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언제나 그렇듯 나의 뒤죽박죽 독서 때문에 내가 2016년 빨강원숭이해에 처음으로 읽은 책은 레이황 교수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정말 올해 처음 읽은 책으로 그리고 첫 번째 리뷰로는 당당하게 작고한 기타모리 고 작가의 책 <벚꽃 흩날리는 밤>으로 기억되게 될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에 구입한 책인데, 참 오랜 시간 끝에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램프의 요정 100자평인가에서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망각 속에서 소환시켜 만나게 된 그런 책이기도 하다. 아마 그 책은 <맏물 이야기>였지.

 

그런데 시대만 <맏물 이야기>의 에도시대와 현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서사의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어느 책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느낌은 그렇다. 도쿄 산겐자야의 어느 골목에 있다는 맥주바 가나리야의 명물은 맛있는 네 가지 다른 종류의 맥주도, 그 집에서 나오는 기가 막힌 요리도 아닌 바로 주인장 구도 데쓰야라는 존재다. 맥주의 시원한 맛에 어울릴 만한 그리고 단골손님들이 물어오는 희한한 이야기 거리라는 안줏감 말고도 마스터 구도가 제깍제깍 만들어내는 퓨전 요리의 향연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바가 있다면 어쩌면 나는 알코올 중독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망상이 불쑥 들었다.

 

소설은 페이지터너라 불릴 정도로 재밌고 맛깔스럽다. 고향 요릿집의 데릴사위로 찍혀 가게 십오 주년 행사에 소환되어 결국 그 인연으로 도쿄에서의 택시 기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필두로 시작해서, 벚꽃이 필 때마다 ‘교이코’라는 기묘한 이름의 벚나무를 찾게 형사와 그의 죽은 아내가 조종하는 일종의 복수극 그리고 버블경제 시대를 마감하고 장기불황에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종신고용이라는 신화를 마감하고 구조조정을 맞이한 세대를 모욕하는 개를 이용한 해고 통보라는 기발한 착상까지 이야기는 숨차게 달려간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 구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치로 손님이 필요한 순간에 미지근해버린 맥주잔을 시원한 맥주로 갈아 치우고, 궁진한 입을 달래줄 기가 막힌 요리들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제공하는 천상의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니 어찌 맥주바 가나리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몬트리올 여행 당시 생캐서린 스트릿의 어느 바에서 오래 전에 경험했었던가.

 

나머지 두 이야기인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진실>과 <약속>에서 기타모리 고 작가는 깊숙한 인간 내면세계 탐험에 나선다. 빈타운이라 불리는 도시에 있는 칵테일 바에 갔었는데 칵테일 메뉴가 없어서 바텐더에게 메뉴가 없냐고 물었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느 칵테일이든 만들어 준다고 해서 ‘싱가폴 슬링’을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황금 칵테일을 찾는 나그네의 이야기에서 바로 개인적 체험이 연상됐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가나리야의 손님과 마스터 구도 그리고 또 다른 오지랖 넓은 손님들이 가세해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내며 미스터리의 종착점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너무 재밌게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까지 꿰뚫는 마스터 구도의 정체가 자연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작가는 도대체 뭐 하던 사람이람. 물론 기타모리 고 작가는 아직까지 천기누설을 할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네 번째 시리즈로 미루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인 <약속>은 십년 전 약속을 지키려는 헤어진 연인들의 슬픈 로맨스라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역시 예상을 깨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단 한 번의 시위 체험으로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힌 남자 히지카타는 온갖 연쇄불행을 겪고 밑바닥에서 드디어 치고 올라와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하는 시절이지만, 그 반대의 길을 걷던 유키에는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파탄 직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을 옛 애인에게 모두 떠넘기려는 그녀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내 불행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극단적 방법마저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우다니. 물론 유키에가 행동에 옮기기 전에 우리의 마스터 구도에게 적발되어 무산된 것이 다행이었다. 전에 그녀가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의심을 돋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타모리 고 작가가 독자에게 선물한 회심의 일격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세 권이 피니스 아프리카에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 두 번째 인스톨부터 읽게 됐다. 새해 처음으로 만난 책이 이렇게 재밌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바로 전에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거시사적 차원의 역사서를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중량감이 달라서였을까. 그리고 보니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앞뒤로 읽는 책이 어떤가도 연쇄독서에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며칠 전에 읽기 시작한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을 펼쳤는데, 사실 생각보다 별로여서 덮어 버렸다. 앞으로 남은 가나리야 시리즈 두 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즐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