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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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쿡방 먹방이 대세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방송에서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현란한 요리 대결로 시각과 상상의 미각까지 충족시켜주며 웃음까지 선사해 주니 더 바랄 게 없는 그런 포맷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의식주란 그런 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식(食)은 그렇다 치고 의(衣), 다시 말해 옷은 어떨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요리와 달리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 옷짓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 같다.

 

김숨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진짜 품이 많이 드는 누비 바느질에 수개월 동안 직접 도전했다고 하는데, 아마 남성작가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요리고 뭐고 뭐든 남자가 못하는 일이 없는데 바느질은 과연 어떨까. 작가는 바느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바늘에 대한 집착을 넘어 강박을 가진 소녀 서금택과 그녀의 여동생 주화순 그리고 진짜 바느질하는 여자인 그녀들의 어머니 군위네(남수덕)를 차례로 등장시킨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요 화자는 바로 금택이라는 9살 먹은 소녀로, 작가는 어머니의 유일한 딸이고자 하는 바라서는 안되는 금단의 욕망을 가진 그리고 어머니의 바느질하는 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갈망에 가득한 내면세계를 한 땀 한 땀 누비 바느질하는 정성으로 담담하게 스케치해낸다.

 

김숨 작가 특유의 느릿한 서사구조에 나(서금택)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이 숨어있다. 어머니 남수덕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화자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한복거리 부령할매네 집에서 살던 그녀를 데리러 온 순간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작가는 온몸을 비트는 독자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설의 방대한 초반부를 한 벌의 누비옷을 짓는 군위네의 삶을 묘사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한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그렇듯, 그런 순간을 이겨내야 비로소 <바느질하는 여자>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 순간을 소설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한복거리에서 우물집으로 공간이동한 세 식구의 삶은 어머니가 어느 날 딸들에게 바늘을 건네주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그 귀한 바늘은 마치 어머니와의 애정을 상징하듯 애지중지하는 금택에게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해 보이던 화순에게도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도 몰랐다.

 

두 딸들에게 어머니는 공평했다. 모든 것을 공평무사하게 나눠준 어머니의 모습이 단조롭게 서술된다. 어머니를 욕망했던 금택보다 수많은 땀을 거쳐 누비옷을 짓는 어머니의 기술은 오히려 화순에게 전달된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는 동안,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는 수없이 되풀이되지만 이상하게 세 여자에게 부재한 남성 즉 다시 말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독자들은 어머니의 남편이자 딸들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된다. 한창 근대화란 이름 아래 개발독재가 진행되던 1970년대 중후반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바느질하는 여자>에서 이미 어머니는 시대에 뒤진 여자라는 사실을 금택은 깨닫게 된다.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바느질을 해서 먹고산다. 인간에게 필요한 의복은 특별한 기술이 없다면 자급자족할 수 없는 재화이기 때문에 대부분 비용을 지불하고 사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서 누비 바느질로 대변되는 옷짓기는 소설쓰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생산자가 최종소비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쨌든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자신의 기술, 노동을 통해 쌀과 소금을 사고, 연탄을 사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단조로운 그녀들의 삶에 김숨 작가는 어머니의 고객들이 물어다 주는 세상 이야기를 결부시키면서 소설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바늘과 누비 바느질에 강박하는 금택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들의 수다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곁을 맴도는 금택과 달리 화순은 언제나 귀기 서늘한 우물집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결국 나이가 찬 화순은 대구의 대학교 의상과로 진학해서 우물집을 떠난다. 하지만 그녀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금택은 집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의 곁을 지킨다. 어머니와 금택은 자연에서 먹거리와 천을 염색할 푸새거리들을 찾는데 진력한다. 광목과 명주 같은 단순한 천을 이용해서 그렇게 다양한 빛깔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작가가 직접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바느질을 배웠다고 하는 물리적 노력이 소설에 한 땀 한 땀 배어있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대학에 들어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깨닫게 된 화순은 지금껏 자신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준 어머니의 단골들이 사실은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더 나아가 공장에 위장취업도 마다하지 않는 운동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곁눈질해 배운 누비 바느질로 배냇저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화순의 모습이 근대화에 상응하는 입체적 캐릭터라고 한다면,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어머니 곁에서 배회하며 사는 금택의 모습은 답답하기만 하다.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걸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귀결될 지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과연 소설의 결말을 담담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머니와 금택의 조용한 세계에 파문을 던진 인물로 재숙이 등장한다. 금택의 어머니가 누비 바느질에 집착한다면, 어머니에게 누비 바느질 전수를 원하는 재숙은 다른 종류의 것에 집착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 누비 바느질이 가져다 줄 성공신화다. 아무리 세상만사가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미싱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시절에 전통복원을 하겠다는 이가 정작 자신이 해야할 일을 타인에게 미루고, 자신은 그 열매만 집어 먹겠다는 양태는 전문가 집단의 허상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비판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비정상의 정상화가 일상화가 되어 버린 시절에 전통 누비 연구소를 찾아 재숙의 양심에게 화순이 던진 일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느질하는 여자>는 속도가 나지 않는 그런 책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뿌듯한 성취감이 돋아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숨 작가의 단편소설 <국수>도 읽었는데 뭐랄까 이제서야 작가의 스타일이 잡힌다고나 할까. 남성이 배제된 공간을 지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국수>에서 밀가루를 반죽하는 시간이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는 시간이었다면, <바느질하는 여자>에서는 누비옷을 짓는 그리고 누비대를 떠나지 않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금택의 시간이 그랬던 것 같다.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는 또 어땠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녀가 아닌 같은 여성들간의 갈등은 보다 미묘하면서 첨예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하는 제임스 설터의 유작 <올 댓 이즈>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 읽고 나서의 감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드디어 내일 모레 달궁 독서모임이다. 이번 모임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게 될까 기대가 된다.

 

[뱀다리] 소설읽기의 맥을 끊게 하는 오자가 너무 많다. 과연 이 책 교정은 본 걸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오자가 남발돼서 별 한 개를 줄였다. 앞으로 신경을 좀 써 주셨으면 좋겠다.

 

[뱀다리2]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가 자신의 몰락한 한황실의 후손이라고 맨날 약파는 중산정왕 유승(희대의 정력왕이자 자식부자)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금루옥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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