서부시대의 속도위반결혼(shotgun marriage)를 연상시킨다. 주니어와 기가 막힌 정분이 난 리니 매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윈체스터 장총으로 주니어를 발가벗겨 집에서 내쫓는 위엄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성인이 되어 볼티모어에 안착한 주니어를 찾아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리니 매의 결기도 만만치 않다. 문득 <파란 실타래>를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싶었다. 휘트생크 집안의 구성원에 대한 캐스팅 상상만으로도 즐거울 지경이다.

 

사실 앤 타일러의 전작들을 읽어 보지 못해 그녀의 스타일이 어떤지 알 도리가 없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볼티모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뉴욕타임즈의 미치코 가쿠타니의 생각은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어쩌면 앤 타일러의 작품세계는 내가 좋아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와 그 궤를 같이 한 게 아닐까. 굳이 앤 타일러를 위한 변론을 하자면 클리셰이 같은 반복에 대해서 반대하는 편이지만, 작가가 언제나 수작을 양산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뭐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 아닌가 싶다. 일단 앤 타일러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보기 전까진 <파란 실타래>만으로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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